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착(4)
-------------- 473/952 --------------
“내가 수습할게.”
단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경계를 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다가갔다. 소년의 교복에 붙은 명찰을 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윤병억.”
“···왜 부르고 지랄이야.”
소년, 병억은 이죽거리면서도 시선은 단유에게서 떼지 않았다. 단유는 병억이 이제까지의 애들처럼 막싸움이나 하는 녀석이 아님을 깨달았다.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처럼 보이지만,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어깨를 낮춰서 타점을 피하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이전에 상대했던 아이들이 정글의 원숭이들처럼 일부러 몸을 부풀려 위세를 보이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물론 단유는 주먹질을 할 생각이 없었다. 불리한 싸움을 일부러 할 필요도 없고, 안 한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먼저 앉아 있었고, 넌 나중에 왔어. 만약에 네가 저 자리를 정 앉고 싶었다면, 일어나란 말 대신 부탁을 했었어야지. 무턱대고 일어나라는 둥 시비를 거는 건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아.”
“새끼가 어디서 이빨을 털어?”
저속한 놀림에도 단유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첫날부터 싸움 일으켜서 좋을 거 없잖아. 여기까지 하자.”
“지랄하네, 개새끼. 어디서 씹선비질이야?”
병억은 단유가 훈계질을 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속이 뒤틀렸다.
“네가 뭔데 싸우네 마네야, 새끼야. 개병신 새끼야. 눈깔을 확 뽑아버릴까.”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병억은 단유와 단유 뒤에 있는 명수를 주의 깊게 살폈다. 사실 속으로 많이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축구부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해도 교복이 작게 느껴질 정도로 튼튼한 명수의 허벅지를 보면 그의 킥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단유는 의외였다. 제대로 붙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긴 해도 짧은 순간에 자신의 팔을 잡아채던 반사신경과 한순간 통증에 신음을 흘릴 정도로 강했던 손아귀의 힘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굳이 비교하면 예전에 합기도를 배울 때 봤던 사범님이 저랬을까? 그 당시 합기도 3단의 사범님은 나이가 20대 중반이었다. 그런 사범님과 비견될 정도라니.
그래도 자신의 소맷대 빗당겨치기에 넋 놓고 당한 것을 보면, 기술적으로는 자신이 한 수 위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느 곳에나 생각의 차이, 의견의 충돌은 있을 수 있어. 그런데 그 차이를 조율하는 방식의 하나가 힘이야.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굴복시키고, 힘으로 상대와 나의 위치를 정하려는 건 오랜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이지.”
뜬금없이 시작된 단유의 이야기에 병억은 물론이고, 주위 아이들까지 멍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에 대해 조금 아는 이들이야, ‘역시’라고 중얼거리는 정도였지만, 단유를 잘 모르는 이들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위에 걸치고 있던 교복 재킷을 천천히 벗으며 말을 이었다.
“힘으로 서열을 정하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구별돼. 그리고 강한 사람을 위, 약한 사람을 아래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보다 강한 사람은 위, 나보다 약한 사람은 아래.”
“이 새끼 뭐라고 하는 거야?”
병억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죽거리며 주변의 아이들을 빠르게 훑고 반응을 살폈다. 싸움판에서 ‘이빨 터는’ 애들 치고 제대로 된 애들이 없다. 자기만 몰랐던 꼴통인가 싶어 살피니, 아이들의 반응이 여간 심상치 않다. 눈에 기대감이 깃들어 있는데, 단순히 여흥(餘興)으로서의 싸움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유’라는 아이의 언행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
이제야 단유의 이름표를 확인한 병억은 ‘김단유’라는 이름의 익숙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병억은 2학년 2학기 중간에 전학을 왔다. 전학을 온 뒤에도 한동안 친구가 없었다. ‘얌전히 지내라’는 생활지도부 선생님의 경고가 없었더라도, 본인이 딱히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아이들과 교류가 없었고, 전학 온 일주일 뒤, 반에서 까불대던 한 녀석을 ‘조용히’ 처리한 뒤로는 아예 다가오는 이들이 없어 학교 내의 일에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들리는 귀가 달려 있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이름이 있었는데, 그게 ‘김단유’였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느니, 선생님과 싸워도 이길 거라느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애’라는 수식어였다. 줄여서 전교 1등.
원래 1등은 잘 기억되는 법이다.
****
“지금 학교가 많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저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어렵기 때문에 교사들은 긴장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교장 선생님께서 무리하신 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전 그분이 개인적 욕심 때문에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전(前) 교장은 오로지 자리보전과 명예로운 은퇴만을 꿈꿨을 뿐이다. 실질적인 수익(?)은 모두 재단에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기도 했다.
“은퇴를 바라볼 나이인 제가 굳이 이 학교로 와서 교장직을 맡겠다고 한 이유는, 지난 30여 년간 교육 현장의 일선에서 보고 지켜온 신념이 이 학교에서도 꽃피우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늙은 교육자가 말하는 신념은 무엇일까?
“학교는 오로지 학생들을 위함이다? 아닙니다. 학교는 학생들을 키우는 동시에 선생님들도 함께 크는 곳입니다.”
교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처음부터 훌륭한 교육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하게 인용하는 앤 맨스필드 설리번은 처음부터 훌륭한 교육자였을까요? 23세의 나이로 헬렌을 가르치기 시작한 설리번은 좋은 교육자는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헬렌과 함께 커갔기에 지금에 이르러 설리번은 훌륭한 교육자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거겠죠. 그 기간이 무려 40여 년입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여러분들은 짧게는 3년, 길게는 20년을 교육 현장에 몸 바쳐 일하고 계시죠. 설리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근속 기간이군요.”
