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넥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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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명수와 함께 학교 뒤편 주차장으로 향했다. 선생님들이나 외부인들이 오면 주차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주차장인데, 한쪽에 자전거를 보관할 수 있는 보관소가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오늘 좀 덥네.”
“그러네. 불과 한 달 전이 겨울이었는데.”
“봄은 어디로 갔을까?”
명수가 자전거 체인을 풀어 가방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단유는 명수의 감성에 감탄했다.
“그러다 너 조만간 시 쓰겠다.”
“시? 한 번 써볼까?”
명수는 히죽 웃으면서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한발로 땅을 디딘 채 손을 펼쳐 보이는 명수.
“사라진 봄이여, 어디에 숨었느냐? 팥빙수 밑에 숨었느냐?”
과장된 연극 톤으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명수 때문에 단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았다.
“뭐야, 그게.”
“이런 게 시 아냐? 봄이 사라져서 어디에 있을까 찾아보는 화자의 심정을 잘 나타낸 시. 맞지?”
“그런데 왜 팥빙수야?”
“봄이 사라지면 뭐가 오겠어? 여름이잖아? 여름 하면 팥빙수지. 그래서 팥빙수 밑에 숨었는지 보자는 거지.”
“그냥 팥빙수 먹고 싶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먹고 갈까?”
단유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역시 자전거에 올랐다.
“가자. 내가 살게.”
“콜!”
명수와 단유가 동시에 땅을 박차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자전거를 끌고 가면 지나가는 이들이 한 번씩 쳐다본다. 특히 단유의 자전거는 체인, 바퀴가 돌 때마다 마치 LED 등을 단 것처럼 하얀빛이 원을 그리는데, 밤이 아닌 낮에도 그 현란함이 눈에 띄기 때문에 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차된 자전거 옆에 멈춰 서서 그 부분을 쳐다보다 가곤 했다. 단유와 명수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자전거를 두고 팥빙수를 주문했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단유와 명수가 가게 안에서 팥빙수를 시켜 먹고 있을 때, 어디서부터 따라왔는지 모르겠지만, 한 20대 남자가 자연스럽게 걸어와서는 단유의 자전거 앞에 섰다. 단유와 명수가 사용한 자물쇠는 U자형 자물쇠였다. 이런 일에 익숙한지 피식 웃고는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본 뒤, 등에 멘 슬링백에서 절단기를 꺼냈다.
“어?”
보통 이 부분을 자르면 쉽게 잘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절단기 날이 파고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새로 나온 건가?’
혹시 모양만 비슷하고 재질이 전혀 다른 종류의 자물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주변을 빠르게 살핀 뒤, 힘을 다해 절단기를 눌렀다. 그러자 절단기가 자물쇠의 U자형 몸통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너무 힘을 썼는지 얼굴에 피가 몰려 붓는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조금만 더 하면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목표물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두근이 불타오를 정도로 힘을 줘서 절단기를 눌렀는데, 절단기 날이 서로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이상함을 느꼈다. 계속 파고드는데도 불구하고 잘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뭔가 싶어 힘을 풀고 절단기를 벌렸더니,
‘세상에!’
절단기 날이 움푹 패어 있었다.
‘이게 가능해?’
무슨 금강석을 자르는 것도 아니고, 설령 금강석이라도 그렇지 특수강으로 만들어진 절단기 날이 이렇게 상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설마 하며 자물쇠를 살피니, 약간의 흠집이 있을 뿐 전혀 손상이 없었다.
“뭐 하세요?”
번뜩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킨 사내는 두 아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쳇, 소리를 내며 연장을 챙겨 들고 달아났다. 달아나려 했다. 단유가 두 사람 사이를 몸으로 밀치고 달려가려는 사내의 손목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남은 왼손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붙잡은 뒤, 달려나가던 힘을 이용하여 당기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사내는 헛발을 짚으며 허둥대다 단유의 힘에 이끌려 비스듬하게 고꾸라졌다. 바닥에 절단기와 가방이 나뒹굴었고, 가방 속에서 자물쇠며 열쇠뭉치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단유, 너 되게 잘 써먹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신고나 해. 현행범이니까.”
“아, 그래.”
