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70화 (470/956)

포착(1)

-------------- 470/952 --------------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게 참 묘해.”

하은과 단유는 모처럼 주말을 맞아 밖으로 나섰다. 학원이 쉬는 날이기도 했고, 날이 좋아서 나가고 싶다는 하은의 뜬금없는 충동 때문이기도 했다. 명수는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나가고 없어서 둘만의 외출이었다.

“어떻게 묘해요?”

학원가는 날도 아닌데 단유가 사준 블라우스를 입은 하은은 입고 나온 가죽 재킷을 옆 의자 위에 걸쳐 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축였다.

“고무줄 같다고나 할까?”

“고무줄이요?”

단유는 따뜻한 커피잔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두 손에 품으며 물었다.

“연애라는 게 마치 양 끝에서 고무줄을 잡고 당기는 것 같거든.”

“···그러면 끊어지지 않나요?”

“생각 없이 당기기만 하면 그렇지. 그러니까 적당히 힘 조절을 해서 당기기도 하고 놓기도 하는 거지. 끊어지지 않게.”

“둘 다 놓으면요?”

“그럼 고무줄이 축 늘어져서 바닥에 나뒹굴겠지? 원래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고무줄 같은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그래서 상대를 의식하고 상대의 행동, 말, 표정 등을 관심 있게 보는 법이거든. 바닥에 떨어진 고무줄처럼 서로에게 관심이 떨어지면 언젠가는 잡고 있던 줄도 놓고 말게 되는 거지.”

“둘 다 잡아당기면요?”

“고무줄이라니까? 고무줄을 서로가 양보 없이 잡아당기면 과도하게 긴장감이 커지다가 결국 끊어지고 마는 거지. 적당히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이 없는 연인 관계가 금방 파국을 맞이하는 건 그 때문인 거야. 그래서 사람들과 만날 땐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도 필요한 거고.”

“그렇다면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잡아당기거나 힘을 풀어주는 요령이 필요하겠네요?”

“그렇지. 그게 처세술이고, 연애의 기술인 셈이지.”

뭔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하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잘 알면 선생님은 연애 잘하시겠네요?”

순간 하은은 마치 메두사를 본 양 얼굴을 굳히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거지?”

“선생님이 시작하신 말이잖아요?”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이야.”

“전 선생님이 빨리 실전으로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하은의 입술이 꿈틀거리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고 단유는 느꼈다.

“이제 내가 싫증 나니?”

“그런 위험한 발언은 삼가시는 게 어떨까요?”

“모처럼 선생님이 제자에게 금과옥조와 같은 가르침을 내리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제자는 선생님을 놀려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가슴이 아프다.”

“감히 제자 된 입장에서 선생님을 놀리려고 하겠습니까? 아직 창창하신 선생님께서 다가오는 봄날에는 부디 외롭지 않으시길 바라는 마음이지요.”

“···넌 선생님이 외로워하는 것처럼 보여?”

하은의 진지한 물음에 단유도 표정을 고쳤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외로워할 틈도 없이 바쁘시죠. 그래서 미안하고요.”

시선을 떨어뜨린 단유는 손안에서 커피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저희 때문에 선생님이 너무 희생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선생님도 아직 젊으시잖아요. 비록 제가, 저희가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하긴 하지만, ‘누나’잖아요.”

하은은 어린 두 제자들이 평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래서 단유의 진지한 이야기에 웃을 수가 없었다.

“희생이라.”

단유는 나지막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재훈이 형···이 여전히 저희 보호자로 지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법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그 역할을 대신할 이유가 없는데도 저희를 위해서 함께하시는 거잖아요.”

하은은 말없이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늘 고맙고 또 미안해요. 만약 누나가 안 계신다면 저도, 명수도 이렇게 걱정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가 없었겠죠. 저희가 삐뚤어지지 않게 잘 잡아준 것도 선생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일 테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안 계실 때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아요. 하지만 선생님도 언제까지나 저희랑 함께하실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도 안 될 테고요.”

