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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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나름의 요령을 터득한 친구들은 좀 더 높은 난이도에 도전했다.
“넌 지켜보고만 있어. 우리가 힌트 달라고 하면 주고.”
명수는 탁자 위의 기묘한 문양의 퍼즐을 풀고, 지태는 서랍장에서 발견된 카드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채윤은 시험관에 채워진 색색의 액체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내기 위해 주변을 뒤졌다. 물론 단유는 시험관이 특정 숫자와 짝을 이루는 색을 의미한다는 것을 벽에 붙은 가족사진의 의상과 서열에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명수가 풀고 있는 퍼즐에 의해 만들어지는 홈에 시험관을 끼우고, 맞은 편에 생뚱맞게 서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켜서 벽에 빛이 비치도록, 그래서 글자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동시에 그 글자가 지태가 찾은 카드를 배열하는 힌트라는 것과, 그 카드에 의해 방을 탈출하는 있는 키 카드(Key card)의 위치가 나오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건, 그 위치가 너무 뻔해서 굳이 저런 힌트가 필요할까 싶을 뿐이었다. 다음 장소로 건너가기 위한 입구의 자물쇠가 키 카드로 열 수 있다는 것과 그 키 카드를 숨길만 한 장소가 의외로 뻔하다는 것이 단유가 추리할 수 있었던 요소였다.
그래서 방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몇 번 돌린 후, 천장에 붙은 조명의 위치를 둘러보다 어느 한 지점에서 손을 뻗어 벽에 붙은 장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여기를 힘줘서 누르면 돌아가면서 카드가 나오는 구조이려나?’
거기까지만 확인한 후, 단유는 뒤돌아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명수가 풀고 있는 퍼즐은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그림을 맞추는 퍼즐이라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각 면의 다양한 선들이 다른 조각과 일치하는지를 일일이 맞춰보다가 보면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해서, 퍼즐을 맞추기 전에 인내심이 바닥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단유는 벽 아래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모습을 구경하며 딴생각에 잠겼다. 처음의 방은 명탐정이 범인의 실마리를 찾아서 조사하는 컨셉이었다면, 이번 방은 유명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그가 남긴 보물을 찾는 컨셉이었다.
‘이게 재미있나?’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지 입술이 삐죽 나온 명수나, 카드 주변에 힌트가 없을까 살피며 눈을 빛내는 지태, 시험관 주변을 뒤지다가 포기하고 다른 힌트를 찾기 시작한 채윤을 보며 단유는 궁금해했다.
왜 굳이 어려운 퀴즈를 만들어서 방을 탈출하게 하였을까? 퀴즈를 풀이하는 재미? 아니면 어려운 문제를 풀어서 얻는 성취감? 그런 것이라면 학교 수학 시험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단유는 수학 올림피아드 준비를 할 때 문제집들을 풀면서 재미있다고 여겼던 과거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탈출이라는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면, 단유는 오히려 지긋지긋하다. 감옥에서 탈출했고, 미친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탈출했고, 근위병과의 사투에서도 탈출했었다. 최근에는 3개월간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었고.
“······.”
방탈출 카페는 단순한 유희(遊?)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스스로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굳이 따져서 범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밀실에 갇혀야 이유도 없고, 유명 과학자의 유산을 얻기 위해 그의 실험실에 잠입해야 할 이유가 없다. 대마법사의 유지를 잇기 위해 그의 던전으로 잠입한다는 컨셉도 이유가 부족하지만, 유희를 위해 ‘허용 가능한’ 개연성 정도로 이해하고 말 일이다.
“방 탈출 카페는 일종의 역할극이에요. 그러니 본인들이 진짜 탐정, 혹은 탐정의 조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역할에 충실할 때 재미가 배가됩니다.”
카페 주인의 설명을 듣고 아이들은 나름 몰입해서 첫 번째 도전에 임했었다. 역할, 시대, 상황에 대한 가정은 결국 방 탈출카페의 테마에 몰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비록 이질적으로 꾸며진 방에 놓여 있어도 그것이 꾸며진 가짜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러니 ‘허구’라는 상황을 전제한 상황에서 빈약한 설정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거나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단유에게 ‘저 세계’는 현실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며, 자신이 본래 속했던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의 실재(實在)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지구도 마찬가지다. 지구는 단유의 이성적 관찰과 지성에 의해 실존이 증명된 세계다. 단유와 같은 경험을 겪은 이가 없으니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지구를 허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유는 궁금했다. 과연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일까? 만약 자신뿐이라면 왜 자신만 두 세계를 오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도와줘.”
명수와 지태가 단유를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 단유는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가 설명을 시작하자 금방 아이들은 이해를 했고, 2분도 안 되어 키 카드를 손에 쥐었다.
“다음 방 고고!”
다들 신이 난 것이 분명한데, 왜 이게 재미있는지는 계속 고찰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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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전날이 되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이 있었다.
“내일 눈이 내릴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궁금하면 날씨 뉴스라도 찾아봐.”
날씨에 안 맞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는 이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연습생이었다. 3년 차 연습생이라는 그녀는 나윤과 동갑이었다. 나윤보다 6개월 정도 연습 기간이 더 길었으니 거의 동기라 봐도 무방하겠다. 다만 그녀는 에이 바운스가 아니라 다른 기획사에서 연습하다가 이번에 스카우트가 된 사례였다.
“왔으면 좋겠다.”
나윤의 말에 그녀, 소영이 입술을 삐죽이며 수건을 뒤로 던졌다. 날아간 수건은 연습실 벽을 맞고 아래로 떨어지며 의자의 등받이에 교묘히 걸쳐졌다.
“지금 눈이 문제니? 하루라도 빨리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이게 뭐야?”
