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69화 (469/956)

유연한 관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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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온 거니?”

나윤은 조심스럽게 묻고 싶었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말에는 어쩐지 가시가 잔뜩 박힌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도 놀라는 와중인데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지 또 슬쩍 웃는 모습을 보였다.

“졸업 축하해드리려고요?”

얘는 왜 계속 웃는 거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정말 단유의 미소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린다.

“···우리 헤어졌잖아.”

“연애를 그만두자는 거지 만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게다가 싸운 것도 아니잖아요.”

“···말장난하지 마.”

그렇지만 단유의 말에 혹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윤은 잠깐 사이에 ‘회사에서도 연애하지 말라고만 했잖아? 그럼 연애는 안 하고 만나면 상관없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버렸다.

“말장난 아니에요. 사실 오늘 어머니께서 먼저 연락을 주시기도 했지만, 저도 오려고 했었어요.”

“헤어졌는데도?”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헤어졌다’는 것의 의미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지면 연락도 하면 안 되는 건가요?”

“······”

나윤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그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진 못했다. 정말 그렇게 말하면 단유에게서 아예 연락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아서였다.

‘핸드폰도 없으면서.’

어차피 연락할 수단이 없는 건 마찬가진데 말이다. 나윤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엄마랑 연락하고 지냈어?”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연락을 먼저 주시긴 했어요.”

그것도 아주 예전의 일이지만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나윤은 만약 어머니가 자리에 계셨다면 왜 전화했냐고 다시 따지고 싶었지만 나윤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지 어머니는 먼저 자리를 피하셨다. 사진도 찍을 만큼 찍었고, 나윤도 곧 회사로 들어가야 하는 마당이니 먼저 돌아가겠다는 핑계였지만, 누가 봐도 단유와 시간을 주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혹시···.’

문득 나윤은 단유와 헤어진 뒤, 방에서 한참을 울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거실에 어머니가 계셨던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 계셨다면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것도 알고 계셨으리라.

“우리 엄마, 우리 헤어진 거 알고 있어?”

단유는 그걸 왜 나한테 묻냐는 눈으로 나윤을 빤히 바라보다,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보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안녕하세요?”

[그래요, 오랜만이네요.]

단유의 기억으로도 한참 전 이긴 했다. 나윤의 어머니로서는 알 수 없는 3개월 이상의 시간이 끼어있기 때문이지만, 그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이 여름의 끝 무렵이었으니 벌써 6개월 전이다.

“네.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내죠. 학생은, 잘 지내요?]

“네.”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죠?]

“아뇨. 괜찮아요.”

이야기가 겉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머뭇거림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단유로서는 딱히 드릴 말도 없거니와 헤어진 여자친구의 어머니와의 대화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세요?”

[아, 다름이 아니고···.]

어머니의 전화는 단유가 나윤의 졸업식에 와줬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괜찮을까요? 누나가 절 보지 않길 원할 텐데요?”

잠시 수화기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건 아닐 거에요.]

어머니는 딸의 변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최근 딸이 심리적으로 불안하다고 느낀 어머니는 그 이유가 단유와 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컴백을 앞두고 신경이 곤두선 탓도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헤어지고 돌아와 펑펑 울던 모습이나, 그 이후에도 가끔 숙소로 찾아갔을 때 우울한 얼굴로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 단유와의 일이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고 여겼다.

어머니라는 입장에서 볼 때, 두 사람의 교제가 그렇게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듯해 보이는 단유가 나쁘지 않아 보여 그동안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고, 딸의 얼굴이 과거 어느 때보다 밝아 보이니 두고 볼 뿐이었던 것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단유에게 전화를 했고, 나윤과의 만남을 직접 주선하게 되었다.

[두 사람 헤어진 건 알아요. 회사에서 그래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하지만 사람 사이가 그렇게 무 자르듯 끊어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사실 말인데, 나윤이 어미로서 조금 이기적일 수 있지만, 학생이 우리 나윤이 좀 위로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요즘 나윤이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도 같은데 다른 사람 말을 잘 안 들으려 하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래도 학생 말이라면 좀 듣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싫어져서 헤어졌다면 저렇게 우울해하지 않았으리라, 는 판단에 어머니는 단유에게 부탁을 했고, 단유는 흔쾌히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회사 가야 하죠?”

“으응.”

단유의 물음에 우물거리듯 대답하던 나윤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빨리 안 가도 돼.”

말을 꺼내고서야 아차, 하는 심정으로 ‘졸업식 끝나고 친구들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라고 뒤늦은 핑계를 대는 나윤. 그녀에게 단유가 식사 같이하겠냐고 물었다.

“점심 드셔야죠.”

“아, 그런데 나 요즘 다이어트해서···.”

“아, 그래요?”

“그, 저기 그냥 간단하게 뭐 먹자. 아니 넌 밥 먹어야 할 거 아냐? 난 조금만 먹으면 되니까, 가서 먹자. 저기, 이 근처에 분식집 맛있는 데 있거든? 거기 갈래?”

“네.”

두서없는 나윤의 모습을 보며 마치 헤어지기 전의 나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사실 헤어졌다고 해야 이제 고작 한 달을 겨우 넘겼을 뿐이니,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반면 나윤은 너무 오랜만에 단유를 보는 기분이었다.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반년을 못 보고 살다가 만난 것 같았다. 그래서 반갑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이 이후에는 정말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기예요?”

“으응.”

