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65화 (465/956)

유연한 관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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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 왔구나?”

현관문을 열어준 것은 상미의 어머니였다.

“안녕하세요? 상미는요?”

“나, 여기!”

거실 소파에서 게임 패드를 붙잡고 있던 상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가 불러놓고서는 얼굴도 안 비추네.’

“그런데 단유는?”

“아, 지금 집에 있을 걸요?”

“같이 오지 그랬어?”

“그게, 선생님이랑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해서요.”

“그렇구나. 자주 오라고 해. 덕분에 상미 성적도 많이 올랐는데, 아줌마가 맛있는 것 좀 해주려고 하니까.”

“정말요?”

‘맛있는 것’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명수에게 아주머니는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왜 이제 와? 오라고 한 게 언젠데?”

명수는 무안한 표정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다.

“나름 일찍 온 거다. 근데 지금 이건 뭐야?”

상미가 하고 있던 게임은 전에 보지 못한 게임이었다.

“아, 이번에 새로 산 거. 등수 올랐다고 아빠가 사줬어.”

“그래도 공부에 취미 붙이게 책이나 사줄 것이지, 게임이나 사주고.”

마실 것을 들고 온 어머니의 한 소리에 상미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떻게 사람이 공부만 하고 사나? 가끔 스트레스도 풀어주고 그래야지.”

“이그, 넌 단유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니?”

“걔는 뭐 맨날 공부만 하나? 여자친구랑 놀기도 하고 그러더만. 그치?”

명수는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뭐야?”

“응?”

“너 눈치가 이상해? 단유···그쪽 커플에 뭔 일 있지?”

하여튼 얘도 여자라고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비상하다. 명수 본인이 티 나게 행동했다는 것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투덜거렸다.

“빨리 말해 봐? 뭔데? 헤어졌어?”

“말 못 해.”

“헤어졌구나? 왜 헤어졌는데? 언제 헤어졌어?”

“말 못한다니까?”

“얼마 안 됐구나? 왜? 싸웠어?”

“내가 어떻게 알아? 게임이나 하자고.”

“싸운 건 아닌가 보네? 그럼 왜 헤어졌지?”

명수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이상하게 상미 혼자 알아내고 이해하면서 스토리를 만들어나간다.

“너 계속 그러면 나 그냥 간다?”

“알았어, 알았어. 왜 니가 열 내고 그래? 잠깐만 기다려. 이건 혼자 하는 게임이라서 나중에 하고, 아, 이거 빌려줄게. 재밌을 거야.”

상미는 두 사람이 같이할 수 있는 게임을 실행시켰다. 곧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똑같은 자세로 TV화면을 바라보며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명수가 알다뇨?”

하은은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빈 커피잔을 싱크대에 넣은 뒤 돌아서며 대답했다.

“가만 보면 명수가 좀 느려. ···아닌가? 네가 빨라서 그런가?”

“네?”

“대개 남자는 11~14세 사이에 시작하고, 여자는 10~13세 사이에 시작하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겪는 정신적 혼란기, 라고 하면 알려나?”

“···사춘기요?”

“다행인지 너희들은 들은 것처럼 심하게 반항하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다만, 그래도 사춘기란 건 분명하지 않니?”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사춘기’를 학교에서 배우긴 했지만, 딱히 자신이 사춘기인지는 모르겠다.

“남자 청소년의 2차 성징에 영향을 끼치는 ‘테스토스테론’이란 호르몬이 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어요. 회백질(grey matter)도 늘어나면서 사고가 급격히 발달한다고요. 하지만 그게 몸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니까 딱히 사춘기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은 없네요.”

“그건 너니까 할 수 있는 소리지. 솔직히 넌 초등학교 때부터 회백질이 성인 이상으로 많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게 있잖니?”

“뭐요?”

하은이 싱긋 웃으며 단유의 턱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이거.”

