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74화 (474/956)

포착(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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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단유가 생각한 수습은 당연히 ‘대화’였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먼저 대화가 가능한 상대인가를 가늠해보는 것.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하겠다고 꾸역꾸역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보다 피곤한 일은 없다.

욕을 입에 담으며, ‘생각’의 문을 잠근 채로 침입자를 향해 짖는 도사견처럼 으르렁거리는 병억과는 대화가 어렵겠다는 걸 판단한 단유는, 그다음 방법을 생각했다. 힘에는 힘.

본인이 말한 대로 힘은 전통적인 방식의 조율법이다. 마냥 무식하다느니 하면서 피할 이유가 이제는 없다. 그 정도는 지난 경험들을 통해 인정할 수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조율이란 측면에서 힘이 투사되어야 한다. 감정적인 통제를 벗어난 힘은 결국 개싸움이고 지성적이지 못하다.

‘싸워도 지성적으로 싸워야지.’

단유는 병억의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예측했다기보다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정도였지만. 그래서 병억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순간 ‘피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몸을 기울이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단유는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정당방위는 없지만, 정당방위처럼 보이기는 해야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냥 맞았다가는 턱이 나갈지도 모른다고 여겨 살짝 고개를 뒤로 물렸다. 덕분에 광대를 맞았다.

병억의 손이 펼쳐지며 단유의 턱이 붙잡혔다. 동시에 교복 앞섶이 거칠게 잡혔다. 그 와중에도 단유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노려보는 병억의 눈빛. 그 순간이었다.

‘지금!’

단유는 병억의 눈이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보는 그 짧은 순간에 손을 올렸다. 오른손으로 턱을 잡은 병억의 소매를 붙잡고, 왼손으로는 병억의 겨드랑이 부근 옷깃을 강하게 쥐어틀었다.

병억도 단유의 눈빛이 변함과 동시에 자신의 옷깃과 소매를 틀어잡는 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기술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단유가 막지 못하리란 생각에 더 빨리, 더 강하게 밀고 들어갔다. 단유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간 자신의 다리가 단유의 행동에 제약을 주리란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단유에게 도움이 되었다. 단유는 다리 한쪽만 살짝 뒤로 빼는 선에서 제약을 풀었다. 그리고 허리를 틀며 잡은 손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병억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등을 찧은 병억. 아찔한 통증과 함께 든 생각은 ‘무식한(?) 새끼’라는 평가였다. 업어치기나 빗당겨치기나, 시전자의 몸은 상대의 몸에 밀착해서 상대의 중심을 흩어놓는 동시에 지렛대 역할을 해야 한다. 힘의 효율이 중요한 기술이다. 그런데 단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통에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흔들리지 않는 하체와 비틀어 넘기는 허리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마치 팔씨름 세계챔피언과 시합하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우워!”

주변에서 이해하기 힘든 감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사이 단유는 여전히 붙잡고 있던 병억의 팔을 모로 꺾으며 병억을 바닥에 엎드리게 만든 뒤, 그 위를 무릎으로 눌렀다.

“아악!”

“강한 사람은 위, 약한 사람은 아래. 넌 어떡할래?”

****

교장의 첫인사를 겸한 교무회의가 끝이 나고, 각 반의 담임들은 교실로 갈 준비를 했다.

“특히 3학년 학생들은 질서 잘 잡으셔야 합니다. 특히 작년의 데모 주동했던 애들 있죠? 언제라도 반에서 튈 수 있는 아이들이니까 잘 잡으셔야 돼요.”

주임 선생님의 경고에 선생님들은 교무 수첩을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5반 선생님.”

“네.”

“잠시 저 좀.”

“네.”

5반의 담임을 맡은 임희선 선생님이 주임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반에 김단유, 들어간 거 아시죠?”

“아, 네.”

김단유. 계륵이라고 말하면 너무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그런 면도 없잖아 있었다. 반 평균을 끌어 올려주는 소년이기도 하고, 유독 단유네 반은 다른 반에 비해 사고가 적어 담임이 속 끓을 걱정을 덜 하게 만든다는 평가가 있긴 하다. 그러나 사고가 아예 없지는 않아, 한 번 사고가 나면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의 ‘큰 손’이란 점에서 경계의 대상인 데다, 지난해의 데모를 유발한 장본인 격으로 주목받는 소년이다. 중학생답지 않게 똑똑하지만, 중학생답지 않게 정치적인 아이로서 경계대상이 되었다.