분식집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하긴 방학 때인 데다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집이니 이맘때 문을 열지 않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윤은 괜히 투덜거리며 닫혀 있는 셔터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여기 자주 왔어요?”

“응? 어, 가끔.”

사실은 자주 오지 못했다. 1, 2학년 때나 가끔 와서 먹긴 했어도, 연습 때문에 조퇴하고 회사로 향했던 나윤이 학교 앞 분식집에 자주 갈 리 만무했다. 그나마 학교 앞에서 나윤이 아는 집이 이곳뿐이라 온 것일 따름이었다.

“다른 곳 찾아보죠.”

“그래.”

이미 졸업생들도 많이 빠진 틈이라 올 때와 달리 한산해진 학교 앞 거리였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사이에는 애매한 간격이 존재했다. 그 공간의 애매모호함이 나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예전 일이 생각나네요.”

“응?”

“예전에, 누나랑 사귀기 전에요. 누나가 워낙에 말이 없어서, 제가 말을 많이 하게 된다고 했었잖아요? 지금 또 그런 것 같아서요.”

“······.”

“이런 누나가 그렇게 말이 많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내가 말이 많다고?”

“누나가 워낙 말이 많아서 제가 입을 열 틈이 없었던 거 몰라요?”

“내가, 그랬어?”

그랬을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딱히 그랬나 싶다. 지금 생각나는 건 단유와 만나는 동안 단유의 얼굴을 보며 웃느라 정신없던 기억밖에 없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 헤어진 지 되게 오래된 사람들처럼 느껴지네요.”

“······.”

거리를 한참을 걸어도 들어갈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문을 닫았거나 혹은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식당들뿐이었다.

“아무래도 누나는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운명인가 봐요.”

단유 나름의 우스갯소리였지만, 나윤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디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단유가 그냥 가겠다고 할 것만 같았다.

“저기···.”

“누나.”

“···응?”

“아무래도 오늘은 같이 식사하기가 힘들겠네요. 이래서야 나중에 회사에 늦게 들어왔다고 혼나겠어요.”

나윤은 손을 내저으면 아니라고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또 입이 틀어 막힌다. 손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나윤은 가만히 단유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는 버스 타고 가나요? 아니면 지하철?”

“···지하철.”

“아, 그러면 지하철역까지 같이 가요. 거기까지 배웅해드릴게요.”

이 쿨한 남자는 끝까지 쿨하게 보내주려는 모양이다. 아주 잠깐, 졸업식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서 온 걸까, 라는 희망을 가졌는데, 끝까지 쿨하다. 시크하다? 도도하다? 아주 그냥 얄미워 죽겠다. 그런 마음이 또 나윤의 입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막는다.

“같이 연습하는 멤버는 어때요? 좋아요?”

관심이나 있니? 괜히 신경질이 난다. 관심 있으면 소개해 줘?

말없이 앞만 보고 걷는 나윤의 눈치를 흘깃 본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많이 힘든가보다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눈치 없이 괜한 걸 묻는다고 트집잡힐 것 같아서였다.

또 그렇게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이었다. 나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또 이렇게 헤어지고 마는 건가 싶어 답답하고 억울했다.

“누나.”

정신 차리고 보니, 단유가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돌아보는 나윤에게 단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진짜 마지막, 일지도 모르겠네요.”

“···마지막이니?”

진짜 마지막이야? 다시는 얼굴 안 보일 거야? 라고 묻는 것처럼도 들리고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라고 애원하는 것처럼도 들린다. 단유는 옅게 웃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생각해보니까 누나한테 선물 하나 해준 게 없더라고요. 기껏해야 들에서 꺾은 꽃이나 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아직도 그 꽃이 방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이 아이는 알까?

“그래도 마지막인데,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선물을 주고 싶어요.”

“헤어지는데 선물 주는 건 무슨 심보니?”

아까부터 마음과 반대로 말이 나온다. 나윤은 자신이 미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좋은지 단유는 히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사실 이것도 제대로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성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줘요.”

나윤이 머뭇거리다 손을 내밀어 단유의 선물을 받았다.

“목걸이?”

은색 줄에 아주 작은, 새끼손톱만 한 펜던트가 걸려 있는데, 펜던트의 가운데 하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다이아몬드?”

···일리는 없지만, 마치 그런 보석처럼 보인다.

“은목걸이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있다던데, 혹시 안 맞으면 다른 거로 바꿔서 쓰세요. 금목걸이는 좀 비싸서 제 능력으로는 어렵더라고요.”

“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래?”

“그래도 이 정도는 살 수 있더라고요. 별로 안 비싸서.”

물론 ‘목걸이’만의 이야기였다. 보석이 박힌 펜던트는 제외한. 나윤은 영롱한 빛깔의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보석 안에 다양한 빛깔들이 면을 따라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 말로만 듣던 다이아몬드를 실제로 보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지. 비싸지 않다고 말하는 걸 보면.

아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순간 보석에 눈이 돌아간 자신을 탓하며 나윤이 다시 목걸이를 내밀었다.

“받을 수 없어. 우리 헤어졌잖아? 다시 시작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런 선물 부담스러워서 못 받아.”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모를까.

“그냥 받아요. 그동안 누나한테 해준 것도 없이 받기만 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 저도 미련 없이 누나를 보낼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미련?”

그렇다면 더더욱···.

“갈게요.”

단유는 손을 흔들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야, 단유야!”

단유는 곧 지하철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금세 모습이 사라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목걸이를 손에 쥔 채로 나윤은 그곳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쁜 놈.”

목에 걸어나 주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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