단유의 턱에 꺼뭇하게 자라나고 있는 턱수염이 하은의 엄지손가락에 까칠한 감촉을 남겼다.

몇 개의 도전과제를 넘기며 게임을 하던 명수는 상미의 눈치를 보다가 게임 패드를 내려놓았다.

“쉬었다 하자.”

“왜?”

상미는 돌아보자, 명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좀 지치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지친 표정인지라 상미는 게임을 중지시키고 명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 아파?”

“아니,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좀···.”

“좀 뭐?”

“좀 지쳐.”

상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경기장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멀쩡한 애가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지친다는 게 말이 돼?”

명수는 상미를 힐끗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그래.”

기운 빠진 명수의 모습을 보니 상미도 흥이 사라졌다. 조금만 더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상미는 과감히 게임을 끄기로 했다. TV 화면으로 전환하니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대에는 그다지 볼 만한 게 없다. TV마저 끄니, 거실이 조용해졌다.

“무슨 일 있니?”

갑자기 조용해진 거실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낀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잠깐 쉬었다 하려고.”

“잘 됐다. 그럼 잠깐 심부름이라도 할 겸 나갔다 와라.”

“명수는 손님이잖아?”

“누가 명수랑 같이 가래니? 너만 갔다 와도 되잖아?”

“아뇨, 저도 같이 갔다 올게요.”

“그럴래?”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잠시 후, 상미는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가 이내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아우, 추워.”

“그러게 목도리 하라니까. 아까 그랬잖아. 밖이 춥다고.”

“거실에 햇빛이 많이 들어오길래 많이 안 추울 줄 알았지.”

“넌 참 추위 많이 타는 거 같다.”

“이 정도 추우면 누구라도 추위를 탈걸? 오히려 니가 이상한 거야.”

“나도 추워. 추운 데 참는 거야.”

“꼴에 남자라고 센 척이냐?”

“남자는 무슨.”

명수는 말끝을 흐리며 걸음을 옮겼다.

“왜 갑자기 빨리 걷고 그래? 같이 가.”

“네가 너무 느린 거야.”

“얘, 왜 이래, 오늘? 무슨 생리 하니?”

상미의 말에 명수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릴 질렀다.

“야! 넌 여자애가 말 좀 가려 하면 안 되냐?”

“왜 이래, 진짜? 오늘 너 좀 이상해? 평소에는 화장실도 안 가고 게임하던 애가 금방 지친다고 하질 않나, 생전 안 하던 신경질을 부리질 않나. 그게 딱 여자애들이 생리할 때 하는 행동이랑 똑같은 거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여자도 아니고.”

“하긴 네가 그 고통을 알겠니?”

키득거리며 명수의 어깨를 툭툭 치는 상미였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대화에도 굳어있는 명수의 얼굴을 본 상미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아냐?”

“그럼 왜 그래?”

명수는 잠시 말없이 걷다가 곧 단유에게도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상미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불감증 같은 거네.”

“게임 불감증?”

“새로운 게임을 해도 금방 흥미를 잃어서 그만둔다거나 게임을 아예 접는 증상이지.”

눈을 동그랗게 뜬 명수가 상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도 병이야?”

“뭐, 일종의 병이지. 너, 게임은 계속하고 싶지?”

“응.”

“그런데 막상 게임을 하다 보면 금방 질리는 거 아냐?”

마치 의사에 빙의된 사람 같이 진지한 얼굴로 명수를 문진하는 상미였다.

“···뭐 비슷해.”

“난 아직 게임 불감증에 걸려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걸린 사람들 이야기는 꽤 심각하더라. 게임을 잔뜩 사 놓고도 할 게임이 없어서 안 하거나, 하더라도 금방 질려서 손을 놓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게임은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혹시 이 게임을 하면 좋아질까 싶어서 또 새로운 게임을 사는 거지. 그러다 보니 게임은 쌓이고 돈은 돈대로 쓰는데 재미는 못 느낀다는 거야. 세상에! 게임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어?”

