커넥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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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냐?”
명수는 신발을 신으며 외출준비를 하는 단유를 보며 물었다.
“바쁘긴.”
“학교에서도 보니까 쉬는 시간에도 책만 읽고, 집에서는 키보드나 두드리고, 잠깐 쉬나 싶으면 이렇게 또 나가고. 도대체 언제 쉬는데?”
“알아서 잘 쉬고 있어.”
“작년에도 이랬냐? 같은 반이 아니라서 몰랐던 건가?”
하긴 번역 일을 하면서 바빠진 건 사실이었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거야 머리로만 하는 일이고 쉬었다 하든 몰아서 하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번역 일은 마감 기한이 있고 키보드를 두드려서 완성 시켜야 하는 물리적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쉴 틈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타이핑 속도가 빨라지면 더 여유가 생기겠지만, 아직까지는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려야 한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야 편하지.’
원서를 읽는데 어려움이 덜하고, 하면 할수록 숙달이 되면서 번역이 어려운 단어들, 전문 용어들도 눈에 익기 시작해서 시간이 단축되는 마당이다. 용돈 벌이 이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
“갔다 올게.”
“나도 좀 있다 나갈 거야.”
명수는 축구부 때문에 학교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봄 대회가 며칠 뒤인데, 그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몸조심하고.”
“당연하지. 이제는 잘 안 다쳐.”
“그렇게 방심하다 한순간에 훅 간다.”
“걱정 그만하고 너나 차 조심해.”
“그래.”
단유는 손을 가볍게 젓고 집을 나섰다.
스튜디오는 홍대 근처에 있었다. 처음 이곳에 온 단유는 복잡한 골목과 많은 사람 때문에 길을 찾는 게 여간 쉽지 않다고 느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와중이었다.
“어이, 학생?”
“네?”
“학생 맞죠?”
“네.”
“혹시 연예인 해 볼 생각 없어요?”
“없는데요.”
“몸이 좋은데, 모델 같은 것도 생각 없어요?”
지금 그 모델 일 때문에 스튜디오를 가는 중이지만 그걸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네. 괜찮아요.”
“나 이상한 사람 아니고, 여기서 나왔는데, 혹시 생각나면 전화 줘요. 우리 회사는 항상 열려있거든?”
요즘도 이런 길거리 캐스팅을 하나 싶었다. 듣기로는 인터넷에서 회사 오디션을 공지하고 매주 오디션을 보기 때문에 이런 캐스팅 방식은 하지 않는다고 나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형 기획사나 신생 기획사의 경우에는 아직도 이런 길거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요즘 연예인 지망생들도 눈이 높아서 아무 회사에서나 오디션을 보지 않고, 대형 기획사 위주로 혹은 중형 기획사지만 네임밸류가 있는 회사 위주로 오디션을 신청한다. 그러니 소형 또는 신생 기획사는 발로 뛰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잘 안 하는 게, 워낙에 실용음악학원이나 댄스학원 등이 많아진 상황이다. 학원에서 기획사로, 혹은 기획사에서 학원 측에 오디션 제의를 넣거나 문의하는 터라 A&R(Artist and Repertoire) 직원들이 밖으로 돌아다닐 이유가 적어진 요즘이었다.
그러나 단유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면전에서 매몰차게 구는 법은 배우지 못한지라 단유는 남자가 건넨 명함을 받아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단유의 뒷모습을 보던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괜찮은 마스크의 인물이 있는지 살폈다.
마침내 찾은 스튜디오는 하얀 벽돌 외장에 2층으로 된 건물이었다. 건물 앞의 간판을 통해 본인이 찾던 장소임을 확인한 단유가 입구를 바라볼 즈음에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 한 명이 멀뚱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물었다.
“무슨 일이니?”
단유는 교육부 홍보담당관이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용건을 말했다.
“아, 너구나.”
담배를 바닥에 떨구고 발을 비벼 끈 남자는 단유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감독님. 배우 왔는데요.”
“배우?”
남자는 단유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배우 맞지?”
“아닌데요.”
“아냐?”
“그냥 출연만 할 뿐이지, 학생이에요.”
“뭐야, 그게. 그럼 배우지. 배우 맞대요.”
사무실 안쪽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선 감독의 맞은편엔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감독은 문을 열고 단유를 보며 물었다.
“니가 그···김단유, 맞아?”
“네.”
