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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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단유와 명수, 그리고 하은까지 세 사람이 함께 외출했다.
“이런 날 집안에만 있으면 섭섭하지. 안 그러니?”
붉은 털모자를 쓴 하은은 깜찍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와 명수를 돌아보았다. 단유가 얼른 하은의 팔을 붙잡아 당겨, 하은의 뒤를 지나가던 꼬마 아이와의 충돌을 막았다.
“길을 걸을 땐 앞을 보고 걸어야 하는 거 몰라요?”
명수의 핀잔에 하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오랜만에 너희들이랑 나오니 좋아서 그러지.”
“일을 안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명수는 단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선생님이 그동안 너무 고생하시긴 했어. 그렇지?”
단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려는 사이 명수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머리도 안 감고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그치?”
“명수 너!”
하은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주먹을 들어 올리자 피하는 시늉을 하며 단유 뒤로 숨는 명수였다.
“선생님, 여긴 밖이잖아요. 자중하셔야죠?”
아무래도 명수가 지태랑 다니면서 깐죽거리는 스킬을 습득한 모양이다. 웃음기 가득한 비명을 지르는 명수나 골이 난 척하며 명수를 붙잡으려 하는 하은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뜬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세 사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선물을 사주겠다는 하은의 의지로 오게 된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전날에 준비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라는 명수의 물음에,
“그런 고정관념을 버려. 지금 봐봐. 여기 사람이 얼마나 많니? 이 많은 사람이 왜 지금 여기에 다 몰렸겠니? 그리고 명수 너 계속 까불면 선물 안 사준다?”
라고 대답하는 하은이었다.
“에이, 선생님. 장난이신 거 아시면서.”
명수의 애교에,
“···두 살만 어렸어도 귀엽게 봐줬을 텐데, 다 큰 녀석이 그러니까 징그럽다.”
하은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동안 명수도 부쩍 자라서 이제 하은의 어깨와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단유야 이전부터 크긴 했지만, 명수처럼 과하게 애교를 부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지적을 받을 일이 없었을 뿐이다.
“선생님, 너무해.”
입술을 삐죽 내민 명수에게
“하지 말라 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하은이었다.
“그만 해요, 둘 다. 이러다 오늘 안에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겠어요.”
두 사람의 팔을 붙잡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단유의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하은의 말대로, 백화점 안은 인산인해라는 말처럼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한 걸음도 편히 걷기가 힘들었고, 한 눈이라도 팔면 일행과 헤어지기 일쑤였다. 곳곳에서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는 건 그런 이유일 테다. 이런 와중에도 물건들을 살피며 살만한 게 있는지 살피는 여유를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여자들 뿐이라, 뒤따르는 남자들은 그저 피곤할 뿐이다.
에스컬레이터를 찾아 걷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지치는 기분은 단유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공기가 희박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하게 만든다.
“빨리 와. 정신 놓지 말고.”
하은만 눈을 반짝이며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속을 파고드는 날렵함을 보인다. 그 뒤를 따라가니 어느새 남성복 매장이 모여있는 층이었다. 그중에서도 평상복 의류들을 판매하는 매장들을 찾아가는 하은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하은의 주변에만 사람들이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반대로 명수와 단유 주위에만 사람들이 몰려와 진로를 방해하는 것 같고.
“여기서 한 번 골라봐.”
“여기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크리스마스잖아? 월급도 받았고.”
단유가 돌아보니 명수는 이미 바지를 뒤적거리며 고르는 중이었다.
“명수한테 맞는 바지가 지금 별로 없잖니? 이참에 바지를 하나 사는 게 좋겠다 싶네. 너도 빨리 골라봐.”
아무리 이맘때 정도의 아이들이 빨리 자란다고 해도 단유와 명수는 너무 빨리 자랐다. 하은은 마침 크리스마스기도 하고 겨울에 입을 옷도 필요하니 이참에 사자는 생각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온 것이었다.
“여긴 너무 비쌀 거 같은데?”