“올해는 제발 조용히 넘어가게 해주세요.”

“그게, 어디 제 뜻대로 되나요.”

“선생님!”

“···네, 알겠습니다.”

그냥 얌전한 아이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면이 있다. 버릇없이 굴지는 않는다지만, 2학년 담임이었던 선배 교사가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 선배는 올해 초심을 찾기 위해 1학년 담임을 자청했다. 어쩌면 자신도 내년에 초심 운운하며 3학년을 멀리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암울하다.

“임희선 선생님?”

“···네, 네? 교장 선생님.”

교장이 온화한 얼굴로 다가왔다.

“선생님 반에 김단유, 라는 학생이 있다죠?”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다. 나쁜 의미에서 인터넷 스타.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 천재 소년. 새로 온 교장 선생님도 이 학교에 대해 알아보면서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조례 끝나고 잠시 교장실로 안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단유를요?”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교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선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 자신은 폭탄을 껴안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중간만 가라는 건데.’

너무 뛰어난 것도 너무 모자란 것 만큼이나 좋지 않다. 옛날 사람들도 아는 것을 요즘 아이들은 모른다. 아, 모르니까 가르쳐야 하는구나.

희선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무실을 나섰다.

****

“놔, 씨발 새끼야!”

단유는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슬쩍 들어 누운 채로 휘두르던 병억의 주먹질을 피했다.

“일어나.”

병억이 서둘러 일어났다. 옷에 먼지가 잔뜩 묻었다.

“개새끼가 어설프게 배워서 써먹으니까 아주 신이 나지? 응?”

당해보니 알았다. 단유는 기술적으로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놈이었다. 이번의 망신은 자신이 방심해서 당한 것이다. 방심하지 않으면,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자신이 질 수 없었다. 당하고는 못 산다.

그런데 단유가 담담히 말했다.

“아니.”

“···뭐래, 씨발 놈이.”

“배운 거 아냐. 네가 한 거 따라 한 거야.”

병억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침을 뱉었다. 능청스러운 새끼.

“씨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디서 약을 쳐?”

병억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마치 정신을 잃은 사람마냥. 그러나 공격은 그렇게 두서없지 않았다. 마치 권투를 하는 사람처럼 오른팔을 굽힌 채로 한 걸음 내딛더니 잽을 날리듯 쭉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눈가리개용. 단유가 잽을 피하려고 몸을 뒤로 빼는 순간, 내밀었던 팔을 잡아당기며 동시에 왼발을 휘두르는 돌려차기가 단유의 옆구리를 향했다. 병억은 사각(死角)과 스피드로 단유의 힘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단유의 눈은 짧은 순간에 날아오는 다리를 인지했고, 복잡한 연산을 순식간에 거쳐 선택지를 결정했다.

‘될까?’

의문은 잠시, 단유는 병억의 왼 다리를 오른팔로 껴안듯 잡았다. 오른팔을 접어 발이 빠지지 못하게 한 뒤,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굽히며 몸을 비틀었다. 병억은 발을 빼지 못해 후속 공격은커녕 오히려 단유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으로 나뒹굴 뿐이었다. 게다가 다리가 꺾이는 반대방향으로 붙잡힌 상황. 힘을 주고 빼기도 힘들었다.

병억이 손을 뻗고 거두는 힘에 비례해 다리를 휘둘렀는데 단유는 막고 비틀어 다시 눕힌 결과다. 아이들에게서 또 한 번 기괴한 탄성이 쏟아진다.

“아악! 놔, 이 새끼야!”

“또 넌 아래. 난 위. 어쩔래? 이제 굴복할래?”

“야 이 개새끼야!”

워낙에 큰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옆 반의 아이들까지 무슨 소란이냐며 구경하러 들어왔다.

“뭔데?”

“청소부가 청소하는 중이야.”

“청소부?”

“일진 청소.”

“아, 김단유.”

