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77화 (477/956)

의심스러울 때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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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책상 위에 얹어져 있던 서류들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 학교에 오기 전부터 학생에 관해 들은 바가 있어요.”

희선은 단유의 과거 행적을 떠올렸다. 같은 반도 아니었고, 학년도 달랐지만, 단유를 모르는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이 없을 정도였다. 1학년 때부터 사고를 쳤던 데다가, 2학년 때는 무려 전국으로 송출되는 인터넷 방송에서 교육부를 물 먹인 장본인 아니던가? 혹자는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고들 하지만, 희선이 보기엔 그저 소영웅주의에 빠진 중학생의 허세였다고 생각했다.

“경력이 화려하더군요.”

찾던 서류를 찾았는지 교장은 손에 프린트된 종이 한 장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학생 기록부에 적힌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더군요.”

교장은 품에서 안경을 꺼내 코에 걸쳤다.

“6년 전에도 SNS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군요? 그 일로 도서관 홍보용 광고를 찍었다고. 맞나요?”

“네.”

6년 전이면 초등학교 3학년?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무슨 뮤직비디오에 나왔다고 하던데, 예전부터 연예계 쪽에 관심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쪽과 연계된 줄이 있는 것일까? 희선은 호기심이 동하는 걸 느꼈다.

“TV에도 출연했었고요. 그런데 그때는 별로 좋은 평을 듣지 못했나 보군요. ···궁금하군요. 그때의 단유군은 어땠는지 말이에요.”

“지금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안경 위로 눈동자를 올려 단유를 바라보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변한 게 없나요?”

“솔직히 키가 자란 거 외에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것도 재미있네요. 보통 단유군 또래의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느끼던데 말이에요.”

“느리게요?”

“한 학년이 지나는 기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고, 방학은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던가요? 그래서 한 해가 지나면 참 긴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을 가지죠. 한 학년만 지나도 작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무척 많이 다르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실제로도 다르죠.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우는 양과 질이 매해 달라지니까요.”

교장의 말에 희선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시간은 어떤가? 시쳇말로 ‘화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할 필요도 없다. 어제나 오늘이나 같으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한 학기가 지나고 1년이 지난다. 엊그제 학교에 들어와서 선배, 동료 교사들에게 인사를 한 것 같은데 벌써 7년 차가 되었다.

지금도 이런데 나이가 더 들면 어떨까?

“제가 알기론 도파민에 의해 선조체 돌기신경세포가 활성화되면 선조체의 회로가 빠르게 진동해서 그렇다고 들었는데요.”

뭐? 희선의 감상을 깨뜨리는 단유의 대답에 희선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 그런 연구가 있긴 하죠.”

교장의 대꾸에 희선은 다시 교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파민이 분비되면 생체 시계가 빨리 돌아가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계가 느리게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나이 든 사람은 도파민을 적게 생산하기 때문에 생체 시계가 느리고, 그래서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 느낀다죠? 하긴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처럼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적어지죠.”

희선은 어쩐지 소외감이 느껴졌다. 원래 이런 내용은 모두 다 아는 내용인 걸까? 아니면 본인만 일에 치중하느라고 일반 상식이 부족해진 것일까?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은 너무 감정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고 보일 때도 있어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생각해보면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도 조급하게 선택을 하지요. 조급한 선택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낳거든요.”

“야구 선수는 공을 보고 결정하고 치는 데 0.4초가 걸린다고 하던데요? 때로는 빠르게 선택해야 할 때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야구 선수는 3할만 되도 훌륭한 타자라고 하지요? 7할은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충분한 사고와 결정을 내릴 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라도 천천히 생각하지 않을까요? 만약 조급한 선택을 내렸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걸 ‘상황 논리’라고 하지요. 객관적 사실이나 원칙보다 현실적 제약과 한계를 거론하고 이로 인한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경우죠. 하지만 그런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집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도 천천히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요?”

“도둑이 들어오거나 강도를 만나거나 다리가 무너지거나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을 얼마나 많이 마주치게 될지 궁금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굉장히 제한적이겠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그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제한적인 선택지를 적절히 고르는 융통성과 응용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야겠군요.”

희선은 이런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겁도 없이 입을 여는 단유도 이제는 대단하게 느껴지고, 한참 어린아이의 질문이나 대꾸에도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받아주는 교장 선생님은 존경을 넘어, 옛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말을 주고받는 모습에만 집중하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하겠다. 도대체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허허, 모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바쁜 선생님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봅니다.”

“아,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앞으로 1년간 가르쳐야 할 학생이 어떤 학생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선생님을 붙잡고 있었는데, 제가 너무 생각이 짧았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덕분에 단유를 좀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그런가요?”

웃음을 흘리는 교장 선생님의 검은 눈동자가 안경 위로 드러났다. 살짝 치켜든 그 눈을 마주 보던 희선은 아차, 하는 마음으로 일어섰다.

