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5)-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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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은 선택을 했다.
“우리 있잖아.”
“네.”
나윤이 고개를 들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의 눈은 한없이 고요하다. 나윤은 고요한 호수, 라는 식상한 수식어를 떠올리며 그 호수에 돌을 집어 던져야 하는 자신의 파렴치함을 욕했다.
“헤어져야 할 거 같아.”
“왜요?”
아, 이건 생각 못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나, ‘그래요, 우리 헤어져요’같은 반응을 예상했는데. 단유는 마치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는 말에 ‘왜’라고 묻는 것처럼 호기심을 드러낼 뿐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 어쩐지 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사실 나윤이 속으로 얼마나 많은 시나리오를 쓰고 지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단유의 대답을 상상하며 혼자 기뻐하고 슬퍼하고 눈물짓고 웃었다. 만약 자신이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단유가 옳다구나 하면서 받아들이면 기쁘면서도 슬플 것이다. 단유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것 같아 기쁠 것이고, 그가 자신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슬플 것이다. 반대로 헤어지잔 말에 단유가 화를 내면 슬프면서도 기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자신이 이기적인 여자라는 증명밖에 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왜’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회사에서 헤어지라고 해서, 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어쩐지 이별의 이유를 남한테 돌림으로서 면피를 하려는 것 같이 보일까 봐 걱정이다. 그렇다고 다른 말로 돌리기엔, 나윤의 감정이 아직 혼란스럽다. 헤어지고 싶냐고? 당연히 헤어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제 나 컴백하면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럼 너한테 소홀하게 할 게 뻔해. 내 마음 같지 않게 너한테 짜증을 낼 수도 있고, 자주 만나지도 못할 거야. 그러면 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타당성이 있네요.”
‘타당성’? 마치 논술 시험 평가를 받는 기분이라 괜히 울컥한다.
“그리고 연예인의 연애가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 받는지 알잖아? 특히 난 이제 갓 데뷔한 건데, 처음부터 구설에 오르면 성공하기가 힘들어.”
괜히 욱한 마음에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일단 지르고 보는 나윤이었다.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죠. 솔직히 말해서 ‘연예인의 연애’나 ‘사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악성 댓글을 당해본 경험은 있으니까 뭘 걱정하시는 건지는 알 것 같아요.”
나윤도 당해본 적 없는 악성 댓글 테러를 단유는 이미 받은 적이 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래. 그래서···우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헤어지는 게’라는 말에 악센트를 집어넣은 나윤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 아냐? 상상만하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더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다만 나윤의 눈을 계속 쳐다볼 뿐이었다. 나윤은 시선을 피해 연습실의 벽을 쳐다보았다. 방음을 위해 설치한 흡음재(wedge)가 기하학무늬를 이루고 있어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괜히 어지럽다.
단유의 침묵이 계속될수록 나윤의 가슴 속에는 불안감과 동시에 기대감이 커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누나와 저의 연애를 계속하긴 어렵다는 거죠?”
나윤이 언급했던 핑계들이 ‘현실적’이란 한 단어로 축약되었다.
“···그래.”
“어렵네요.”
나윤이 돌아보았다.
“제가 요즘 예전에 못 느끼던 감정들이 느껴져서 조금 힘들거든요.”
단유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고백하자면, 예전에는, 그러니까 제가 ‘깊은 잠’에 들기 전에는요, 제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몰랐어요. 그러니까 기쁘고 슬프다는 1차원적인 감정을 제외하고는 복잡한 감정을 별로 느끼질 않았던 거 같아요.”
‘무슨 뜻이지? 설마 예전부터 날 사랑하지 않았다, 뭐 이런 소릴 하려고 그러는 걸까?’
나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단유의 눈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후로는요, 저도 설명할 수 없는 제 감정 때문에 종종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기쁜지, 슬픈지. 화가 나는 것인지, 침착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요.”
방정식이 존재하고 미지수가 있다면 다른 방정식을 대입해서 미지수를 풀 수 있다. 감정의 미지수를 해석하기 위해 ‘이성적 분석’이라는 또 다른 방정식을 대입했던 이유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생각들이 다 우스운 게, 지금 이 상황이 되고 보니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
“그냥 내 감정에 솔직하게 다가가면 되는 것을, 온갖 이유들을 가져다 붙이며 꾸미니까 더 알기 어려웠던 거예요. 상대의 말에만 귀를 기울일 게 아니라 감정에도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 따로 있는데 말이죠.···내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들어야 했어요.”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단유였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윤을 위해 비유를 들어 보였다.