명수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태연히 핸드폰으로 112를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장계중학교 3학년 5반 인명수라고 하고요, 제 친구는 같은 반 김단유라고 하는데요. 네? 아, 저희가 자전거 도둑을 잡아서 신고하려고요.”
“이거 못 놔! 놔!”
팔을 꺾어 등에 붙이고 무릎으로 그의 허리께를 눌렀더니 사내는 버둥거리기만 할 뿐 빠져나오질 못했다. 남은 팔을 휘두르려 해도 다른 쪽 팔이 워낙 심하게 꺾여 있는 상태라 휘두를 수가 없었다.
“그러게 왜 남의 걸 탐내요.”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안 놔, 이거?”
단유는 힐끗 시선을 돌려 자전거를 살폈다. 자전거를 대 놓을 때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자전거였다.
‘바꿔야 하나?’
욕심을 부린 게 너무 과했던지도 모르겠다. 그냥 평범하게 만들걸. 그나마 자전거 자물쇠를 ‘조금’ 튼튼한 재질로 바꾼 탓에 쉽게 도난당할 우려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다시 바꾸면 명수나 하은이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혹은 엉뚱한 걸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의혹보다는 도난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괜히 ‘저런 결정체’로 한들 성능이 특별히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 평범하게 바꾸는 게 좋겠다.
뭐든 튀는 건 좋지 않은 것 같다.
****
단유는 담임 선생님, 희선과 함께 종로구의 교육부 건물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홍보담당관 이제윤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계중학교 교사 임희선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눈 뒤, 담당관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구나.”
“네.”
“네 덕분에 꽤 고생했었는데, 인사가 건조하구나? 그래도 우리, 나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어?”
담당관이 웃음을 흘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희선이야 방송 정도로만 봤으니 모르겠지만, 단유는 담당관과 따로 자리를 가져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옆에는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한 상태였었고.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이렇게 함께하게 되었으니 잘해보자고.”
“네.”
“그럼 선생님, 같이 가실까요?”
담당관은 두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일단 저희가 이번에 찍을 내용은 올해부터 반영될 새 교육 정책에 대한 것입니다. 홍보 동영상과 광고용 시안 몇 개를 찍을 거고요. 동영상은 드라마 타이즈 형식으로도 찍을 예정입니다.”
과거와 같은 딱딱한 정책 홍보 문구만 잔뜩 들어간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스토리가 있는 광고 영상을 찍겠다는 이야기였다.
“작년에 기획되었고 올해 2월부터 준비되어서 이제 바로 찍기만 하면 되는데, 김단유 학생 혼자만 나오는 것은 아니고 유명 연예인도 함께 참여할 예정이에요. 그분이 주인공이고 단유 학생은 주인공 친구, 이렇게 나올 거예요. ‘똑똑하지만 엉뚱한 면이 있는’ 친구니까 학생과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요.”
희선은 정확히 어울리는 배역이라고 생각했고, 단유는 ‘왜 잘 어울릴까’라고 고민했다.
“몇 편의 동영상은 각각의 주제에 맞게 스토리가 짜여 있고요, 각각의 주제들은 학교 내의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창의적 인재상 발굴’이란 주제에서는 ‘교실’이란 공간에서 두 친구가 상상하면서 펼치는 대전 형식의 씬이 구성되고요, ‘더 나은 미래’라는 주제는 강당에서 학교로 공간을 옮기면서 대화를 나누는 씬이 구성됩니다.”
희선은 그게 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장면처럼 보였다. 그런 희선의 표정에서 심드렁함을 느낀 담당관은 자신 넘치는 눈빛을 빛내며 웃음을 지었다.
“별거 없는 것 같죠? 그런데 저도 대본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드라마타이즈라서 스토리가 중요하거든요. 평범한 공간에서 기발한 상상과 대화를 통해 주제를 전달한다, 는 게 작가의 설명이었어요.”
그렇게 설명해도 특별할 건 없었다. 사실 그런 형식의 광고들은 워낙 많았고, 과거에도 넘쳐나듯 했으니까. 당장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일본의 음료수 광고뿐이었지만.
“상대는 누군가요? 유명한 사람인가요?”
희선은 오히려 그게 더 궁금했다. 담당관은 대답을 하려다 역시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안 궁금해?”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별로요.”
“왜? 혹시 같이하고 싶다거나 만나보고 싶다거나 그런 사람 없어?”
“네.”
