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66화 (466/956)

유연한 관계?(3)

-------------- 466/952 --------------

“김단유 학생?”

“네.”

“여기 보니까, 중학생인데···맞아요?”

“네.”

말을 잇지 못하던 체크 남방의 중년 사내가 다듬지 않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해외에서 유학했어요?”

“아니요.”

“그럼 외국에서 태어났다거나 부모님이 외교관? 아니면 부모님이 외국분?”

“고아예요. 7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생활했고요.”

“아, 그렇군요. 너무 민감한 질문을 했었던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뭐···머리가 굉장히 좋은가 봐요? 외국에서 나가 살던 곳도 아니고 국내에서 공부만 해서 번역 자격증, 그것도 1급으로 따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열심히 하긴 했습니다.”

사내는 검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맞은 편의 단유를 슬쩍 보았다. 이력서를 봐서 그런지 몰라도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소년, 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지금 방학이겠네요?”

“네.”

“그래서 아르바이트 삼아? 그러면 저희 쪽보다 덜 전문적인 쪽을 찾아가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가령 해외 전자 제품 설명서를 번역하는 일 같은 것도 있는데, 그게 학생이 하기에 편할지 몰라요.”

번역이란 게 단순히 외국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특히 사내가 있는 곳은 해외 전문 서적들의 판권을 사서 국내로 가져오는 출판사들이 외주를 주는 번역 회사였다. 당연히 소속 번역가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가끔 시간 싸움이 되는 경우가 있어서 아르바이트를 동원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부분도 있을 거예요. 지금 저희가 맡은 프로젝트는 영국의 저명한 학자분이 저술한 사회과학 분야 서적이에요. 중학생이 배우는 레벨을 넘어선 부분이 있어서 학생이 이해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관련 지식이 없으면 번역을 해도 오류가 생기곤 하니까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과학’이라는 익숙지 않은 단어도 그렇지만 중학생 단유의 끄덕임을 본 사내는 소년이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이력서를 덮으려 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그 원본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냥 호기심이 들어서요. 어느 정도의 전문성이 필요한지도 알고 싶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공부해서 다른 일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사내는 멀뚱히 소년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저 나이의 아이들이 용감하긴 하다.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어른을 무서워할 줄 알게 되고 윗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을 피하기 마련인데, 아직 어리다 보니 저렇게 자기 요구도 당당히 할 수 있는 것일 테다.

‘순수하니까.’

사내는 소년의 요구를 ‘순수’로 받아들였고, 그 순수한 호기심에 잠깐 어울려 줄 마음을 먹었다. 책상에서 테스트를 보기 위해 가져왔던 책을 집었다.

“이건데 볼래요?”

단유가 보니 여간 두꺼운 책이 아니다. 못해도 500페이지는 넘을 것 같다. 실제로도 책에 찍힌 페이지가 530여 페이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단유는 가장 앞에 적힌 머리말을 읽어나갔다.

“현대사인가 보네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간단하니까 중학생이라도, 번역 1급이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엔 저자가 책에 소개하려는 내용과 취지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니 어려운 단어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그 정도로 영어 실력을 뽐내려 한들 사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엔 부족하리라. 물론 단유가 그런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단유는 그 자리에서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책을 살폈다. 아니, 정독했다. 다만 너무 빨리 읽는 터라 지켜보던 사내는 소년이 자신이 아는 단어만 찾아보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상황이었을 뿐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지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해석하기 힘든 책이라는 걸 실감하는 중이라 그럴 것으로 추측했다.

일정한 속도로 넘어가는 페이지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으니 사내는 적당한 시점에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충 한 챕터를 넘긴 것 같아 보여 입을 열었다.

“그쯤 보니까, 대충 알겠지?”

본인이 번역하기엔 어렵다는 사실을.

“네. 대충은요.”

대충?

“그런데 재밌는데요? 왜 세계 각국의 나라들이 영토에 집착하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학자의 시선이 꽤 흥미롭고요.”

“응?”

중학생 소년이 작가의 글을 ‘흥미롭다’고 평가해?

“21세기에도 지구의 영토 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탐식의 욕망을 드러내는 강대국 간의 내밀한 거래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데요? 정말 이런 거래들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다 읽었어?”

아는 단어나 문장을 찾는 게 아니라 ‘글’을 읽었다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여기 보니까 미국이 강대국이 된 사연에는 그저 강한 국방력만이 아니라 강대국들과의 은밀한 거래를 주도했던 외교력이 밑받침되었다고 나오잖아요? 흡사 음모론처럼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최근 해금된 CIA 기밀문서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것도 출판이 가능한 거예요? 전에 뉴스 보니까 국내 기밀문서는 밀반출이 금지되어 있고 출판도 할 수 없다고 들은 거 같은데? 외국은 좀 다른가 봐요.”

단유는 사내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계속 책의 내용을 뒤적거렸다. 사회과학이란 분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막상 이 책을 읽으니 없던 관심도 생길 판이었다. 글을 쓴 학자가 워낙에 첫 시작을 흥미롭게 이끌어나간 덕분이었다.

단유는 멍한 시선으로 마주 보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 책, 그냥 빌려 가면 안 되죠? 사야 하나요?”

사내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정말 다 읽은 거니?”