“어쩌면 음악, 이란 게 그런 거일지도 모르겠네요. 성부(聲部)를 따지고 선율을 분석하는 행위가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죠.”
음악은 듣는 것이다. 듣는 행위 가운데에도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음악은 듣고 느끼는 것이다. 단유의 이야기는 바로 그 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윤도 동의했다. 노래를 연습할 때야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기술적으로 부르긴 해도, 무대 위에선 ‘감정’을 실어서 부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묻는 거지만, 누난, 어때요?”
“으응?”
“누나가 언급한 이유들, 모두 이해 가능한 것들이에요. 하지만 제가 느끼는 감정의 혼란스러움이 비단 저만의 것은 아닌 거 같으니까요. 누나 역시 혼란스러워 보여서요.”
불안해 보이는 눈빛. 그 불안의 원인은 오롯이 나윤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에서 빚어진 것일 테다. 그리고 그것을 듣지 않고서는 나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나윤도 많이 혼란스러웠다. 감정에 솔직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단유의 말은 나윤 역시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특히나 ‘가수’를 꿈꾸는 나윤이라면.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대, 나윤은 스스로의 감정과 선택을 여전히 헤아릴 수 없었다.
“나, 난.”
나윤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단유는 나윤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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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었다. 이전에도 많은 방학을 보냈고, 앞으로도 수십 번의, 아니 앞으로 남은 방학은 10번도 되지 않겠다. 아무튼 여러 번의 방학을 겪었음에도 이번 방학은 단유에게 남다르게 다가왔다. 어느 때보다 길고 험난했던 1년을 보낸 기분이었다.
“넌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지태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지태의 손에 들린 것은 단유의 성적표였다.
“평소에 열심히 한 덕이겠지.”
명수가 단유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게 정답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다가 나와서는 대뜸 1등을 하냐? 시험공부 할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단유가 너 같은 줄 알아?”
“아니, 넌 왜 계속 시비야?”
“니가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내가 무슨 시비를 걸어?”
“내 거 보고 피식 웃은 거 내가 못 본 줄 알아?”
“봤냐?”
“와, 이런 뻔뻔한 새끼!”
두 사람이 또 옥신각신하며 길을 걷는 동안 단유는 지태에게서 성적표를 챙겨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방학도 했으니 오늘은 좀 길게 달려보자.”
지태의 의견에 이번에는 명수가 쉽게 또 동조한다.
“당연하지! 오늘은 저녁까지 알뜰하게 챙겨 먹고 놀자고. 다들 집에 허락은 받아 놨지?”
솔직히 중학생들이 놀 만한 곳은 PC방, 노래방, 보드 게임방을 제외하곤 별로 없었다. 쇼핑하러 백화점을 갈 수도 없고, 남자들끼리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 것도 아니고, 비싼 음식점이나 놀이동산도 남자들끼리 가는 것은 무리다. 아니 무리라기보다는 그냥 기피 지역이다. 동물원을 가는 것도 동물을 구경하러 가는 거지, 동물처럼 구경 받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막상 놀고 싶다고 해도 딱히 놀 만한 곳이 없으니, 결국 갔던 곳에 또 가는 수밖에 없다.
“저희 4명이요.”
“지금 자리 다 찼는데.”
피시방 카운터에 있던 주인아저씨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미 인근의 피시방들이 다 비슷한 처지이리라. 거리로 나와 뚜벅뚜벅 걸으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노래방 가자.”
“다 차지 않았을까?”
다 찼다. 두 군데를 더 돌아다녔지만, 들어갈 곳이 없었다.
“아니 왜 다들 집에 안 가고 그래?”
지태가 투덜거렸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영화 보러 갈래?”
“요즘 볼 만한 영화 있나?”
“가보면 있지 않을까?”
결론만 말해서 단유, 명수, 지태, 채윤, 도하까지 다섯 사람은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정처 없이 떠돌며 시간만 보냈다.
“이렇게 놀 데가 없나?”
계속 걷는 것도 힘들어 영화관 근처의 벤치에 사내아이 다섯이 주르르 앉아 있으니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머물다 떠난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오죽하면 채윤이 그런 이야기를 할까 싶다.
“어른들은 이럴 때 어딜 갈까? 어른들은 갈 데가 많겠지?”