감독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단유를 살피더니 말했다.
“얼굴은 괜찮은데? 카메라도 잘 받겠어.”
그러더니 담배 냄새를 풍기던 사내를 향해 말했다.
“스튜디오는 정리 끝났어?”
“네. 방금 끝냈어요.”
“카메라 세팅은?”
“금방 끝나요.”
“그럼 세팅 끝내고 와. 그동안 이야기 좀 하고 있을 테니까.”
감독은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감독은 사무실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무실은 모노륨 바닥에 푸른색 벽지를 발라서 차분한 인상을 줬다. 새까만 책상 위는 모니터와 전화 외에는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게 없는 것처럼 여러 가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책상 뒤 창문을 넘어온 오후 햇살에 책상 위의 먼지들이 유유히 떠다니는 광경이 보였다.
“여기 앉아. 아, 인사하지?”
등을 돌리고 있던 이가 일어나 단유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둘은 인사했었다면서?”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선 도연을 바라보았다.
****
“카메라 테스트요?”
도연의 물음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3분짜리 영상 3개를 찍는다는데, 굳이 연기 레슨까지 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미리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보면 자연스럽게 촬영할 수 있을 테니까.”
“저만요?”
매니저는 생수를 따서 도연에게 건넸다. 도연은 생수를 받아 마시며 오랜 연습으로 마른 성대를 적셨다.
“그 애는 영상 감독에게 따로 받는다고 하더라만, 네가 걔랑 같이 받을 필요는 없잖아. 시간도 안 맞고. 우리는 따로 하겠노라고 했지.”
“시간이 왜 안 맞아요? 저 이번 달에 스케줄 다 뺐던 거 아니예요?”
“너 공부해야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 시간 낭비지 않니?”
매니저의 말에 도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어쩐지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감독님한테 밉보이는 거 아니에요?”
“그건 걱정하지 마. 우리도 우리 사정이 있고, 바쁜 스케줄 쪼개가면서 촬영하는 거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거야.”
“스케줄 없잖아요?”
“그쪽은 모르니까. 너야말로 왜 그래? 회사에서는 네 시험 때문에 일부러 한 달 스케줄을 빼줬는데?”
“촬영을 담당할 감독님한테 좋게 보여야 하지 않아요? 저 혼자 스케줄 핑계로 빠지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 같아서요. 게다가 카메라 테스트 정도면 시간도 많이 뺏기지 않을 거고요.”
“···진짜 그 이유야?”
매니저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도연을 살폈다.
“아무리 TV 방송에 안 나오는 영상이라도 사람들이 찾아볼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든 말이 나올 건데, 이왕이면 잘 나오는 게 좋죠. 발연기니 뭐니 그런 이야기 들으면 나중에 흑역사일 텐데.”
“솔직히 말해서 누가 찾아보겠니? 교육부 홍보모델이란 타이틀 때문에 일을 맡은 거지, 실제로는 찾아보는 사람도 없을 거야.”
“그래도 저희 팬들은 보지 않을까요? 일부만 본다고 해도, 그게 괜히 나중에 흉이 되면 어떡해요? 조금만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죠.”
“누가 널 말리겠니.”
매니저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몇 번 하더니 도연을 돌아보았다.
“원래는 오늘 저녁이랑 내일 저녁에 카메라 테스트랑 간단한 대본 리딩을 하려고 했는데.”
원래는 대본 리딩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 3분짜리 홍보영상 정도는 미리 받은 대본을 현장에서 맞춰보며 그때그때 조정하는 게 다였다. 어차피 컷 수도 많지 않은 홍보영상이기 때문인데, 그래도 연기라면 연기고, 도연에게는 첫 도전이기 때문에 실수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회사에서 배려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도연은 그런 호의도 반려하며 감독의 카메라 테스트에 나서겠다고 한다. 매니저는 도연의 생각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번 촬영의 중요성이 다른 것들에 비해 높지 않다는 게 회사나 매니저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조금은 가볍게 본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촬영 감독이란 사람도 이쪽 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가끔 정부 기관이나 기업의 수주를 받아 홍보영상만 전문으로 제작하는 곳의 감독이다보니 무시한 면도 있었다.
“전화했어. 내일 오후 1시야. 홍대에 있는 스튜디오라는데, 내일 너 데려다주고 나서 난 같이 못 있을 거야.”
“언니들 때문에요?”
