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82화 (482/956)

커넥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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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다음에 뵐게요.”

여자 아이돌의 매니저와 희선이 로비에서 서로 마주 보고 허리를 숙였다. 따라왔던 아이돌 역시 희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시간 단유는 희선이 아닌 홍보담당관과 함께 있었다. 담당관은 단유를 따로 불러서 다음 일정 때는 촬영을 담당할 감독이 함께 나올 예정인데, 라고 말을 꺼냈다.

“전문 배우가 아니다 보니 그 전에 미리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싶다고 하시거든?”

담당관은 일부러 상대가 없을 때 이야기를 꺼내 단유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를 보여주었다. 단유는 그 배려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이틀 뒤 토요일 오후에 여기로 갈 수 있겠니?”

담당관이 건넨 명함은 어떤 스튜디오의 명함이었다.

“가서 테스트만 받으면 되나요?”

“별다른 건 없고, 미리 어떤 부분이 필요하고 연습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거야.”

단유는 고개를 돌려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떠나는 아이돌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함께 따라간 담당관이 말을 이었다.

“저 아이는 자기 회사에서 따로 연습을 시킬 모양이다만, 넌 그런 게 없잖니?”

“네, 그럼 토요일에 가볼게요.”

“그래. 그럼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보자꾸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도.”

담당관은 단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단유가 다시 희선에게로 향할 때, 아이돌과 매니저는 로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매니저가 앞장설 때, 아이돌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다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형식으로 인사를 보냈고, 단유도 그에 맞춰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우리도 가자.”

“네.”

핸드백을 고쳐 잡으며 먼저 앞장서 걸어가던 희선이 물었다.

“뭐라고 하시든?”

“아, 카메라 테스트 때문에 토요일에 와달라고요.”

“너만?”

“네.”

“하긴.”

어떤 이유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희선은 나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건물을 빠져나갔다.

“너 혼자 오라든?”

“딱히 그런 이야기는 없었지만, 저 혼자 가도 될 것 같은데요?”

단유의 덤덤한 대답을 들으며 희선은 단유가 ‘고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교육부 홍보모델이 된다는 것이 물론 별거 아니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 중학생이 예쁜 여자 아이돌과 광고를 찍는다는 게 아무런 감흥이 없을 일일까? 물론 선생님이 있으니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렇게 시종일관 태연한 자세로 있다는 게 희선의 기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카메라 테스트까지 받으러 오라는 주문을 받았다. 만약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초조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혹은 긴장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선입견이다. 그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도 ‘혼자’ 무엇을 한다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 단유를 보니 소년의 출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념에 빠져 걸음이 느려진 탓에 단유가 길을 걷다 돌아보았다. 뒤늦게 단유의 시선을 알아채고 희선은 걸음을 서둘렀다.

“가자.”

“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세종로 사거리로 향하던 희선은 길 건너편의 패스트푸드점이 보였다.

“단유야.”

“네?”

“뭐 좀 먹을래?”

희선이 손가락을 가리켜 보였다.

“선생님이 사줄게.”

단유는 희선의 손가락과 눈을 번갈아 보다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희선은 마치 자신의 속이 너무 훤하게 드러났던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괜히 얼굴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드는 와중에 단유가 말을 이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저 여기 서점에 잠시 들렀다 가도 될까요?”

“서점에?”

“이왕에 온 김에 책 좀 보다가 가고 싶어서요.”

“그, 그럴래?”

어쩐지 단유답다고 생각하면서, 기왕이면 햄버거 따위를 사주는 것보다 책 한 권을 사주는 게 선생님으로서 더 위신이 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유가 말하기 전에 미리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 집에는 제가 알아서 갈게요.”

“······.”

아마 먼저 가라는 뜻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갈등 했다.

‘희선아. 너 담임이야. 학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생님이라고.’

그렇다. 그런 의무가 있다.

‘단유가 어린애니? 여기서 길 못 찾고 미아라도 될까 봐?’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갈 아이지.

