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67화 (467/956)

유연한 관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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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명수야, 선생님도 물 한 잔만 줄래?”

“네.”

명수는 냉장고에 도로 넣으려던 물통을 다시 꺼내어 깨끗한 잔에 담아 하은에게 건넸다.

타닥타닥.

“선생님, 다른 거 돌려봐도 돼요?”

“그래.”

명수는 하은이 건넨 리모컨을 받아 채널을 변경했다. 뭔가 속이 뻥 뚫릴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있으면 보고 싶은데, 어딜 돌려도 딱히 시선을 끄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탁. 탁, 타닥.

하은의 미간이 좁혀지며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탁, 탁.

명수는 뒤통수를 누가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고 싶은데, 돌아보면 답답해서 미칠지도 모른다.

탁. 탁.

“단유야.”

결국, 참지 못한 하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예?”

소파 뒤, 거실의 한쪽 벽에 처박혀 있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던 단유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키보드에 꽂혀 있었다.

“그냥 선생님이 대신 쳐주면 안 될까?”

“괜찮아요, 선생님. 제가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겠지. 할 수 있는데, 어느 세월에 다할까 걱정이 돼서 말이야.”

“천천히 하면 되죠. 하다 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하은은 한숨을 내쉬며 명수를 보았다.

“너도 저 정도니?”

“아뇨. 전 잘해요. 게임할 때 채팅하려면 빨리 쳐야 하는 걸요.”

“···단유도 게임을 강제로 시켰어야 했나? 아니, 요즘 아이들은 다 컴퓨터 잘하는 거 아니니?”

“단유 같은 경우가 흔하진 않겠죠.”

하은과 명수의 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유는 키보드를 보며 독수리타법으로 글자를 입력하는 데 집중했다.

“단유가 못하는 게 또 하나 있었구나.”

“···저 못하는 거 많다니까요?”

사람들은 다들 단유가 뭐든지 잘할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단유 본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없었고.

컴퓨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주로 마우스로 클릭을 하거나 아이디를 쓰는 정도의 타이핑 외에는 키보드를 쓸 일이 별로 없었던 단유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들으니까,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안 듣는 아이들이 없다며?”

“맞아요! 우리 반 애들도 대부분 인터넷 강의를 듣더라고요.”

“그런데 넌 왜 안 들어?”

“네?”

하은의 되물음에 말문이 막힌 명수는 우물쭈물대며 시선을 TV로 돌렸다.

“너도 인터넷 강의를 좀 들으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니?”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전혀 도움 안 돼요.”

“왜?”

“그것도 꾸준히 듣는 사람들이나 그렇죠.”

“넌 꾸준히 들을 생각이 없어?”

“전 축구 연습도 해야 하고, 바쁘죠.”

“축구 연습하는 거 말고는 바쁠 일 없잖아?”

“···그리고 인터넷 강의보다 단유가 더 잘 가르쳐주는데, 강의 안 들어도 돼요.”

“단유가 무슨 만능 사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시험 때는 만능 이상이죠. 솔직히 인강도 시험 잘 보려고 보는 건데, 단유 같이 족집게처럼 집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굳이 비싼 돈 들여서 볼 필요가 없죠.”

“얼마 정도 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한 달에 20만원 정도 한다든가? 저도 그냥 들은 이야기라서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전 들을 필요 없어요.”

“마치 공부는 아예 손을 놨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뇨, 절대. 단유랑 시험공부는 꼬박꼬박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이번에 기말시험에서도 저 22등 했어요.”

“···네가 그런 점수 얻는 거 보면, 정말 단유가 사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왜 또 단유로 넘어가요? 저도 나름 열심히 했어요!”

“퍽이나 했겠다.···단유야, 그냥 내가 해 줄게.”

탁, 타닥.

“···괜찮아요, 선생님. 저도 빨리 익숙해지려면 혼자 연습해야죠.”

