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64화 (464/956)

유연한 관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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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한 해가 지나고, 희망에 찬 새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라고 외치는 아나운서의 멘트와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는 단유에게나 명수에겐 별로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은도 소파 위에서 반쯤 드러누운 편한 자세로 맥주캔을 홀짝이며 TV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TV 속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덕담을 나누는 광경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이 먹는 게 뭐가 좋다고.”

하은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오징어 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난 모르겠어. 어제랑 오늘이랑 다른 게 있나?”

소파에서 밀려나 바닥에 주저앉은 명수는 무릎을 끌어안고 TV를 시청했다. 새해의 시작은 관심이 없지만, 잠시 중단된 가수들의 무대가 언제 재개될지는 관심이 많았다.

“뭐, 사실 양력으로 1월 1일은 별로 의미가 없는 날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

양력에서의 1월 1일은 단지 부활절을 춘분 다음에 오게 하려고 날짜를 역산해 정한 날짜일 뿐이다.

“과학적으로, 그러니까 천문학적으로 진짜 새해를 따지는 건 어렵대.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타원형 궤도에 올라가 있을 뿐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원에는 시작도 끝도 없잖아. 끝없이 돌고 도는 거지.”

“우리 인생 같네.”

하은은 전인권의 ‘돌고 돌고 돌고’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돌고 도는 인생처럼, 그래서 시작도 끝도 없는 원 위에서 끝없이 돌고만 있는 지구에 들러붙어 먼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들 중, 이제 겨우 15년을 갓 넘긴 단유와 명수는 다음 날에도 변함없이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나갔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던 명수의 말에 단유가 가볍게 대꾸했다.

“선생님처럼 과음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

하은은 몇 캔만 마시다 방에 들어갈 듯하더니, 뭐에 꽂혔는지 결국 냉장고에 있던 맥주들을 모두 꺼내 마시고 새벽에야 침대에 들어간 듯 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간 단유는 테이블 위에 쌓아놓은 맥주캔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고.

“아니면 해돋이 같은 거 보러 간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명수의 맞은편에서 무릎과 발목의 관절이 완전히 풀리도록 꼼꼼히 스트레칭하는 단유였다. 그리고 손목도 천천히 풀더니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숨을 한껏 들이쉰 뒤, 발로 지면을 차며 튀어 오르듯 하체를 들어 올렸다. 물구나무서기를 한 상태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단유를 보며 따라 해 볼까 궁리하던 명수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이런 날씨에도 해가 보일까?”

먹구름이 끼어 흐릿한 새벽 날씨였다. 시간을 따지면 대략 30분 정도 뒤에 해가 뜰 테니 그사이에 구름이 옅어지면 모를까, 지금 같아선 수평선에서 깨끗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바닷가는 또 날씨가 다를 수 있으니까.”

“그래?”

“그런데 아마 보기 힘들 거야. 어제 뉴스에서도 해돋이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지금 날씨라면 서울엔 오후에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 이르면 오전에라도.

무릎을 높이 세우고 제자리 뛰기를 1분 가까이하던 명수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허벅지를 주무르며 헉헉대다가 다시 물었다.

“해돋이 보러 가면 새해 목표나 소망 같은 걸 빈다고 하잖아?”

“응.”

물구나무를 마친 단유가 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머리 높이까지 차올렸다. 유연성도 기르고 다리 스트레칭도 되니 일석이조(一石二鳥)다.

“그런데 우린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지?”

단유는 동작을 멈추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명수도 등을 바로 세우며 설명을 보충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서. 내가 갑자기 공부 1등을 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건 이상하잖아? 그렇다고 20등 안에 들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고.”

“축구는?”

“그것도 봄 대회만 지나면 끝이니까.”

3학년은 봄 대회까지만 출전한다. 지난번에야 워낙에 축구부원들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우승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어서 3학년들을 전략적으로 가을 대회 때 출전시키긴 했다. ‘전국대회 우승’이란 타이틀은 학생기록부에 집어넣기에 좋고, 축구를 진학 조건으로 따지는 학생들에겐 메리트가 크다. 하지만 명수는 이미 두 차례 우승을 했고, MVP도 얻은 바가 있었다. 벌써 몇몇 축구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학교를 통해 관심을 보였다.

“어쩐지 이번에는 꼭 우승해야겠다는 생각도 크게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승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작년처럼은 안 느껴지네.”

신발의 뒤꿈치로 바닥을 문질러 흙먼지를 일으켜보던 명수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잘 모르겠어. 도대체 올해는 뭘 목표로 해야 하는지.”

“넌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잖아? 그 꿈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니까, 올해도 부지런히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지친 걸까?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이라던가? ‘방전’이 돼서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린다던 그런 증상?

“계속 반복되는 운동도 별로 재미가 없고, 지금도 그냥 습관처럼 할 뿐이지 하면서 뭔가, 내가 잘한다는 느낌도 없고,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

“너무 오랫동안 경기를 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

“요즘은 게임도 재미없어서 계속 못 하겠더라고.”

그러고 보니 방학 이후로 명수가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게임을 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리모컨으로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면서 멍한 시선을 던지던 명수였다.

“네가 같은 경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읽었던 책에는 그 증상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걸 봤어.”

단유는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보통 수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넌 요즘 잠을 잘 자는 편이야?”

“음, 가끔 잠이 늦게 올 때가 있긴 한데, 그건 다 그렇지 않나?”

“넌 아니지. 넌 예전부터 머리에 베게만 대면 바로 숙면을 했었잖아.”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명수였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가져보는 건 어때?”

“새로운 목표?”

“그러니까, 한시적이더라도 새로운 목표를 가정해보고 그 일에 도전하는 거지. 일단 신선한 자극이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하니까.”

“축구에서 새로운 목표라.”