“그래. 애들 다른 행사가 있어서 데리고 가봐야 하거든. 넌 도경이랑 같이 움직여.”
“그럴게요.”
“대신 내일은 끝나고 바로 회사로 와야 한다.”
도연은 배시시 웃으며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네.”
“꼭이다. 내일은 레슨 시간 늦으면 안 돼.”
“네.”
도연은 매니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계속 연습해.”
매니저는 보컬 연습실을 나와 문을 꼭 닫아 주었다. 문에 달린 조그만 창으로 헤드폰을 쓰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도연을 보며 눈웃음을 지어보던 매니저는 다시 바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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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바빠서 올 시간이 없었는데, 기어코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야.”
감독이 웃으면서 도연을 보았다. 도연은 쑥스럽다는 듯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수줍게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두 주인공이 모두 왔으니까, 한 번 카메라 테스트하고 얼굴 한번 보자. 대본은 가져왔지?”
“네.”
단유는 담당관으로부터 받은 대본을 꺼내 들었다. 대본이랄 거까지도 없고 겨우 몇 장의 A4용지 묶음이었다.
“현장은 이미 섭외가 끝났거든? 그래서 다음 주 주말에 찍기 시작할 거고, 빨리 끝나면 다다음 주에 끝이 날 거야.”
기간은 길지만 실제로 촬영하는 날짜는 단 이틀. 이틀 동안에 촬영해서 3회분을 찍는다. 그마저도 이번 영상이 드라마타이즈 형식이라 그렇지, 보통은 1회 3~4시간 촬영으로 마무리되는 게 보통인 홍보영상이다.
“감독님, 다 됐는데요.”
마침 세팅을 마친 남자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알렸다.
“가자.”
감독이 앞장서고 그 뒤를 서먹한 분위기의 소년 소녀가 따랐다.
스튜디오는 지하와 1층을 함께 쓰는데, 카메라 테스트는 지하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하얀 페인트로 꾸며진 황량한 지하 스튜디오의 가운데에 조명과 카메라가 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도연아.”
지하 스튜디오 구석에서 기다리던 스타일리스트 도경이 도연을 불렀다.
“아, 언니. 여기 계셨어요?”
“너 촬영하기 전에 얼굴 좀 봐야지. 옷은···감독님 옷은 이대로 가도 돼요?”
“스타일리스트예요?”
“네.”
“뭐, 상관없어요. 어차피 바스트샷 위주로 볼 건데요.”
“그래도 아이돌인데, 기왕이면 잘 나와야죠.”
“···영상을 어디 유출이라도 시킬까 봐 그래요?”
“네? 아뇨, 그런 뜻은 아니고요. 나중에 실제 촬영할 때도 이런 이미지면 좋겠다, 하는 뭐 그런 거 있으실 거 아녜요? 그런 거 미리 맞춰보시란 뜻이죠.”
“그렇게 하세요.”
스튜디오에도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메이크업을 해줄 사람이 있긴 하지만, 스타일리스트가 직접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다.
“넌, 우리 메이크업 좀 받고 서자. 강자야!”
단유는 그런 메이크업을 해줄 이가 없으니 스튜디오 소속 직원을 불렀다.
“어?”
그때 스타일리스트가 단유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너 맞지? 나 알지?”
단유가 도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맞네. 그때 걔 맞네.”
“언니, ···알아요?”
“아, 응. 알지. 예전에 같이 일했었거든.”
“예전에요?”
“나 말했었잖아? 가디스R 노래 신곡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일했었다고. 안 했었나?”
“가디스R?”
도연이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유는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으며 잠시 마주 보다 도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 지내셨어요? 회사 옮기셨나 봐요?”
“옮긴 게 아니라, 그때도 잠깐 일 도와준 거야.”
“아, 미래 누나 대신해준 거라고 하셨죠?”
“그래, 미래. 미래 이름도 정말 오랜만에 듣네?”
도연이 뭔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는 사이, 감독이 두 사람의 대화를 잘랐다.
“잘 됐네. 그럼 그쪽 분이 얘도 봐주실래요?”
“그럴게요.”
“저기서 하면 돼요.”
감독은 손가락으로 대기실을 알려준 후 고개를 돌렸다.
“한준아, 모니터도 다 됐어?”
“네, 감독님.”
“화이트도 맞췄어?”
감독이 걸음을 옮기는 사이, 단유와 도경, 도연은 대기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