하은은 등이 굽은 단유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단유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걸 보고 있으면 답답해져서 숨을 쉬기가 어려워질 정도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저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래도 사람은 적응을 한다. 100페이지 이상을 두드렸더니 그 답답했던 타이핑도 점차 실력이 늘어서, 이제 하은은 답답증을 호소하며 물을 마시는 일이 줄었고, 힐끗힐끗 쳐다보며 눈치 주던 명수도 TV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쯤에야 단유는 아르바이트 삼아 맡았던 책의 번역을 끝냈다. 사실 초반 단유의 타자가 워낙 느렸기에 티가 나지 않았지만, 단유의 번역은 거의 실시간으로, 아니 그냥 한글로 된 글을 그대로 옮겨쓰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빨랐다.

하지만 번역 회사의 중년인, 한 달 정도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같은 체크 남방을 입고 있어 그 패션 센스가 의심스러운 유상곤 팀장은 단유의 방문에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초에 단유에게 맡긴 번역은 책의 앞부분, 대략 50페이지가량의 번역이었기 때문이었다. 50페이지를 번역하는데 한 달이면 ‘중학생’치곤 느리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일반 번역도 아닌 전문 번역 분야였기에 시간을 지켜 가져온 것만으로도 칭찬할 만했다.

“이메일로 보내도 된다니까.”

상곤은 단유가 건넨 파일을 받으며 말했다.

“저희 선생님이 이런 건 직접 가서 주는 게 좋다고 하셔서요.”

“선생님?”

“아, 같이 사는 누나예요. 저희 ‘보호자’ 되세요.”

익히 아는 단어들이 생소하게 쓰인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고아’라고 소개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물음을 삼키는 상곤이었다.

하은은 단유에게 꼭 종이에 뽑아서 가라고 일렀다.

“첫인상이 중요하거든. 번역을 잘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인상을 남겨야 다음에도 또 너한테 일을 맡길 거야.”

이게 세상 사는 법이지, 라며 으쓱대던 하은의 말을 따라 한 단유는 다행히 효과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종이를 넘기며 살피는 상곤의 얼굴에도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기에.

“잘했네.”

대충 읽어봐도 문장과 문단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데다가 소위 ‘번역체’라고 부르는 어색함이 없어서 좋았다. 자세한 건 역시 교정을 보면서 살펴야 하겠지만, 이 정도라면 초벌로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일을 대충 갈무리하여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느긋한 표정으로 상곤이 입을 뗐다.

“수고 많았어. 많이 어려웠니?”

“아뇨, 책이 재미있어서 즐겁게 했어요.”

전문 서적이 재미있다니, 이 아이도 참 별종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고?”

“저, 그게요.”

소년이 말을 쉽게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너무 어려워서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사실 번역이라는 게 무슨 시험 치르듯 혼자 해야 한다는 법도 없는지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든 상관이 없다. 기간 내에 지정된 분량을 번역해 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단유의 망설임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이걸 내놓는 거야.”

하은이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며 말했다. 눈에 깃든 장난기만 보면,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라는 말이 설득력을 잃는다.

“그럼 깜짝 놀란 얼굴로 널 다시 보게 될걸? 그게 바로 도장 찍는 일인 거야. 이렇게 임팩트를 줘야, 널 어리다고 얕보지도 않고 앞으로도 일을 맡긴다 이거지.”

마치 명수의 어릴 때 모습처럼, 악동같이 히죽거리며 단유의 호주머니에 USB 메모리를 집어넣는 하은이었다. 그런 모습이 신뢰감을 대폭 하락시킨다는 사실을 모를까? 아마 지금쯤 소파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하은의 전략은 성공할까? 아니면 그저 단유를 난처하게 만들 뿐일까? 단유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호주머니에서 그 USB 메모리를 꺼내 들었다.

“뭐니, 그게?”

“이거, 저기 그 책 번역한 건데요.”

단유는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책?”

상곤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이해했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찰싹 때렸다.

“아, 파일로. 그렇지. 나도 종이로 받아들곤 깜박했네. 어차피 교정보려면 파일이 필요하니까.”