예전 몇 번의 일들이 단유에게 이상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상대한 애들이 모두 일진이었던 건 아니지만, 싸움 좀 한다는 애들이 단유만 만나면 힘도 못 쓰고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면 교실에는 힘자랑하는 애들이 기를 쓰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반과 달리 조용한 편이었던 단유네 반이었다. 그 때문에 일부 아이들은 단유가 일부러 일진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단유네 반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정을 잘 모른 채 결과만 전해 듣던 다른 반 아이들은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병억과 단유, 명수가 대립할 때도,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청소부’는 미리 청소를 해서 싹을 자를 것인가? 그리고 과연 청소부는 청소를 잘했다.

단유가 시계를 살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율하려면 얼마 남지 않았다. 단유는 병억의 다리를 붙잡아 누른 상태로 말했다.

“힘은 언제나 더 큰 힘에 눌릴 뿐이야. 힘의 논리는 그런 거야. 누르고 누름을 당하는 건, 동물들에게나 통용될 이야기지. 인간이라면 이런 무식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 지금 니가 주먹질하는 거? 몇 년이나 갈 거 같은데? 평생 주먹질만 하고 살 거야? 아니면 너보다 약해 보이는 애들한테만 주먹질하며 살래?”

“놓으라고! 새끼야!”

병억은 질 수 없다는 듯 버럭버럭 소릴 질렀다.

“네가 뭔데 지랄이야, 개새끼야! 네가 뭔데? 평생 주먹질을 하든 노가다를 하든 네가 뭔 상관이냐고!”

이제는 진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지런한 선생님이라면 종이 치기 전에 교실에 들어올 수도 있으니 상황을 마무리해야겠다.

“난 상관하기 싫어. 그럼 너도 상관하지 않게 해야지.”

“···뭐?”

단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신경 끄고 살게 해달라고. 얌전히.”

단유는 병억을 누르고 있던 무릎에 힘을 가했다.

“윽!”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상관 안 하고 지낼 테니까, 너도 나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애들 앞에서 힘자랑하거나, 욕하고 싶으면 나 안 보는 데서 해. 안 보이면 신경도 안 써.”

병억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단유의 검은 눈을 보니 이전처럼 악을 쓰기가 꺼림칙했다.

“뭣들 하는 거니?”

교실의 앞문을 쾅쾅 두드리며 등장한 담임의 목소리에 빙 둘러있던 아이들이 허겁지겁 자릴 찾아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아이들까지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느라고 소란이 일었다. 희선은 인상을 찌푸리며, 교탁 앞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단유는 병억의 다리를 풀어주고 일어났다. 그제야 칫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병억이 반대쪽 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침 자리가 비어 있던 터라 병억은 그곳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거기, 너.”

하지만 교복에 잔뜩 먼지가 묻은 병억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뭐야, 너희 거기.”

움직이다 걸린 병억과 자리에 멈춰 서 있던 단유가 희선에 눈에 걸렸다.

단유의 얼굴은 보자마자 알았다. 다른 또래에 비해 몸이 좋다더니, 과연 중학생 반에 고등학생이 교복만 입고 앉아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너희 둘 나와.”

단유가 먼저 성큼 걸어 교실 앞으로 나서고, 뒤이어 병억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뒤따랐다. 가까이서 보니 가관이다.

단유의 얼굴은 붉게 부어 있고, 병억은 바닥에서 뒹군 사람 모양으로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싸웠니?”

“네.”

단유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희선은 어이가 없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선생님 앞에서 싸웠다고 말할까? 학폭위가 열리면 전교 1등도 얄짤없는 세상이다.

“너 싸웠어?”

“맞았는데요?”

병억은 자기 옷을 들어 보이며 보란 듯이 말했다. 단유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그의 볼에 그어진 흔적을 가리켰다.

“이건 뭔데?”

“······.”

“네가 때린 거 아냐?”

병억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선은 침묵의 의미를 읽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애들 잘 잡으라’는 주의를 들었는데 첫날부터 학폭위를 열면, 과연 주임은 자신을 뭐라고 하겠으며, 새로 온 교장은···.

“아.”

맞다. 교장 선생님이 단유를 불렀다. 큰일이다. 저 얼굴을 보면 물어볼 텐데? 희선의 얼굴이 변검 배우의 그것처럼 휙휙 바뀌는 이유를 학생들은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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