“괜찮아. 선생님이 ‘선물’로 사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매장 내부를 둘러 보았다. 여성복 매장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복작거리며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젊은 연인, 친구끼리 온 사람도 있었고, 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도 있었다.
“이거 어떠니?”
“아, 엄마! 내가 고를게.”
아들의 반대에도 머리가 희끗한 어머니는 아들의 몸 위에 옷을 맞춰 보며 어떤 옷이 잘 어울릴지 찾는 데 열중했다. 조금이라도 나은 옷을 사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모습을 보다 단유도 적당한 옷을 골라 하은에게 건넸다.
“저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요.”
“빨리 와. 여기서 길 헷갈리면 하루종일 못 찾는 수도 생길 거 같으니까.”
정 급하면 백화점 방송실에서 아동 실종 신고(?)를 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흘러 들으며 단유는 매장을 나왔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는 대신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사실 하은은 나름 패션에 신경 쓰는 스타일이라 옷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옷을 채운다는 목적보다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단유도 뭔가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은의 옷을 골랐다. 아무래도 학원 선생님이니까 평범한 티셔츠보다는 블라우스 계통이 어떨까 싶었다.
“누구 선물하실 거예요?”
“네.”
“여자 친구?”
“아뇨, 선··· 누나요.”
“아, 착한 동생이네.”
매장 직원이 웃음을 지으며 사이즈를 물었다. 평소 집에서 빨래를 말리고 개는 역할을 단유가 했기에 눈에 익숙한 사이즈를 집어 보였다.
“누나가 날씬한가 봐요? 이건 어때요? 요즘 많이들 입으시는 건데.”
그냥 가볍게 고르려 했건만,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자기 옷은 눈으로 훑어서 고르는 데 1분도 안 걸렸는데 말이다.
겨우 적당한 옷을 골랐더니, 이번엔 가격이 문제다.
“39만 5천 원인데, 세일해서 33만 원이네요.”
통장 잔고가 바닥이 되었지만, 그 정도 가치는 되리라 믿었다.
‘사람들이 왜 돈, 돈 하는지 알겠네.’
어릴 때는 몰랐던 ‘돈’이 점점 단유에게 실감이 되고 있었다.
큰 거냐고 놀리던 하은은 단유가 건넨 선물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 비싼 걸 왜 사?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환불하려는 하은을 억지로 말렸다.
“그동안 선생님한테 너무 받기만 했잖아요.”
“그런 건 나중에 커서 갚아도 된다고 했잖아?”
“기회 있을 때 조금씩 갚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하은은 눈을 찡그리고 단유를 바라보았지만, 단유는 드물게 싱글싱글 웃는 모습으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하은이 꺼림칙하게 느끼는 것 같아 아무래도 특별한 수가 필요할 것 같다.
“선생님, 이번 한 번만 그냥 받아요. 네?”
명수가 눈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하은은 눈이 동그래져 단유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더니 단유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어이구 우리 단유가 이런 애교도 부릴 줄 알아?”
“선생님! 왜 사람 차별해요? 누구는 징그럽다고 그러고, 누구는 귀엽다고 그러고!”
“거울 좀 봐라. 네가 눈을 요렇게 뜨고 ‘선생님’ 이러면 어떤가.”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려 보이는 하은을 보며 욱한 명수가 볼을 부풀리며 단유를 손가락질했다.
“단유는요?”
“단유는 귀엽잖아? 아무래도 여자 친구랑 사귀면서 애교가 늘었나 봐?”
“아씨. 나도 여자 친구 사귀면 되잖아요.”
“그래라, 뭐. 누가 못하게 막기라도 하든? 솔직히 네 얼굴이 귀여운 얼굴은 아니잖니? 어쩜 애가 점점 자랄수록 산적같이 변한다니? 시커멓게 변해 가지고. 예전 같으면 까마귀 고기 삶아 먹었냐고 놀림 받을 얼굴이라고.”
“치, 치사하게 얼굴 갖고 그러기 있어요?”