“게임 불감증이라는 게 평소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야?”

평소에도 종종 무기력을 느낀다는 명수의 이야기에 상미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뭘 모르나 본데, 이 세상은 말이야. 모든 게 게임이야. 네가 하는 축구도 게임이고, 학교생활도 게임이고, 시험도 게임이고, 지금 하는 심부름도 다 게임이야.”

언뜻 생각해보면 그럴듯하다. 아니 그 말이 멋있다. ‘인생은 게임’이라니.

“지금 심부름을 클리어하면 보상으로 용돈이 나오지? 학교에서 공부로 렙업해서 등업하면 졸업하지?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면 직장 생활할 거 아냐? 그것도 어찌 보면 다 게임인 거야. 일한 만큼 월급을 받는 게임.”

“그런가?”

“그래서 우리가 지금 게임을 하는 건 절대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냐. 게이머로서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기 위한 예행연습 같은 거야. 충실하게 도전해서 성취해내는 그 감동을 현실에서 느낄 수 있게끔 하려는 연습 같은 거라고.”

상미의 개똥철학은 마트에 가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게임하는 게 질린다? 이건 인생에 질린다는 소리랑 마찬가지야. 재미없다고 인생 포기할 거 아니잖아? 게임은 힘들어 봐야 게임이야. 본질적으로 즐기는 거라고. 즐기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면 못 이룰 리 없으리라.”

상미의 얼굴을 보니, 자기 말에 도취 되어 경황이 없어 보인다. 아마 지금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어디였더라,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단유는 자신의 턱을 쓸어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명수가 알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명수는 자신이 사춘기라는 걸 안다는 이야기예요?”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뭐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명수가 안다고 했던 것은 사춘기를 안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무기력증을 해결할 방법을 안다는 이야기야.”

“안다고요? 알면 고칠 수 있다는 거네요?”

“글쎄.”

어깨를 으쓱거리며 머리에 감아뒀던 수건을 푼 하은은, 수건을 베란다 쪽 세탁기에 집어넣은 뒤 바깥 풍경을 보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어 있어. 배고프면 밥이 먹고 싶어지고, 당이 필요하면 단 게 당기듯이. 호기심이 생기면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지식을 보충하고, 몸이 찌뿌둥하면 스트레칭을 하거나 운동을 하지.”

어쩐지 지금의 이야기도 아까와 같이 대화가 산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인 것만 같았다. 단유는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하은의 말이 계속되었다.

“명수도 지금 자신이 필요한 게 뭔지 무의식적으로는 아는 거야. 그래서 아침부터 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거겠지.”

하은의 시선이 무언가를 쫓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단유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은의 곁에 섰다. 그리고 곧 명수와 상미가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명수는 호르몬이 필요한 거야.”

“호르몬이요?”

무슨 호르몬? 단유가 알기로 호르몬 주사는 심각한 병일 때만 맞는 거로 아는데?

“연애 호르몬.”

하은은 명수가 상미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미에게 관심을 보인 건 꽤 이전이었지만, 방학 전까지만 하더라도 워낙에 명수가 학교 일로 바빴던 탓에 상미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방학이 되니 시간이 많아지고 학교나 축구와 같은 특정 관심사 외에 생각을 쏟을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상미처럼 예쁜 여자친구를 곁에 두고도 관심이 없을 수야 있을까? 특히나 혈기왕성한 사춘기 소년 아닌가.

하은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도파민 같은 건가요?”

“응?”

“전에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보니까, 연애를 하면 대뇌에서 본능을 관장하는 미상핵이 활성화 된다던데, 여기가 도파민이 작용하는 쾌감 중추의 메인 신경이라고 하더라고요. 선생님 말씀은 도파민을 이야기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단유를 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단유는, 참 똑똑해.”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똑똑하다고 칭찬하고 싶어서.”

연애하기 참 힘든 친구인데, 그동안 고생했겠다, 나윤이. 하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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