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79화 (479/956)

의심스러울 때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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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거를 통해서 네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어.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한 셈이지.”

“단유야, 무슨 말이야 저게?”

그저 반장 투표를 했을 뿐인데, 민주주의를 실천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니 명수는 자기가 모르는 뭔가를 했었나 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아이들이 너에게 죄가 있다고 여겼다면, 너를 뽑지 않았겠지만, 다들 너에게 죄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너를 반장으로 뽑은 거야. 우린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생님에게 우리의 의사와 진실을 알린 셈이지.”

관영의 얼굴에는 뿌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관영과 단유는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관영은 뭔가 뒤이어 나올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인데, 단유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관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참지 못한 관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어떻게 생각해?”

‘선거라는 방식을 그렇게 활용할 줄 몰랐어. 정말 대단한걸’ 이나 ‘반장으로 뽑아줘서 고마워’ 같은 반응을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유는 그런 고마움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단유의 시선이 껄끄러운 느낌이었는지 관영이 얼굴을 굳혔다.

“왜 그렇게 보냐?”

“···일단 고마워.”

“그래.”

“‘죄’가 없다고 생각해줘서.”

“응?”

“그래도 선거가 그런 식으로 이해되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아.”

“왜?”

“선거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당선된 사람이 무죄라는 건 오류가 있거든.”

“···아이들이 모두 상황을 지켜봤고, 그래서 너에게 죄가 없다고 판단한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죄는 우리가 가늠할 문제가 아니야. 선생님께서 판단할 문제야.”

“선생님은 보지 못했어.”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상황을 전해 듣고 판단하실 수 있어. 이 세상 모든 범죄의 순간에 경찰과 검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죄를 판별하는 것 같아?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하는 것은 그것을 식별할 능력과 권한이 있는 사람의 몫이야.”

관영은 단유의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상기되었던 얼굴은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증명한다? 선거는 죄의 유무를 판가름하는 제도가 아니야. 만약 배심원석에 앉은 이들의 투표 같은 경우였다면 모를까, 반장을 뽑기 위한 선거는 말 그대로 선출을 위한 행위에 불과해. 그 행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는 곡해될 수 있어.”

“아이들이 설마 그런 걸 몰랐을까? 적어도 아이들은 너에게 죄가 없고, 반장으로서도 잘할 거라는 생각에서 투표했던 거야.”

“정말 그럴까? 예전에 어떤 대통령 후보도 범죄 혐의가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선거에 당선되었다고 들었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범죄 혐의를 조사할 여건이 만들어질 리도 만무하지. 결국 혐의 사실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선거는 혐의 면피용 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야.”

“아, 됐어. 둘 다 그만해. 머리 아프게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

명수가 끼어들어 둘 사이의 대화를 막았다.

“너, 단유 말 알아들었어?”

“···대충은.”

“그럼 됐어. 너 되게 똑똑하구나.”

명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관영의 어깨를 툭 하고 밀 듯이 쳤다. 그리고 단유를 향해서도 물었다.

“너, 반장 안 할 거야?”

“······.”

“뽑혔으면 해야 하는 거 알지?”

“그래.”

“그럼 열심히 할 거지?”

“해야지.”

“그럼 됐어. 열심히 반장 해. 그럼 된 거잖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야.”

“뭐가? 니가 병억이 눕힌 거? 그건 네 말대로 담임 선생님께 처벌받으면 되는 문제야. 네 말대로 문제가 있다면 말이야. 지금 얘랑 이러쿵저러쿵한다고 해서 반장 투표한 거 없었던 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선생님도 그냥 넘어가신 일이야.”

단유는 명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명수가 뻘쭘한 모양새로 시선을 피했다.

“가끔은 명수 네가 부럽다.”

“뭐가?”

단순한 게 진리, 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긴 관영이란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일까? 그리고 굳이 관영의 생각을 고쳐줘야 할 의무도 없고 말이다.

****

예전에도 한 번 고민했었지만, 이상하게 단유는 카메라 앞에 설 일들이 자주 생기는 것 같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돈 벌고 좋지 뭐.”

“이번에는 장학금이라는데요.”

“장학금?”

“아, 그렇구나.”

김 샌 얼굴로 고개를 돌려 TV를 보던 하은은 채널을 돌리다 홈 쇼핑 채널에 시선을 고정했다. 날씬한 모델들이 나오는 속옷 광고였다.

“저거 하나 살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갈등하는 하은을 보며 물었다.

“혼자 있을 때 하시는 게 어때요?”

“왜? 부끄러워? 민망해?”

하은의 눈에 깃든 장난기를 읽지 못했다면, 정말 민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있을 때 살까 말까 고민하는 건, 사달라는 이야기처럼 들리잖아요.”

“사 주게?”

“사드릴까요?”

빤히 쳐다보는 두 사람.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유, 이 능청아. 얘가 왜 이렇게 점점 뻔뻔스러워지니?”

“선생님이야말로 점점 심해지시는 것 같은데요.”

단유는 TV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별로 비싸진 않네요.”

“네가 속옷 가격을 알아? 비싸니, 마니. ···혹시 여자친구한테 속옷 선물도 했던 거 아냐?”

어머, 얘 좀 봐, 라며 호들갑을 떠는 하은을 무시하고 단유는 핸드폰을 들었다. 진짜 사려는 건 줄 알고 하은이 서둘러 단유의 손에 든 핸드폰을 뺐었다.

“뭐하니, 너! 장난이야, 장난.”

“사드릴게요.”

“사긴 뭘 사. 됐어. 아유, 이젠 장난도 못 치겠네.”

“저 돈 있어요.”

“그래요? 아이구, 좋겠어요. 김단유씨. 그래도 돈 좀 번다고 그렇게 막 쓰면 안 되는 거야.”