하은의 말대로 명수의 얼굴이 검붉게 타긴 했어도, 연한 구릿빛에 얼굴이 아직 동안이라 ‘산적’이라고 비유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단유와 비교하면 너무 흑백이 비교되는지라 명수 나름의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근데, 단유 넌 여자 친구랑 잘 지내지?”
하은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지만, 기회를 엿보고 있던 질문이기도 했다. 솔직히 크리스마스인데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있길래 이상하다고 여기고는 있었다. 하지만 차마 여자 친구 만나러 나가지 않느냐고 묻기가 어려운 분위기가 있어서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던 하은이었다. 명수야 워낙에 눈치가 없어서 잘 모르고 있었지만.
하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단유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이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던 바이기도 하고.
“헤어졌어요.”
“헤어져? 왜?”
“음, 글쎄요.”
헤어진 이유를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나윤이 거론한 이유는 너무 편파적이지 않은가. 연예인이라서? 현실적이라고는 해도 이성적으로 따지면 말이 되지 않는 이유다. 좋아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어, 라는 옛날 영화 대사 같은 이유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만약 헤어져야 한다면, 어떤 이유로 헤어지는 게 좋을까요?”
“무슨 말이니?”
나윤은 단유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지기 싫다는 말인지, 헤어지고 싶다는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얘는 이 마당에도 이러고 싶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음, 글쎄 정확히 말로는 설명을 못 하겠어요. 이런 경우가 전에 없던 일이라 저도 당황스럽긴 한데요.”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 나윤을 바라보았다.
“제가 싫어요?”
“······.”
“사람이 헤어지는 이유라면 보통 싫어지거나 싫증이 나거나 혹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뭐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고서는 어렵지 않나요?”
보통 이런 경우라면 ‘구질구질하게 굴지마’나 ‘우리 깔끔하게 헤어져’ 같은 대사들이 어울릴 것 같은데 단유는 늘 생각 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별하는 순간에, 이별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하고 있으니.
나윤이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단유는 나윤의 머리 위쪽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헤어질 순 있겠네요.”
응?
“그렇군요.”
혼자 말하고 혼자 납득하는 단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싫어지는데도 이유가 없네요.”
뭔가 쿵, 하고 가슴에 울림이 느껴져 나윤은 가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단유가 시선을 내려 바라보니,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어 나윤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단유의 손이 다가와 나윤의 손을 잡았다. 나윤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심술을 부린 것 같아요.”
고집?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이 허락을 안 해준 것 같아요. 그래서 쓸데없는 소릴 한 거 같아요.”
듣고 싶었던 말이긴 한데, 막상 들으니 참기가 힘들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또 한 번 덜컹 내려앉는다. 방금의 말이야말로 쐐기를 박는다.
“나오지 말아요. 추우니까.”
단유가 나윤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사이 연습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났다. 달칵, 거리는 소리에 나윤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섰다. 단유가 천천히 복도를 걸어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라면, 드라마라면, 만화라면, 소설이라면, 노래라면, 꿈이라면. 그렇다면 나윤은 긴 복도를 달려가 소년의 뒤를 안으며 걸음을 멈추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소녀의 발목을 붙잡고 뛰지 못하게 막았다. 단유가 지하 입구를 빠져나갈 때야 나윤은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왜 나와요?”
계단 끝에 서서 바람을 쐬고 있었던지, 단유가 발걸음 소리에 돌아보며 물었다.
“춥다니까. 감기 걸려요.”
단유는 나윤이 걸치고 있던 패딩의 앞을 채워주며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방금 이별을 한 남자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불과 1, 2분 전에 ‘그동안 고마웠다’고 고하던 남자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단유는 나윤을 보다 연한 미소로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누난 제게 선물 같은 사람이었어요. 고마워요.”
갑자기 달려와 안기던 사람. 이전에 느꼈던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사람. 나윤의 눈이 또 발갛게 변하는 것을 본 단유는 더 시간을 끌지 못하고 돌아섰다.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