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68화 (468/956)

유연한 관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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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는 교정이 끝난 후에 받기로 했다. 일단 완역본을 검토해 본 후 쓸만하다 싶으면 쓰되 무리가 있다면 애초 분량만 쓰겠다고 상곤이 말하자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괜찮아요, 전.”

애초부터 약속된 일이 아니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처음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인지라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완역은 그저 경험치로 돌려도 무방하리라. 대신, 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단유는 팀장에게 해당 원서를 선물로 받았다. 덩달아 다른 일감도 받았고.

“일을 또 받았니? 거봐. 선생님이 말했잖니? 그렇게 하면 인상을 강하게 남길 수 있다니까.”

하은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는데, 그게 참,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게 했다.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하은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책 완역 인정되면 돈 많이 받을 텐데.”

“그래요?”

“그런 말 안 하든?”

하지는 않았지만, 단순 계산으로도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받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분량 배정 시에 약속한 금액은 A4 1장당 5천 원이었다. 완역본의 페이지 수가 대략 300장을 넘어가기 때문에 그 금액만 따져도 150만 원 이상이다.

“에이, 그것보단 많아야지. 원래 전문 서적 번역은 페이가 센 데.”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다. 당장 급한 것은 새로 받은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이번에 받은 책도 역시 사회 과학 분야 서적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덜 전문적인 대신 완역을 하기로 했다.

“얼만데, 그건?”

아무래도 하은이 옆에 있으면 편하게 책을 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단유는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냐니깐?”

****

한 달을 꼬박 집에만 틀어박혀 책을 읽고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더니 어느새 2월이 찾아왔다. 명수에게 한 달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면 앓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겠지만, 단유에겐 너무나 편하고 익숙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 시간이 휴식과도 같아 즐거웠다.

비록 숫자를 좋아하고 계산하는 게 재밌다고 해도, 늘 같은 것만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무리가 없다 해도, 다른 분야의 지식을 경험하는 것은 휴가나 다름없어 머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단유가 외출준비를 하자 호빵이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는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 좀 나갔다 올게.”

단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낮은 콧소리로 킁 하고 대답하는 호빵이었다. 명수는 축구부 선배 졸업식 때문에 학교엘 갔고, 하은은 언제나와 같이 학원으로 출근한 상황이라 집에는 단유와 호빵뿐이었다.

“너도 혼자 있는 게 힘들 거야. 그렇지?”

“킁.”

“내가 돈 벌면, 네 친구부터 구해야겠어. 외롭지 않게.”

호빵은 단유의 발밑에 다가와 짧은 다리를 들어 툭툭 건드렸다. 호빵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단유는 집을 나섰다.

번역 회사에 다녀온 후, 일주일 만에 외출하는 단유였다. 번역을 모두 마친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이미 인터넷으로 가는 길을 파악해뒀기에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 거리가 좀 떨어진 곳이라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2월이라도 겨울인 것은 마찬가지니 여간 추운 게 아니었지만, 1월의 맹추위를 떠올리면 확실히 날이 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다가도 갑자기 폭설이 내리기도 하기에 날씨의 변덕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도 했었다.

그나마 컴퓨터와 최첨단 기술의 영향으로 점점 예보의 정확도가 올라간다고 하니 언젠가는 날씨의 변덕도 사람이 극복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긴 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사람들이 붐비더니, 골목을 따라 올라갈수록 통행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인파로 가득 찬 골목의 한가운데서도 굳이 자동차를 끌고 가겠다며 들어가는 몰상식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골목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들고 있는 게 있었으니, 바로 꽃이었다.

사실 단유가 향하는 곳은 한 고등학교의 졸업식이었다. 그리고 그 졸업식에서 단유가 만나려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윤이었다.

****

“아이고, 너 찾느라 혼이 났어.”

“왜 왔어, 엄마. 그냥 졸업장만 받고 그냥 갈 거라니까.”

“네 졸업식이 이게 마지막일 텐데 이거라도 안 오면 섭섭해서 어쩌니?”

어머니의 뼈있는 말에 나윤은 어머니를 흘겨보며 대꾸했다.

“은근히 디스한다, 엄마?”

“그럼 대학 갈 거니?”

“왜 또 그래? 그 이야기 끝났잖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엄마 일부러 나 흉보려고 온 거야? 그럴 거면 그냥 돌아가.”

딸의 매몰찬 반응에 어머니는 딸의 엉덩이를 때리며 말했다.

“넌 엄마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러는 엄마는?”

그러다 문득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나윤은 급히 목소릴 낮추고 속삭였다.

“됐어, 그만해. 딴 사람들 쳐다보잖아.”

“큰 소리는 네가 쳤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라는 어머니의 능청에 나윤은 화도 내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 참!”

그때 마침 지나가던 나윤의 친구가 다가왔다.

“나윤아?”

“어, 혜정아. 엄마, 여긴 내 친구 혜정이.”

“안녕하세요?”

“어, 그래 반갑다.”

“혜정이도 나랑 같은 지망생.”

‘연습생’이란 표현 대신 ‘지망생’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기약 없는 데뷔를 꿈꾸는 처지다. 다만 나윤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데면데면한 정도? 오히려 먼저 데뷔를 한 나윤을 조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혜정이었고, 숫기 없는 나윤보다는 조금 더 활발한 성격이어서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건 대부분 혜정이었다.

“반은 다른데 같은 쪽 일을 하고 있어서 친해졌어.”

“그러니? 너도 고생이 많겠구나.”