다소 신경질적인 소영의 대답에 나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소영을 처음 만났을 때, ‘눈이 예쁜 친구’라는 첫인상이었다.
“안녕. 나 임소영이야.”
“정나윤이라고 해.”
“알아. 데뷔한 것도 봤고. 노래 잘하더라.”
“고마워.”
“같이 하게 돼서 너무 기뻐, 행복해!”
“······.”
나윤은 소영 대신 소영의 곁에 있던 팀장을 쳐다보았다. 팀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자, 일단 두 사람 인사는 거기까지 하고 앞으로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 우선 새 노래는 지금 준비 중이니까 기다려야 돼.”
이전처럼 그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뭐가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윤은 그저 설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연초에 행사가 하나 있어. 그때 소영이 네가 새로 합류되었다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할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가디스R의 노래랑 안무 따는 데 집중해야 할 거야.”
“자신 있어요. 몇 번 부르기도 해봤고요.”
그 말에 나윤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이 따라 할 정도였던가? 나윤의 시선을 느낀 소영이 나윤을 새침하게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좋은 노래라고 생각해서 연습하는 애들이 많았어. 특히 수련 언니 파트.”
나윤도 수련 못지않게 잘하긴 했지만, 역시나 가디스R의 메인은 수련이었다. 그러니 수련이 빠지고 난 뒤 활동을 아예 잇지 못했던 것이고.
“아무튼 두 사람이 합을 잘 맞춰봐.”
“네.”
“그리고 행사에서 한 곡만 부를 수 없으니까, 다른 것도 할 줄 알아야겠지? 그래서 준비한 리스트야.”
팀장은 미리 준비해뒀던 리스트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 A4 종이에 빼곡히 적힌 리스트를 보며 나윤과 소영이 입을 벌릴 때, 팀장이 말했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 히트곡들만 골라놓은 거야. 둘이 부르기에 적당한 거로. 나중에 보컬 선생님 오시면 테스트해서 5~6곡 정도를 고르고 안무 선생님이랑 다시 상의해서 3곡 정도로 추릴 거야. 알겠지?”
“···네.”
앞으로 험난한 시간이 예상된다.
그리고 실제로 험난했다. 노래야 늘상 부르던 것인 데다, 행사용으로 AR버전만 녹음해놓으면 된다. 하지만 안무를 새롭게 준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노래에 비해 안무가 취약한 나윤에게는 더 어려웠다.
“다시 맞추자.”
“응.”
소영은 기가 막히게 춤을 잘 추는 아이였다. 춤선이 살아있다, 는 말이 이럴 때 쓴다는 걸 나윤은 처음 알았다. 아니 실제로 그 말을 입에 올린 게 처음이었다. 연습실에서 소영이 안무를 연습하던 걸 옆에서 거울로 지켜보며 한순간 동작을 놓치기까지 했던 나윤이었다.
“시간 없다니까.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래?”
말하는 본새가 조금 얄밉기도 하지만, 딱히 악의가 없는 친구라는 걸 알게 되어서 나윤은 되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할 뿐이었다.
“미안.”
어떻게 보면 소영은 종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지스탑 엔터테인먼트에서 브룸레이디로 데뷔할 뻔했다가 좌절한 뒤, 홀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다 의지가 꺾일 뻔했다고 소영이 털어놓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으면 아예 접었을지도 모른다고.
같은 출발선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친구는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자신만 뒤처져서 머무는 듯한 느낌. 특히 브룸레이디가 잘 나갈 때는 그런 생각이 더 심했으리라. 그래서 이곳에 온 뒤, 조바심이 난 탓일까?
그런데 웃긴 건, 연습실을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윤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살갑게 군다는 점이었다.
“나윤아, 먼저 씻을래?”
“응? 아니, 너 먼저 씻어.”
“그래도 돼?”
“응.”
연습실에서만 인격이 바뀌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게 잘 적응이 되지 않아 나윤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나도 알아. 그런데 이상하게 연습할 때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아무한테나 땍땍거리게 되더라고. ···솔직히 고치려고도 해봤는데, 연습실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있으면 신경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전의 회사에 있을 때도 같은 연습생들끼리 싸울 뻔한 적도 있었고.”
연습실 바깥의 의자에 앉아 속을 털어놓을 때는 그저 눈이 예쁘고 얼굴 작은 동갑내기 친구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윤은 시선을 돌려 연습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곳이 소영에겐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연습실은 어떤 의미일까?’
소영이 씻으러 간 사이, 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 대신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를 걸어갔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나서면 그 뒤에 숨어있던 겨울이 나타나 나윤의 품으로 파고든다. 상기되었던 볼도 금방 식고, 턱을 따라 흐르던 땀방울도 자취를 감춘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텅 빈 거리와 가로등이 보인다. 지금은 새벽 1시 10분. 주변의 가게들도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다. 저 멀리 편의점 간판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컴백 준비를 위해 끊은 곳이기도 해서 그저 눈으로만 즐길 뿐이다.
하늘을 바라보니 그저 어둡기만 해서 구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더라.”
그렇게 중얼거려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는 법. 하긴 지금 나윤이 보고 싶은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애초에 볼 수 없기도 하다.
하얀 입김이 위로 뭉게뭉게 올라간다. 한 번 더 후, 하고 불어보니 희미하게 흩어지며 사라지는 입김이다.
“춥지 않아요?”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운 데 왜 나와요?”
그러게.
“들어가요. 감기 걸리겠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마.
“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안 할 거야. 네 걱정. 네 생각도 안 할 거야.
단유는 희미하게 웃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희미하게 흩어지던 단유의 뒷모습이 나윤의 기억 속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