“왜? 가족처럼 오래 함께할 수도 있지.”

“선생님도 선생님만의 삶이 있으시잖아요.”

하은은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눈에 힘을 주고 창밖을 바라보니, 더러 가벼운 옷을 입은 채로 거리를 거니는 여자들도 보이고, 눈에 띄게 예쁜 가방을 팔에 끼고 다른 팔에는 말쑥한 외모의 남자 친구를 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사이 좋은 부부로 보이는 중년인들도 보이고, 아이들과 함께 거리로 나온 가족도 보였다.

언제였던가, 한번은 현모양처를 꿈꿨고, 한번은 커리어우먼을 꿈꿨다. 귀여운 자식들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놀이공원을 가는 모습을 상상한 적도 있었고, 노처녀로 늙어가도 절대 꿀리지(?) 않으리라 다짐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인테리어에 관심을 두기도 하고, 패션 잡지를 구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두 남자 아이를 데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꿈꾸진 않았었다.

“단유야, 선생님은 한 번도 너희들과 함께 하는 이 생활을 후회한 적이 없어. 외롭다고 느낀 적도 없고.”

단유는 하은의 눈빛이 약간 젖어있었다고 느꼈다.

“그래, 네 말대로 언젠가는 선생님도 선생님만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오히려 너희들과 함께하면서 행복하고. 너희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겁고 좋아.”

차마 단유에게 말은 못 꺼내겠지만, 예전 두 아이를 제대로 보살필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절감하며 떠났던 일이 지금은 가장 부끄러운 선택 중의 하나였다. 비록 학교로 돌아가 이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겠다는 결정 때문이긴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계속 함께했던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로 부족한 걸 채워주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까 선생님 연애 걱정은 접어두고, 네 연애나 걱정해, 이 녀석아.”

“저 헤어졌다니까요?”

“그래서 위로해주려고 데리고 나왔잖니?”

“위로받을 일은 아닌데요.”

“원래 헤어지면 위로해주고 그러는 거야.”

“그럼, 앞으로 저도 선생님 위로해주고 그래야 해요?”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만 알도록 해. 굳이 둘 이상을 알려고 하지 말고.”

“언제는 열을 안다고 칭찬해주시더니?”

“거기까지 하자. 커피도 다 마셨다.”

일어서는 하은에게 단유가 물었다.

“어디 가요?”

“놀러.”

“놀러요?”

“오늘은 내 남자 친구 역할 좀 해라.”

“나이 차이가···.”

“뭐?”

이제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찌릿한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든다.

“아니에요. 이거 갖다 놓고 올게요.”

단유는 쟁반을 들고 카운터 옆 반납대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예전엔 그저 똑똑한 아이였다면, 이젠 따뜻한 친구, 라고도 느껴질 때도 있었다.

‘아이들은 참 빨리도 자라는구나.’

하은은 재킷을 걸치고 안에 입은 블라우스 매무새를 보기 좋게 고쳐 입었다. 처음에는 그냥 집 주변 커피숍에 나와서 수다나 떨다가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놀이공원에나 갈래?”

“놀이공원이요?”

단유가 큰 눈을 끔뻑거리며 묻자, 하은은 웃으며 단유의 목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나가 놀기 딱 좋은 날이다.

****

개학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단유는 다시 출판사를 찾았다.

“며칠 전에 보낸 완역본은 잘 봤다. 수고했어.”

상곤은 단유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넓은 회의실에 오직 두 사람뿐이었지만, 조용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좋았다.

“고맙습니다.”

“교정부에서 보더니 고칠 데가 거의 없다는구나.”

“그런가요?”

“물론 약간의 오타는 있다지만, 그건 고작 오타일 뿐이고 번역 자체는 깔끔하게 잘했다는 평가더구나.”

“감사합니다.”

상곤은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으면 계약을 하는 게 어떻겠니?”

“계약이요?”

단유는 상곤이 건넨 서류를 살폈다.