나름의 농담이었을까?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교사들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학생들의 성장만큼이나 교사도 성장해야 합니다. 교사가 성장해야 학생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고, 더 나은 학교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머무르기만 하면 결코 발전은 있을 수 없겠지요.”
몇몇 교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몇몇은 자연스럽게 근무평정과 교원평가(교원 능력 개별평가)를 떠올렸다.
“여러분들이 입버릇처럼 학생들에게 자기계발을 강조하듯, 저 역시 여러분에게 자기계발을 부탁하고자 합니다. 외부에 의한 강제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한계도 있을뿐더러 의지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니까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억지로 하라고 말한들, 반발심만 커질 뿐이지요?”
몇몇 교사는 ‘자기계발? 좋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지긋지긋한 일을 덤터기 쓸 것 같다는 불안감에 눈동자를 굴렸다.
“해서 올해부터 여러분들에게 자기 성장을 위한 몇 가지를 주문하고자 합니다.”
올 게 왔다는 느낌으로 교사들은 다음을 기다렸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향후에 있을 수업들에 대해 자기 평가를 실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스스로를 평가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학교에 신고하시면 됩니다.”
“네?”
한 평교사가 잠시 넋을 놓고 있었던지 멍청하게 되묻는 짓을 했다. 곧 자신이 무슨 짓을 했던가, 깨달은 교사가 입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지만, 교장은 친절하게 보충 설명을 했다.
“매시간 매 수업을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학기 수업들에 대해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 내용을 학교에 알려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토대로 교원평가에 포함을 시킬 것입니다.”
현재의 교원평가는 동료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의 평가를 토대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외부의 평가가 독립적이며 객관적인가 하는 신뢰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능력 좋은 교사를 발굴하기 위한 평가 지표 중 가장 객관적인 지표여서 외국에서도 시행하는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그 평가에 ‘자기가 매긴 점수’를 포함 시킨다?
“교장 선생님, 저기 그게 평가 신뢰도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본인의 변화는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겠습니까? 수업 참관 한 두 번으로 선생님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고, 미성숙한 학생들의 평가를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지요. 게다가 여러분들은 교육자 아닙니까? 교육자로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분들이 자신을 속이는 짓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양심과 교육자로서의 자부심, 사명감을 보여주세요.”
교장은 교사들의 굳은 낯빛을 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지금 이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학교의 본질을 놓침으로써 발생한 일들입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교육입니다. 더러 누군가는 교육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건 교사의 권위를 낮추는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교사는 서비스 제공자가 아닙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 스승이어야 합니다. 스승으로서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고 발전하는 것, 그리고 그런 스승으로부터 학습 받고 성장하는 학생들로 학교를 채워가는 것이 바로 학교의 본질인 것입니다.”
****
“네가 전교 1등이냐?”
병억의 말에 단유는 눈을 껌뻑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개×같은 놈이 ×같이 혀를 놀릴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이구, 전교 1등님께 실례를 범했네? 응? 이럴까? 남들이 다 1등 님, 1등 님 해주니까 니가 뭐라도 된 거 같지? 그러니까 니가 무슨 선생이라도 된 것처럼 굴지? 응? 씨발 놈아?”
애들이 기대하는 이유는 저놈이 전교 1등이기 때문이리라. 선생님들의 비호를 받는 아이. 저 얼굴에 흠집이라도 나면 담임은 물론이고 생지부 선생, 더 나가서 교장까지 득달같이 달려와서 자신을 곤죽으로 만들겠지. 그 위세를 등에 업고 저리도 당당한 것일까? 심술이 난다.
병억은 허리를 살짝 세우며 단유에게 다가갔다.
“머리에 뭐가 든 놈들은 전부 이빨만 털 줄 알지? 니가 인생을 다 아는 거 같지? 너 말고는 다들 무식해 보이고, 그러니까 뭐든지 가르치고 싶지? 너만 사람이고, 너만 머리 있냐? 응? 씨발 새끼야?”
단유와 한 걸음 간격으로 좁혀졌을 때, 병억은 뒤틀린 심보를 주먹에 실었다. 욕을 하며 시선을 맞추고, 그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을 때, 자신은 눈으로 간격을 맞추고 오른쪽 아래 사선에서 주먹을 그어 올리면 상대는 시야의 사각(死角)에서 올라오는 주먹을 피하지 못한다. 설령 본다 해도 그것은 반사 신경이 작용하기 힘든 시점에서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단유는 그 주먹을 피할 것이다. 아까 본 반사신경이 거짓이 아니라면.
퍽.
‘어?’
단유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지 못한 걸까? 단유는 병억의 오른쪽 주먹에 광대를 비스듬하게 맞았다. 맞은 충격에 얼굴이 살짝 오른쪽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시선은 병억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세게 때릴걸?’
단유가 피하면, 피하는 동작에서 흐트러진 균형을 이용해 팔꿈치로 상대의 목을 밀고 동시에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게 병억의 시나리오였다.
‘왜 못 피했지?’
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후속 동작을 이어나갔다. 쥔 주먹을 펼쳐 단유의 턱을 잡고 다른 손으로 앞섶을 움켜쥔 뒤, 한 걸음 나아가 다리를 안쪽으로 밀어 넣어 넘어지게 하는 동작. 순식간에 이어지지만 숙련된 그 동작에 단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
멍청한 소리가 입에서 날 때쯤, 병억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