주로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항상 연습과 데뷔에 관한 이야기뿐이지만, 그조차도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회사에 소속된 마당에, 각자의 회사 험담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결국 ‘넌 레슨 얼마나 받니?’나 ‘요즘 무슨 노래로 연습하니?’ 정도의 대화만 오갈 뿐이었다.

그런 대화가 나윤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혜정은 나윤과 그런 대화를 하면서 ‘너도 아직은 연습생이잖아’라고 확인하려 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근 ‘컴백’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불필요한 말로 서로의 차이를 느끼게 만들 이유가 없다.

그래도 어머니 앞에서 싫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혜정이라도 말을 붙여주지 않는다면 반 친구들 중 누가 나윤에게 살갑게 다가와 말을 걸어줄까 염려도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교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얼쩡대고 있었던 것이고. 교실에는 나중에 담임 선생님이 졸업장을 나눠줄 때나 들어갈 생각이었다.

“졸업 축하해.”

“너도.”

“나중에 무대에서 만나자.”

“그래.”

혜정은 어머니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뒤, 예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착한 애구나.”

“착하긴.”

나윤의 대꾸에 이번엔 어머니가 딸을 흘겨보았다.

“넌 친구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그런 게 있어.”

나윤은 괜히 머쓱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 경계하는 눈이었다.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옮길 텐데, 그 사정을 또 어머니에게 구구절절 이야기하기가 귀찮아서 그저 주위만 살피는 나윤이었다.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어머니는 나윤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요즘 나윤이 많이 신경질적이어서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컴백을 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나윤은 곧 회사에서 마련한 예전의 숙소로 짐을 옮기면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회사에서도 기존의 정책을 바꿔 휴대폰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어서 통화도 힘들었다. 그래서 딸을 보려면 직접 숙소로 찾아가야 하는데, 어머니도 평소에 일을 해야 하는 처지라 주말에나 반찬 몇 가지를 싸서 가야 잠깐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요즘 딸이 심상치 않았다. 유난히 신경질이 심해서 살짝 미운 마음도 들 정도였다. 그런데 계속 신경질만 부리고 있는 거라면 한소리라도 할 텐데, 어떨 때는 안타까울 정도로 우울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어 어머니의 마음은 타들어 가기만 했다.

“그런데 넌 왜 강당에 안 있고 여기 있어?”

“됐어. 조금 있다가 교실 가서 졸업장만 받고 돌아갈 거야. 오늘도 연습해야 한단 말이야.”

어머니의 시선을 피한 채로 말을 잇던 딸은 곧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끝났나 봐.”

강당에서 몰려나오는 학생들을 보며 어머니는 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나윤의 걱정과 달리, 교실에 들어서니 많은 친구가 아는 척을 하며 말을 건넸다. 평소 함께 하는 시간이 적은 데다, 3학년이 될 무렵부터 ‘연예인’이라는 거리감이 들었는지 아이들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졸업식이라 그런지 같이 사진 찍자며 넉살 좋게 다가오는 친구들이 있어 나윤은 한결 편하게 교실에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졸업장을 나눠준 후 학생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나누다 졸업식이 완전히 끝이 났다.

운동장에는 일찍 끝내고 나온 학생들이 친구, 가족들과 함께 모여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나윤아, 우리도 사진 찍어야지?”

나윤은 싫은 눈치를 보이려다 참았다. 본인도 사진 정도는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이거 누구한테 찍어 달라고 하지?”

“그냥 우리끼리 찍어.”

“에이 그러면 자세가 안 나오잖니?”

“그냥 찍어.”

하지만 어머니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부탁할 사람을 계속 찾았다. 하지만 다들 바쁜 와중이라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보일 리 없었다. 나윤은 이마를 찌푸리며 어머니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으려 했다.

“아, 저기 있네.”

나윤이 뻗던 손을 멈추고 어머니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윤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에 뵙네요.”

어머니가 단유와 인사를 하는데, 나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주변의 학생들이 단유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누구지?’ ‘남자 친구야?’라고 숙덕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는 데 힘들지 않았니?”

“워낙 여기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길 잃을 염려는 없겠던데요?”

“어머, 그랬어?”

어머니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와의 대화가 대충 마무리되자 그제야 나윤에게로 시선을 옮긴 단유가 예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죠?”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흐르자, 어머니가 대뜸 단유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줬다.

“우리 사진 찍으려고 했는데, 손이 모자라서.”

“아, 제가 찍어 드릴게요. 두 사람 서보세요.”

단유가 사람들을 피해 두어 걸음 물러섰다.

“두 분 서보세요.”

어머니가 나윤의 팔짱을 끼고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웃으시고요.”

단유는 핸드폰의 액정을 바라보며 찍을 타이밍을 기다리다 다시 말했다.

“누나, 웃어요.”

하지만 나윤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화가 난 것인지, 당황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든 묘한 표정이었다.

“나윤아.”

어머니가 나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쳐도 표정이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괜한 짓을 했나, 싶은데 나윤이 물었다.

“엄마가 불렀어?”

“응.”

나윤은 입술을 꼭 다물고 단유를 응시했다. 단유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꾸밈이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웃어요. 예쁘게 찍어야죠.”

날씨의 변덕만큼이나 사람의 마음도 변덕이 심하다. 지금 나윤의 마음속에서 오갔던 그 수많은 감정의 변화들을 짚어보자면, ‘변덕’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다. 웃으라고?

“자, 찍어요. 하나, 둘, 셋!”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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