“지난번에 냈던 번역본 있지? 『욕망의 영토』 말이야.”

“아, 네.”

“원래는 너한테 줬던 것처럼 여러 사람한테 분량을 나눠서 아르바이트를 맡겼는데, 워낙에 네가 잘해 준 덕에 그 완역본을 그대로 쓰기로 했어.”

“그런가요?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몇 가지 전문 단어들의 경우에는 기존에 학계에서 쓰는 단어나 표현이 있어서 고쳐야 했지만, 그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번의 번역본도 그렇고. 그래서 회사에서 결정한 것이 너랑 계약하자는 것이었어.”

상곤은 집에 가서 ‘보호자’랑 상의해서 결정하라고 말했다. 어차피 미성년자라 보호자의 허락이 있어야 하니까, 집에 가서 신중히 결정하되 되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라며 말을 맺었다.

“아, 그리고 번역비는 말이야, 금액이 커서 통장으로 보내기로 했다. 들었지?”

“아, 네.”

“가져오란 서류는 챙겨왔니?”

단유는 가져온 주민등록등본과 통장 사본 한 통을 건넸다.

“지금 처리하면 오늘내일 안으로 두 번역본의 번역비가 입금될 거야. 계약 이전이라서 다른 소속 번역가들의 번역비만큼은 안 되지만 그래도 중학생이 만지기 힘든 큰 금액이야.”

하지만 당장은 별 감흥이 없는 단유였다. 그래서 상곤의 말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번역가도 괜찮은 직업이야. 물론 지금은 번역가로 일하는 사람도, 지망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일종의 레드 오션이기도 하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두 작업물에서 보여준 퀄리티만큼 계속 보여줄 수 있다면 너도 번역가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 전문서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번역도 가능하다면 수입도 나쁘지 않으니까.”

“네, 참고하도록 할게요.”

덤덤한 단유의 대답에 상곤은 아직 어리니까 별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상곤은 단유의 등을 토닥거려주다가 물었다.

“그런데 곧 개학이지?”

“네.”

“그럼 지금처럼 일하기도 쉽지 않은 거 아니니?”

“글쎄요. 점점 익숙해져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계속 번역 일만 하는 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원래 책 한 권을 완역하는데 페이지에 따라 다르긴 해도 보통 2~3개월이 걸리니까, 너에게도 그 기준을 적용한다면 조금 여유롭게 할 수도 있겠지?”

상곤의 말에 단유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음을 깨닫고 단유는 고마움을 표했다.

“와우.”

하은이 단유가 가져온 계약서를 보고 제일 처음 보인 반응이었다.

“무슨 뜻이에요?”

“놀랐다는 뜻이지. 무슨 뜻인 거 같았는데?”

“뭐, 아직 중학생이라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냐는 걱정? 혹은 아르바이트도 아닌 정식 직업이라는 것에 대한 놀람?”

“정식 직업, 이라고 표현하긴 힘들지. 번역가는 기본적으로 프리랜서니까.”

일이 있으면 번역가. 없으면 백수. 그게 현실이다.

“그래서 놀라신 건가요?”

“아니, 그냥 순수하게 놀란 거야. 네 실력이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뿌듯함이 섞인 감탄사야. 이런 것도 설명해야 하는 거니? 우리 사이에?”

단유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자, 하은은 턱을 괴고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단유, 이제 진짜 가장(家長)이 돼가는구나.”

“그 정도까진 아녜요.”

“그래도 아직은 학생이란 거 잊지 않았지?”

“그럼요.”

“자퇴도 안 하기로 했고, 대학교 갈 때까지 꾸준히 학교에 가겠다고 했으니 돈 번다고 공부 안 하면 안 된다?”

“알았어요. 아시잖아요? 저 공부 좋아해요.”

“그래. 단유니까.”

이틀 뒤, 단유가 통장을 들고 와 하은에게 보여줬을 때,

“와우!”

하은이 보인 반응이었다.

“공부 계속할 필요 있니?”

우스갯소리라 생각하며 머쓱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