“당연하지. 술집도 갈 수 있고, 19금 영화도 볼 수 있고.”
“여자친구랑 모텔도 갈 수 있고?”
“에이, 음란 마귀 같은 새끼.”
“아, 전에 TV 보니까 방탈출 카페인가? 뭐 그런 거 있던데 거기 가볼까?”
“이 근처에 있나?”
그 사이 핸드폰으로 검색하던 지태가 금방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카페를 하나 찾았다. 대부분은 신촌, 홍대 쪽이었는데, 마침 이곳 근처에도 한 군데가 있었다.
“예약했니?”
“아니요.”
“원래 예약 안 하면 하기 힘든데, 지금은 방이 남으니까 들어가게 해줄게. 대신 앞으로는 예약해야 할 수 있어.”
“얼마에요?”
방마다 다르지만, 가장 싼 방은 한 시간에 18,000원이었다.
“중학생이라고 했지? 중학생은 3천 원 할인해서 15,000원이야.”
명수는 표정관리가 힘들 정도로 당황한 눈치였다. 피시방에서 종일 놀면서 저녁까지 챙겨 먹어도 만 원이 될까 말까인데, 한 시간에 15,000원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주세요.”
단유가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야!”
명수와 채윤이 단유를 붙잡았다.
“괜찮아. 이럴 때 쓰려고 번 건데.”
달리 돈 쓸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계산하고 들어간 방에서 아이들은 한 마디씩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지만, 단유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한번 해보자고. 이게 그렇게 유명하다며?”
잘 꾸며진 방안을 쳐다보며 단유가 물었다.
“아저씨, 이거 빨리 깨면 무슨 혜택 있어요?”
명수가 문을 닫던 알바생에게 물었다. 겉보기에 대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여 ‘아저씨’라고 부르기 미안했지만, 자주 듣는 이야기였는지 알바생은 아무렇지 않게 명수의 질문에 답했다.
“없어요.”
그리고 문을 닫아버렸다. 불친절하다고 불평할 틈도 없었다.
“여기서 방을 뒤져서 힌트 찾고, 다음 방으로 이동하면 된다는데.”
아이들은 처음 마주한 방의 분위기에 어색해하면서도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단유는 방 가운데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며 살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깨끗한 도배지와 사람 손이 많이 닿지 않은 티가 나는 방이었다. 명수와 지태가 지금 보는 모습처럼 방을 뒤지듯 한 시간마다 손님들이 들락거리며 방을 뒤졌다면,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방에 사람의 흔적이 남을 테니까.
벽에 걸린 액자와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서랍장, 책장, 절묘한 위치에 놓인 소파 등이 적절히 동선을 가리면서 사람들이 쉽게 주변을 훑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것도 나름 수를 쓴 것일 테다. 문제를 어렵게 하든, 문제를 쉽게 풀지 못하게 막든 결국 방탈출을 방해하는 요소일 테니까.
“안 해?”
지태가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뒤지면서 물었다.
“해도 돼?”
“무슨 말이야? 니가 돈 내놓고 무슨 허락을 받아?”
“그럼 저기 저 액자 밀어봐.”
“여기? 어, 번호판이네?”
“920317 눌러봐.”
“어? 너 여기 와봤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알아?”
“저기 저 벽에 그려진 그림은 저기 지도의 좌표랑 매치가 되잖아. 그리고 그 좌표를 저 책장의 책들 순서대로 배열해서 읽게 되어 있잖아. 그럼 간단하게 나오지.”
“···그게 간단해?”
“뭐, 그냥 잘 관찰만 하면 보이는걸?”
틀린 걸 찾는 건 이렇게 잘한다. 그냥 보면 보이니까. 그런데 왜 사람 마음은 그렇게 잘 보이지 않는 걸까. 단유는 지태의 환호를 흘려 들으며 다음 방으로 이어진 문을 밀고 넘어갔다. 결국 방에 들어온 지 3분 만에 다음 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4분 후에 또 다음 방으로 이동했고, 그다음 방에서는 약간의 조작이 필요한 곳이 있어 손이 몇 번 오가다 보니 시간이 걸려 5분이 걸렸다.
결국 30분도 되지 않아, 클리어되고 말았다.
“시시하네.”
명수가 혀를 차며 말하니, 사장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희가 처음이라길래, 난이도가 낮은 곳을 추천해줬던 거야.”
“그럼 높은 곳은 어딘데요?”
명수가 의기양양하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