‘학생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봐줘야 나중에라도 문제가 없지 않겠어?’

만약, 혹시 만약에 단유에게 문제가 생기면 교장 선생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눈치 없이 굴래? 너 먼저 가란 소리잖아? 감시하는 것처럼 느끼면 어쩔래?’

논리는 빈약한데 감정적으로는 많이 흔들린다. 단유니까 그러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단유가 반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거나 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요즘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데, 단톡방이고 SNS고 소문이 나면 이상한 선생님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르겠다.

‘단유가 불량한 성격도 아니고, 설마 일탈을 하겠어?’

“그럼, 서점에서 책만 보고 집에 갈 거니?”

“네.”

언질은 받아놔야 마음이 편하리라.

“알았어. 그럼 보고 조심해서 들어가도록 해.”

“네, 선생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보자. 늦지 말고.”

“네.”

단유는 지하철 입구에서 희선과 헤어졌다. 단유가 먼저 서점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약간 착잡한 기분을 느끼던 희선도 돌아섰다. 이왕에 나온 김에 이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나 만나고 들어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어, 나 희선이. 너 퇴근했니? 아, 나 지금 광화문 근처에 왔다가 시간 되면 너 보고 가려고. 응? 야, 한가하긴 뭐가 한가해? 나도 일 때문에 나온 거거든? 됐어, 나 그냥 갈래.···10분 뒤? 그럼 너네 회사 앞에 가서 기다릴까? 로비에? 알았어. 그럼 거기서 봐.”

진흙탕 거리를 지나듯 걷던 걸음이 징검다리 건너는 걸음으로 바뀌며 희선의 얼굴도 한결 가벼워졌다.

서점에 들어간 단유는 평일임에도 사람으로 가득 찬 서점을 보며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사람 이상으로 가득한 책을 보니 마치 보물찾기를 하기 위해 시작 선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맞다.’

단유는 혹시나 해서 전문서적 코너로 향했다. 며칠 전에 자신이 제일 처음 번역했던 책이 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단유는 자신의 이름이 ‘역자’로 박힌 책을 찾게 되었다.

[옮긴이 김단유는 최연소 번역 1급 자격증을 취득한 번역 전문가로서 <지리의 발견>을 번역했으며, 현재 <디 옵티컬> 외 2종의 서적들을 번역 중이다.]

‘뭐야, 이게?’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이 짧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고심했을 편집부를 마음으로 위로했다. 솔직히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된 학생이며, 이 책이 첫 작품이에요’ 라고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책의 가장 앞머리에 저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편집부의 기획 의도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서, 가장 페이지 한끝에 조그맣게 실린 역자에 관한 내용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어렵게 배치를 해 놓았다. 차라리 역자에 대한 소개가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출판사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 가늠해 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단유는 책을 집어 든 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집에도 같은 책이 한 부 있지만, 그래도 서점에서 사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겠는가.

‘선물로 줘도 되겠지.’

단유는 흐뭇한 마음으로 서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청계천 길을 따라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걸었던 도연과 도경 두 사람은 종로 5가쯤에서 큰길로 나왔다.

“택시!”

도경이 나름 택시를 잡아보려 했지만, 퇴근 시간이 맞물리고 있던 틈이라 쉽게 택시가 잡히지를 않았다. 특히 동대문 쪽에서 나오는 택시들은 이미 손님들을 태우고 바쁘게 달리는 중이라 잡히질 않았고, 대학로 부근에서도 손님들을 태운 채로 오는 택시들뿐이라 도경의 부름에 반응하는 택시 따위는 없었다.

“콜택시 불러야겠네.”

차라리 진작 불렀으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을 건데.

―10분에서 15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손님.

“그렇게 오래 기다려요?”

―네, 지금 주변에 빈 택시가 없어서요. 그래도 근처에 빈 택시가 생기면 바로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님.

“알았어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도경이 혀를 찼다.