그러면서 단유의 손에 든 USB를 받아들었다.

“앞으로는 메일로 줘도 돼. 굳이 이렇게, 아 이거 필요하지? 복사만 하고 돌려줄게.”

상곤은 얼른 일어나서 컴퓨터에 USB에 꽂았다. 파일을 복사하기 위해 폴더를 열고 복사를 하려는데, 이상하다.

‘이게 용량이 왜 이렇지?’

1메가 정도의 용량을 생각하다가 5메가가 넘는 용량의 파일에 의아함을 느낀 상곤이 파일을 열어보았다. 긴 스크롤, 그리고 아래쪽에 매겨진 페이지 수.

“뭐지?”

“저기, 그게 책 전부를 번역하긴 했는데요. 혹시 몰라서요.”

몰라서라기보다는 하은의 꾀가 담긴 책략이었다.

단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온종일 독수리 부리처럼 손가락 끝을 세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리고 5일이 지난 즈음에 배정받은 분량을 번역해내자, 감탄한 하은이 반쯤은 장난으로 단유에게 제안했다.

“타이핑 연습도 할 겸, 뒤의 분량도 번역해 봐봐.”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단유의 타이핑이 빨라졌을 때, 책의 반이 번역되었다.

“점점 빨라지네? 계속해 볼래?”

어차피 글을 번역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었고, 타이핑이 늘어나는 것이 체감되기도 해서 단유는 계속 번역을 이어나갔다. 타이핑이 리드미컬 해지다가 다시 2주가 지날 무렵, 책을 완전히 번역하기에 이르렀고, 단유의 타이핑은 평균 400타 정도에 이르렀다.

“와, 이건 한 달 만에 번역하다니. 실화냐?”

“···무슨 뜻이에요?”

“아, 우리 반 애들이 가끔 이런 말 쓰길래 해봤어. 너희 또래 애들이 많이 쓰는 말 아니니?”

“······.”

아무튼 그런 이유로 책을 완전히 번역하자 하은이 꾀를 냈다. 본래 배정받은 분량은 종이로 출력해서 제출하고, 이후에 USB를 건네서 담당자를 깜짝 놀라게 하라. 도대체 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단유의 물음에, 하은은 ‘잘 되면 좋은 거지’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일단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성공한 것 같았다. 눈이 작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크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이걸, 정말 한 달 만에 했다고?”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전문적인 단어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대충 인터넷에서 유사 단어를 찾아서 바꾸긴 했는데, 그게 학계에서 정식으로 쓰이는 용어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건 1, 2차 교정단계에서 고치면 되니까 문제는 없다. 문제는 이 분량을 한 달 만에 해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 책은 현재, 분량을 잘게 쪼개서 여러 사람에게 맡긴 상황이었다. 그리고 단유는 그중의 한 명일 뿐이고. 그런데 그 한 명이, 아르바이트를 맡은 이들 중 가장 어린, 고작 중학생인 그 한 명이 책은 완역(完譯)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도 한 달 만에?

어쩐지 번역 시험 1급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번역 1급들은 다 이 정도인 걸까?’

나중에 자신이 아는 번역가들에게 물어봐야겠다. 세상이 빨리 변한다더니, 이런 데서도 변화의 조짐이 느껴진다.

****

“다녀왔습니다.”

“왔어?”

소파에 누워 있던 하은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어땠니? 깜짝 놀래지?”

“네.”

당연하지. 솔직히 자신도 많이 놀라지 않았던가. 나름 단유를 알고 지낸 본인도 그 어마어마한 속도와 실력에 놀랐는데, 단유를 고작 ‘중학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사람이라면 놀라서 자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아니, 잠깐.

“혹시 뒤로 넘어지진 않았고?”

단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은을 쳐다보다 대꾸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야, 갑자기 왜 방으로 들어가니?”

“옷 갈아입고 씻어야죠.”

“대답해주고 씻어! 야! 단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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