“아, 그러고보니 학급회의 중일 텐데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던 것 같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만 가봐도 될까요?”

“아, 그래요? 그럼 먼저 일어나세요. 단유군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 보내도 되겠죠?”

“아,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희선을 허둥지둥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단유도 덩달아 일어나 희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올라와.”

“네, 선생님.”

인사를 마친 희선이 교장실을 나선 뒤, 단유가 교장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차, 더 마시겠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다시 자리 앉아요.”

“괜찮으시면 말 편하게 놓으시죠, 선생님.”

“허허, 이런 모습을 보면 중학생 같지가 않아요, 단유군은.”

여태 나눈 대화들만 놓고 봐도 일반적인 중학생 중에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싶지만 말이다.

희선이 교실로 다가가니 떠들썩한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교실을 들어가자 황급히 자리를 찾아가는 아이들 때문에 소란이 일었지만, 금세 조용해졌다.

희선은 교탁 앞에 서서, 그 앞에 놓인 출석부를 붙잡았다. 조회 후에 그대로 두고 갔던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불과 20여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체감상으로는 1시간이 넘게 흐른 것 같았는데 말이다.

‘도파민 때문인가?’

희선은 고개를 젓고는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저 아이들도 단유와 비슷할까? 혹시 자신만 저 아이들을 그저 어리고 미숙한 아이들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은 생각 이상으로 똑똑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아이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장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받아줬던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님!”

교실 뒤편에서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을 부르는 이는 명수였다.

“단유는요? 혹시 혼자 벌 받는 건가요? 저랑 얘도 같이 싸웠는데 같이 벌 받아야 하는데요?”

마치 맛있는 간식을 뺏기고 자신도 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구는 명수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자신을 끌고 들어가냐며 눈을 부라리는 병억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벌 받는 거 아니고 교장 선생님이랑 이야기 나누는 중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너희들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거니까 그때까지 제발 얌전히 좀 있어라. 알겠니?”

아까 전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모습 대신 차분하게 대꾸하는 선생님의 반응에 반 아이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이지?

“반장? 아, 반장 뽑아야 하지? 반장 하고 싶은 사람?”

갑자기 이런 분위기에서 반장 선거를 하겠다고?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과연 누가 손을 들지 궁금해했다.

“저요!”

명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반장이 하고 싶어?”

“아뇨, 저 말고 단유요. 김단유를 반장 후보로 추천합니다!”

이유야 말할 필요도 없다. 2년 내내 전교 1등이었고, 남은 1년도 전교 1등이 확실한 데다가 아이들 사이에서는 평판도 좋은 편이라 반장을 시켜도 무방하리라. 다만 지금은 아니다.

“단유는 안 돼.”

“왜요?”

“왜라니? 몰라서 묻니? 첫날부터 반 친구랑 싸움을 일으킨 사람을 어떻게 반장으로 뽑아?”

“싸운 거 아닌데요.”

병억이 눈을 흘겨보지만 명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쟤가 먼저 시비 걸어서 그런 건데요.”

이미 교장실에서 들은 내용이라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써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안 돼. 그리고 너희 둘도 오늘 방과 후에 남아서 선생님이랑 면담해야 할 거야.”

명수는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선생님!”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

“그래, 관영이.”

관영이 일어나더니 말했다.

“저도 김단유를 반장 후보로 추천합니다.”

희선은 이게 또 무슨 상황이냐는 듯 인상을 썼다.

“방금 선생님 말 못 들었니?”

“단유가 싸우지 않았다는 건 제 눈으로도 봤고, 저희 반 아이들도 봤습니다. 싸웠다기보다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방어하는 수준이었어요. 그러니 폭력 사건의 주범이나 공범 정도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단유 정도라면 저희 반 반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단유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만약 제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단유가 후보가 되더라도 반 아이들이 단유를 뽑지 않으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단유가 반장이 된다면 반 아이들이 단유에게 죄가 없음은 물론이고 반장으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기에 뽑은 것 아닐까요?”

아이들이 ‘오오’, 감탄사를 뱉으며 손뼉을 치고 책상을 치며 호응을 보냈다.

희선은 정말 자신이 이 아이들을, 아니 요즘 아이들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교육의 최전선에서, 매일 아이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이런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던 희선이었다.

“단유군, 자네의 생각은 알겠어요. 그래도 물어보죠. 그렇게 불가피한 상황이었나요?”

“아뇨.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전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죠?”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일들이 있었고, 그때는 대화로 해결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불씨가 남아 이후에 더 큰 일로 번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방식을 바꿔본 거예요.”

“그렇군요. 효율성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학생의 말대로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제가 학생의 나이쯤이었을 때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어요. 그러니 학생이 하는 말은 이해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원칙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원칙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하는 방향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때로는 그게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지키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법이거든요.”

교장은 다시 채운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안경을 빼지 않았던 탓에 차에서 올라온 뜨거운 김이 안경에 서려 교장의 검은 눈동자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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