“그 많은 택시들이 다 어디 갔단 말인지 모르겠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면서요. 그냥 기다려요.”

모자 아래로 미소 짓는 도연을 보며 도경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저기 빵집 있다. 빵 먹을래?”

“아뇨. 괜찮아요. 빵까지 먹으면 진짜 큰일 날 거 같아요.”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지금 회사로 가서 레슨을 준비해야 하는데 배가 가득하면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 햄버거를 먹고 나서 긴 청계천 거리를 걸은 이유도 바로 그런 까닭이었고.

도경이 미안해한다는 걸 느꼈는지, 도연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언니. 언니 덕분에 정말 모처럼 스트레스도 풀었는걸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지.”

“그러니까요.”

길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경은 도연을 데리고 길 안쪽의 상점 옆 벽에 붙었다. 마침 도연이 수수하게 옷을 입었기에 망정이지, 행사용 복장을 입었다면 정말 큰일 났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새벽까지 레슨 하니?”

“네. 아마 2시까지는 할 거 같은데요.”

“어휴. 그렇게 레슨하고 내일 또 학교 가고?”

“그래도 전 오전 수업만 하잖아요. 차에서도 자면 되니까 괜찮아요.”

말은 저렇게 해도, 차에서 잠을 청하긴커녕 단어장을 꺼내 드는 도연이었다.

“만약에 말이야. 너 이대로 대박 나서 완전히 성공하잖아? 소녀시대처럼? 그러면 너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요?”

“계속 공부할 거냐고?”

“계속해야죠.”

“아빠랑 한 약속이라서?”

“그것도 있고요. 고등학교까지는 계속 공부하고 싶긴 해요.”

“왜?”

“최소한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최소한?”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요.”

자신이 모자란 것은 괜찮지만, 그런 이유로 부모님까지 들먹이게 될까 봐 두려운 도연이었다.

“그럼 연예인 말고 다른 직업은 생각 안 하고?”

조금 민감한 질문이긴 했지만, 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은 그래요.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장 다른 직업은 생각나지 않기도 하고요.”

도경은 도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빠르게 달릴 뿐인 자동차들이었다. 가끔 빨간 불에 걸려 멈춰 설 때 외에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는 자동차들. 거친 엔진음에 섞인 매연 때문에 코가 매워진다.

“그래도 넌 조금 낫다. 내가 아는 어떤 아이돌 멤버는 오로지 가수만 보고 달렸거든? 학교생활도 거의 포기하고 연습에만 매달리다가 데뷔를 했어. 그런데 계속 성공을 거두지 못하니까 회사에서도 결국 포기를 한 거야. 끝내 방출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이 아이는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거야. 새로 시작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몰라. 그래서 방황을 거듭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한 거지.”

“그래서요?”

“뭐, 다행히 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플로리스트를 하게 되었다고는 하는데, 뭐 젊은 호시절 다 보내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업이라 행복할 수야 있겠니? 알코올 중독···아이고, 내가 무슨 소리람. 미안하다, 몹쓸 소릴 했어.”

“아녜요. 그 정도 경각심은 가지고 살아야죠. 우리 아빠 말대로 상위 1%만 성공하는 세계잖아요.”

“그래서 하다가 안 되면 일찍 포기하게?”

그것도 답이다, 라는 도경의 말에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일이죠. 아직은 저도 어리니까요. 도전할 시간은 있다고 봐요. 그리고 언니가 말한 그 사람처럼 뒤늦게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와도 후회는 안 하려고요. 조금 뒤늦게 가면 어때요. 제가 즐거워서 하는 일인데.”

좋게 보면 긍정적인 사고이고 나쁘게 보면 그저 철없는 아이의 짧은 판단이겠다. 아직 겪질 못해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그래도요, 전 저를 망가뜨리는 일은 없도록 할 거예요.”

부모님이 절 얼마나 귀하게 키워주셨는데요, 라고 덧붙이며 혀를 빼무는, 아직은 귀엽기만 한 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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