“아뇨, 다 못 읽었죠. 앞에만 읽는 거 보셨잖아요?”

“아니 내 말은, 그 내용들을 다 이해한 거냐는 뜻이었어.”

“아, 네. 그다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없던데요? 물론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그런데 확실히 재미있는데요? 이런 책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볼 거 같은데요? 이게 베스트셀러란 건가요?”

그게 정말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한국에서 비소설 분야, 특히 사회과학 분야의 번역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쉽지만···아니 그게 아니지.’

사내는 잠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소년에게 물었다. 아니 요구했다.

“그럼 뒤에도 한 번 읽어볼래? 그리고, 읽은 내용을 설명해 보겠니?”

“읽어도 돼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선생님!”

단유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은을 찾았다가, 이마를 쳤다.

“아, 학원 가셨지.”

단유가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려 한 이유는, 그 회사를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하은이었기 때문이다. 명수의 일로 이야기를 나눈 뒤, ‘새해 목표’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단유가 아르바이트로 ‘번역 알바’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문 선배가 그쪽 일 하던데 한 번 알아봐 줄까?”

단유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생각난 김에 새해 안부 인사나 해 볼까’라며 전화를 든 하은은 그 선배를 통해 어떤 번역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단유의 이력서를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단유는 책을 들고 방에 들어가려다 거실 소파에 밀려드는 햇살에 눈이 닿았다. 어쩐지 오늘은 저기에서 책을 읽고 싶어졌다. 일 때문에 받아온 책이긴 해도, 흥미를 돋우던 책이니 공부하듯 읽고 싶지 않았다. 하은처럼 드러눕진 않아도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대고 햇살을 받으며 편한 마음으로 독서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이것도 사춘기라서 그런가?’

하은은 단유와 명수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 마치 사춘기에 닿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과하다 싶었지만, 또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하은의 이야기여서 단유도 혹하는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엔 자신이 보낸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던가. 남들은 모르는 수년의 세월이 단유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시간만으로 따지면 단유는 하은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으리라.

‘물론 내가 반쪽일 때의 이야기니까.’

단유가 루치드와 하나가 된 사건은 사실 의미가 크다. 그 전까지는 단유의 정신과 육체의 성장이 불균형적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몸도 빨리 자라고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만큼 똑똑하니 성장이 빠르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사실 단유 본인이 느끼기에 자신의 정신은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가 성장하듯 자란다. 혹자는 ‘진화’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아이에서 어른으로,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자라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성장과 함께 여러 경험과 지식을 습득하고 다양한 사고와 감정들을 받아들이며 그 폭을 넓혀가는 것을 정신의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유는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 정신의 성장을 나누어보았다. 그 폭이 넓어지는 과정을 따라 단계를 나누자면, 크게는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처음은 ‘이기적’인 단계, 자신만을 생각하는 단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통은 어린아이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에 대해 많은 선현(先賢)들이 언급한 바가 있다. 인지의 범위가 좁은 탓에 ‘관계’보다 ‘자기’에 충실해지려는 동물적 본능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단유는 자신이 처음 지구로 왔을 때, 그리고 명수라는 친구가 생긴 이후에도 이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는, 입버릇처럼,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시기이기도 했으니까. 설령 단유가 누군가를 위해 행동하더라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굳이 비유하면, 가끔 어린 영아들이 손에 쥔 먹을 것을 자기 입에 넣는 대신 타인에게 건네는 정도의 행동 양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단유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식과 경험이 더해지면 인지의 범위가 넓어지며 ‘관계’를 모색하게 되는데, 이때가 ‘개인’을 자각하는 시기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고 각각의 다름을 인지하는데, 단유의 경우는 구도자(지톤)들과의 만남에서 이 단계로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개성이 뚜렷한 세 사람을 만나 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단유의 정신도 조금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단유의 정신적 성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고 단유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음 단계가 타인의 감정과 교류하며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유는 자신이 루치드와 하나가 되기 전까지 ‘감정’의 교류에 대해 거의 느낀 바가 없었다. 지금에야 비로소 진짜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비춰봐도 그렇다.

언뜻언뜻 소소한 일들에 마음이 움직이던 때가 있었는데, 가장 최근의 일이라면 지난 가을 체육대회 때의 일일 것이다. 경기가 끝난 직후 땀에 젖은 아이들이 부둥켜안고 환호를 지르던 순간에 움직였던 감정은 바로 다음 단계로 커가고자 하는 정신의 맥동(脈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돌연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나윤과의 만남에 대한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단유는 나윤이 자신을 생각하는 만큼 그녀를 생각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물론 싫어한다거나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교제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따뜻한 마음을 돌려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단유에게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 마음 자체가 남들이 이야기하는 ‘미련’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크다.

“하아.”

단유는 머리를 털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얼른 책을 펼쳐 책 속의 내용에 빠져들고자 했다. 괜히 시간이 남으니 이런 ‘후회’와 ‘자책’을 분석하려 들지 않는가.

아르바이트를 구한 것은 잘한 일일 것이다. 단순히 돈을 번다는 목적만이 아니라, 뭔가에 열중할 수 있는, 그래서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드는 일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잘한 일이다.

‘이제는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단유는 책 페이지를 넘기며 생각을 지워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