“아니, 축구 말고.”

“축구 말고?”

“가끔은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예를 들면?”

“음, 네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20등 안에 들기나, 10등 안에 들기 같은 거?”

“공부하라고?”

“내가 잘 가르쳐 줄게.”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될까?”

“아, 그러면 너도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 보던가.”

“난 연습 나가야 하는데?”

“내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새벽에만 아르바이트하는 거지. 해보니까 나쁘지 않더라고?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근데 말이야, 그건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금방 하다가 시들해지면 어떡해? 그만하고 싶어도 그만할 수가 없잖아?”

“왜 미리 그런 걱정을 해?”

“요즘은 별로 흥미가 닿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금방 하다 말게 되더라고.”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고민 상담인 데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을 늘 머릿속에 간직하고 사는 게 아니었기에 괜찮은 대답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조금 더 생각하고 다시 이야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뒤에야 두 사람은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단유는 명수의 고민을 위해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좀 더 나은 조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언을 위한 조사는 필수였다. 컴퓨터를 열고 ‘번아웃 신드롬’에 대해 살펴보니 의외로 많은 사람이 비슷한 무기력증을 호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번아웃 신드롬? 명수가?”

머리를 감지 않은 게 분명한 하은이 산발인 채로 단유를 돌아보았다. 단유는 대화보다 세수가 먼저라고 판단했다.

“씻고 나오세요.”

하은을 힘으로 밀어 욕실 안으로 넣은 뒤,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였다. 숙취엔 해장국이란 말을 들었지만, 해장국을 끓일 줄 모른다. 하지만 하은이 술을 마신 다음 날 커피를 마시던 모습을 종종 봤던 기억이 있기에 미리 진한 커피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보다 연하게, 물을 조금 더 타서 본인 몫의 커피를 탔다.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커피를 보니 데이트 할 때, 나윤과 함께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넌 아직 독하게 마시면 안 되니까, 물을 조금 더 타서 마셔봐. 그러면 음료수처럼 마시기 편할 거야.”

같이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커피의 맛을 알게 된 단유였다.

“이야, 김단유! 고마워! 땡큐!”

“별말씀을.”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감아올린 뒤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크으’하는 감탄사를 뱉는 하은이었다. 아저씨 같았다.

마침 명수도 상미네 집에 넘어간 사이라 단유는 편하게 하은과 명수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은은 커피의 따뜻함을 즐기면서 동시에 단유와 명수의 우정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둘의 우정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하은이 몰래 빌어보는 새해 소망이었다.

“번아웃 신드롬이라는 거 난 없다고 봐.”

“인터넷에 보니까, 그런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많던데요?”

“그냥 이름 가져다 붙이기 좋아하는 이들이 만든 현상이지. 무슨 신드롬, 무슨 신드롬 하면서 이것저것 이유와 핑계를 만드는 거야. 그런 신드롬 전에도 무기력증은 오랜 세월 인간이 싸워왔던 증상 중의 하나니까.”

하은의 이야기는 그랬다. 무기력증이란 아주 오랜 세월, 인간이 언어를 쓰기 전부터 있던 병이라고.

“사냥을 하러 나갔어. 그런데 사냥감이 안 잡혀. 집에 돌아와. 아내와 자식들이 먹을 거 내놓으라고 하지. 그러니 눈치가 보여, 안 보여? 다시 사냥을 나가. 그런데 또 안 잡혀. 집에 돌아와. 눈치만 보이나? 자신은 왜 사냥을 못 할까 답답하겠지? 답답하고 짜증 나겠지? 답답하고 짜증 나는데 방법을 모르면 어때? 또 답답하지? 악순환이지? 악순환에 빠지면 사람은 방향을 잃고 무기력에 빠지는 거야.”

“그럼 방법이 없나요?”

“방법이 왜 없겠니? 아까 사냥에 실패했던 가장이 어떤 방법을 썼을 거 같니? 속병이 생기는데 사냥을 하기도 싫고 그렇잖아? 그러니까 그 마음을 벽에다 표현을 했어. 어떻게 돌을 잡고 벽에 그림을 그리는 거야. 빙글빙글. 내 마음이 이렇다, 는 걸 표현하려고 원을 그리는 거야.”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원을 그리다 보니까, 다른 것도 그릴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래서 이것도 그려보고 저것도 그려보는 거야. 소를 그리면서, 이 소를 잡았으면 좋겠다, 빌어도 보고. 말을 그리면서, 저 말을 잡아서 뒷다릴 잡아 뜯어 먹으면 배부르겠지, 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그러니까, 고대 원시인들의 벽화라는 게 무기력증 때문에 생긴 것이다, 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벽화 그릴 시간에 사냥을 나갔겠지. 사냥을 나가기 싫으니까 벽에다 그림만 그리면서 빌고 있는 거야. 소 잡아야지, 말 잡아야지, 하면서. 상상력만 커지니까 매머드 같은 것도 잡았으면 좋겠다고 그려 넣고 있는 거야. 그거 그리는 게 쉽겠니? 연필로 그리는 것도 아니고 돌로 벽을 파고 새기는 건데 오죽 시간이 걸리겠어? 사냥 갈 시간에 벽만 파고 있는 거야. 벽만.”

어제까지는 별로 말이 많지 않던 하은이었다. 학원 일 때문에 피곤했는지도 모르겠다. 모처럼 학원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다 보니 예전의 하은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던지, 아니면 어제 마신 술의 여파가 조금 남았던지 둘 중 하나이리라.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명수는요?”

“명수?”

“명수가 지금 느끼는 무기력증을 해결하려면 그림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긴가요?”

“그림도 좋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뭔데요?”

하은이 싱긋 웃었다.

“그건 명수가 이미 알고 있어.”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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