단호한 단유의 대답에 담당관은 할 말을 잃었다.
“여전히 재미없구나, 너.”
개그맨도 아니고 개그 지망생도 아닌데, 굳이 재미를 찾을 이유가 있나? 단유는 그저 얌전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유명 아이돌이라고 그러던데요.”
희선에게 대답해준 담당관의 말이었다.
****
“바른 인성교육이 대한민국을 이끈다. 좋은 말이네.”
좋은 말이긴 한데, 그걸 대사로 하려면 낯간지럽기 이를 데가 없다. 듣기로는 재미있는 드라마 형식의 광고를 찍는다고 들었는데, 이런 대사가 들어가는데 재미있을까?
“자, 우리 같이 달릴까? 와, 이런 대사도 있어. 소름.”
매니저의 유난스러운 호들갑에 닭살이 돋았다.
“그만 해요.”
“대본 봤니?”
“봤으니까 그만 해요.”
“첫 연기인데 열심히 해야지? 혹시 아니? 이 기회로 드라마 쪽으로 진출하게 될지?”
“저 놀리는 거죠?”
“놀리긴 누굴 놀려? 우리 귀염둥이를 누가 놀려? 니가 놀렸어?”
스타일리스트가 화들짝 놀라, 는 시늉을 하며 매니저와 호흡을 맞춘다.
“아니요? 제가 귀염둥이를 왜 놀려요? 이렇게 귀여운 애를?”
“아, 진짜!”
“야, 그럼 니가 놀렸어?”
이번엔 운전대를 잡은 로드매니저에게로 방향이 돌아갔다. 운전석 룸미러를 통해 눈웃음을 짓고 있는 로드 매니저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요. 제가 감히 어떻게 놀려요.”
“그럼 누가 놀렸다는 거니? 감히 말이야. 응? 걱정하지 마. 만약에 누가 너 놀리면 나한테 말해. 내가 혼쭐을 내줄 테니까.”
“아이 씨.”
“어이구, 우리 귀염둥이, 삐졌어요? 우쭈쭈.”
차 안에서 웃음 폭탄이 터지면서 웃음소리가 차를 들썩거리게 하였다. 오직 한 사람만이 삐진 척, 볼을 부풀리며 스태프들을 돌아보았다.
“나빴어.”
“알았어, 알았어. 이제 안 할게. 네가 너무 굳어 있으니까 풀어주려고 그런 거지.”
“그래도 그러지 마요. 나 진짜 삐질 거예요.”
스키니 청바지에 노란색 밴딩 형 오프숄더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 아이, 도연이 팔짱을 끼고 매니저를 흘겨보았다.
3인조 걸그룹 리본소녀의 막내인 도연은 이제 17살이 된 소녀였다. 작년 가을께에 데뷔한 리본소녀는 중형 기획사 소속의 걸그룹이지만 대형 기획사 못지않게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었다. 첫 발표곡이 워낙 좋게 ‘빠진’ 탓에 대박을 터뜨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대형 신인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게다가 멤버들이 모두 개성이 넘치고 에너지가 밝아서 다양한 세대,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이 리본소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직은 비공식이지만 팬클럽의 숫자도 날이 갈수록 빠르게 늘어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신인은 신인이다. 개별적으로, 혹은 팀으로 이름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송과 예능 활동, 행사 등을 소화하느라 바쁜 일정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도연에게 ‘교육부 정책 홍보모델’ 일이 들어온 것이다. 정확히는 ‘리본 소녀’에게 들어온 것이지만, 일정상 동영상 촬영은 도연만 찍게 되었다. 홍보 사진용 촬영 때는 다른 멤버들도 오겠지만 말이다.
“혼자라서 조금 떨리긴 해도, 굳어 있진 않았어요.”
도연의 대답에 매니저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굳은 거야. 정 못 믿겠으면 거울을 봐. 네 표정이 어떤가.”
손에 들고 있던 거울로 보니, 굳은 표정을 살피기 전에 오른쪽 눈 아래로 화장이 뭉쳐 있는 게 보였다. 콧등에도 땀이 났었던 건지 번질번질한 것 같고.
“언니, 나 눈 새로 해야 할 거 같지 않아요?”
“도착하면 새로 해줄게.”
스타일리스트의 웃음소리를 흘려 들으며 도연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