“막 쓰긴요. 선생님한테 쓰는 건데 뭐 어때요.”

“얘는. 나도 돈 벌 거든?”

“선생님이 사는 거랑은 다르죠.”

“야! ···너 내 사이즈도 모르잖아!”

“······.”

단유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뭔데요, 사이즈?”

“이 녀석이!”

하은이 달려들어 단유의 머리를 팔에 끼고는 꿀밤을 먹였다. ‘감히 선생님을 놀려!’라며 머리를 콩콩 찧는 하은에게 엄살을 부리며 ‘죄송해요, 잘못했어요’라고 비는 단유였다.

“아, 좀 조용해요. 남들 다 자는 시간에 뭐예요?”

명수가 부스스한 머리로 방에서 나와 소리쳤지만, 하은은 쉽게 단유를 놓아주지 않았다. 명수가 머릴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카메라가 모델들의 전신을 훑는 가운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쇼호스트의 멘트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 하기로 했군요.”

“네.”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 단유가 결심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장학금 때문이었다. 중학교야 의무교육이라 ‘학교운영지원비’, 소위 ‘육성회비’라 불리는 비용만 내면 되지만 그마저도 1학년 때만 냈고 금액도 1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이라 부담이 적었다. 게다가 남들 다니는 학원도 안 다니고, 인터넷 강의도 듣지 않으니 고정 수업료 항목으로 지출되는 돈이 없었다. 가끔 단유가 필요로 사는 책이나 문제집들을 사는 비용 정도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수업료가 많이 드는 것 같더라고요.”

“아직은 의무교육이 아니니 말이에요. 내 기억에는 한 분기에만 30만 원 넘게 내야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알아보니까 한 해에 거의 2백만 원이 넘는 것 같더라고요.”

거듭된 단유의 요청에도 교장은 쉽게 말을 놓지 않았다. 단유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건네며 교장은 미소를 지었다.

“단유군 정도라면 과학고 같은 특목고를 목표로 하지 않나요?”

“고민 중이긴 한데, 아직은 결정을 못 했어요.”

“왜죠? 수학, 과학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좋아하긴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흠. 아무래도 진학에 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상담해 줄 선생님이 필요하겠군요.”

교장은 단유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이해했다. 보통 일반 가정의 경우, 학부모가 학생의 결정을 대신하거나 혹은 결정을 돕는 조언을 해 준다. 하지만 그런 부모가 없는 단유이니 정보도 없고, 선택의 조언도 듣기 어려운 환경이라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중에 진학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눠봐요. 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단유군.”

“네?”

“혹시 바둑 둘 줄 아나요?”

“아니요.”

“장기는요?”

“못 두는데요?”

“그렇군요. 아쉽네요.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하나 배워두면 좋을 거예요. 예전에 어떤 실학자는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할 것 4가지 중 하나가 바둑이라고도 했지만, 두뇌 계발과 학습력 신장에 도움이 되기도 하거니와···사실 어른들과 대화를 하며 즐길만한 주제가 되기도 하니까요.”

“참고할게요.”

교장은 웃으면서 단유를 보냈다. 단유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나선 뒤, 교장은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완연한 봄이 되어 곳곳에 봄꽃들이 피어오른 가운데 집에 가는 아이들과 남아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뒤섞인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품에서 핸드폰을 꺼낸 교장은 어디론 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접니다. 네. 김단유군이 승낙을 했습니다. 날짜 정해주시면 맞춰서 가도록 하죠. 네. ···네. 그럼요. 그럼 이제 됐나요? 고맙긴요. 처음부터 약속드렸던 거 아닙니까.”

교장은 상대의 인사를 대충 흘려 받으며 통화를 마쳤다. 이로써 벌였던 일들이 일단락되었다. 장학관을 그만두고 장계중학교로 오면서 재단에게서 부탁받았던 학교 정상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교육청 감사 해결 건과 교육부의 홍보모델 청탁은 마침표를 찍었다.

사실 단유의 홍보모델 청탁은 교육지원청에 있던 창완이 들어줄 이유가 없는 부탁이긴 했다. 하지만 같은 직급의 사무관이 찾아와서 사정을 비는 모양새에 동정이 가기도 했고, 단유라는 학생에게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단유와 대화를 하면서 그 학생의 자질과 품성이 성적표에 나오는 순위 이상으로 좋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라이브 방송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단유라는 아이가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인터넷 방송에서 교육부의 높은 분들 심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창완은 단유를 버릇없다 여기지 않았다. 버릇없다는 식으로 폄하하기 전에 그 아이가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게 자신들, 어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유는 기본적으로 약자였다. 어른에게도 약자인 중학생이고, 교육부라는 정부 기관에 비교해도 가장 힘이 없는 약자의 위치에 놓인 학생이다. 그런 학생의 외침을 단순히 버릇없네, 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형법에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reo)’ 라는 말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어떤 토론과 논란이 있을 때 그 사안을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진정한 시민 사회의 완성, 이라는 게 창완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시스템화시키려고 노력한 지난 세월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강자의 목소리에 귀를 더 많이 기울이고, 단유 같은 아이들도 이 사회의 ‘계급’과 돈의 권력성을 논하는 상황이다. 세상은 점점 더 피폐해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창완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그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 희망을 전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몫이고 선생님들의 몫이며 학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바른 학교에서 바른 교육으로 학생들이 자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실험을 시작해 볼 생각이며, 그래서 교장직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도 장학관이 사립학교의 교장이 되는 것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자칫 그 시선이 엉뚱한 오해를 낳고 좋지 않은 여론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런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그래서 창완은 당사자들, 교육부와 재단의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이직이 깔끔하게 정리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그 첫 단추는 잘 꿰어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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