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60화 (460/956)

선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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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최근 나윤이 컴백 때문에 바쁘다는 사실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연락이 조금 뜸해지긴 했어도 이해를 했다. 그 때문에 지난 번에도 단유가 먼저 연락 없이 찾아가서 놀라게 해주려 했던 거였고.

‘무슨 의미일까?’

한참 레슨 때문에 바쁠 시간이라, 전화는커녕 문자도 제대로 보내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일 만나자’는 단문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차피 내일은 토요일이라 시간도 여유로워서 한 번 찾아가 볼까 생각 중이긴 했다.

핸드폰은 확실히 커뮤니케이션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온 도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이 단지 언어의 전달과 교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 눈빛, 행동들이 모두 커뮤니케이션에 포함된다. 즉 핸드폰이나 전화를 통한 의사전달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도, ‘내일 만나자’는 단순한 메시지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만남’을 약속하자는 것인지, 만남을 전제로 숨은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

‘나 정말 왜 이러지.’

단유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 놓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만약 담당의가 단유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후유증이 남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MRI 기계 속으로 집어넣으려 했을 게 분명하다.

단유는 평소와 비슷한 차림에 두꺼운 패딩 점퍼만 걸치고 거리로 나섰다. 2주 후가 크리스마스였지만, 언젠가부터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분위기가 사라졌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이맘때 선생님의 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거리에서 흥겨운 캐럴(carol)과 다양한 색의 램프들이 상점들을 수놓았던 기억이 있었다. 너무 유난스러운 것도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몇 주간 계속되면 싫증이 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사라진 거리는 어딘지 아쉬움을 남긴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지하철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연말 분위기란 게 있는지 어딘지 모르게 들떠있고 분주한 느낌이다.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는 아줌마들과 목적 없는 시선을 이리저리 던지는 넥타이들 사이에서 알콩달콩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젊은 연인들이 보인다. 손가락이 왔다 갔다 하며 서로의 볼을 찌르고 잡은 손을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한다. 어떤 커플은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대어 온기를 나누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못 본 척하기도 하고, 혹은 힐끔 훔쳐보기도 한다.

어쩌면 단유의 시선도 그런 훔쳐보는 시선들 속에 섞여 있을 것이다. 단유는 자신이 왜 그 모습들을 보며 관찰하는 것인지 물었다. 그저 눈에 들어와서? 아니면 그런 모습들을 보고 배우려고? 그래서 나중에 나윤과 함께 있을 때 저런 모습을 해 보려고?

확실히 사랑에 빠진 이의 눈은 아름답다. 그저 웃는 것일 뿐인데도 사랑이 담긴 눈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를 전하는 것 같다. 단유는 남자 친구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사랑이 뭐길래.’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그 시간에 어젯밤 공부했던 ‘철의 결정구조 변화’에 대해 한 번 더 점검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해도 다시 돌아온 단유는 이전과 달라졌다. 이전에도 생각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렇게 뭔가를 끊임없이 분석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안 했다. 비록 주위를 경계하거나 관찰하긴 했어도 시간의 대부분은 자기 공부를 위해 할애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처럼 집중을 못 하고, 오히려 ‘산만’하다고 느껴질 만큼 주변의 행동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려 한다. 왜?

마침 내려야 할 역이어서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릴 문 앞에 서서 열리길 기다렸다. 지하철이 역내에 들어서며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단유의 옆에는 분홍빛 기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젊은 연인들이 섰다.

“뭐 먹지?”

“뭐 먹고 싶은데?”

“난 자기가 먹고 싶은 거면 다 좋은데.”

“나도.”

“분식 먹을까?”

“떡볶이?”

“응.”

“그건 나중에.”

“그럼 양식?”

“스테이크?”

“스테이크도 좋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양식은 별로 안 당기는데.”

저런 면에서는 나윤이 낫다. 나윤은 적어도 먹을 거로 밀당은 하지 않더라. 단유는 고민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반사되는 유리창을 통해 확인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토요일에 날씨도 좋으니 사람들이 많이 거리로 나선 듯 보였다. 한겨울이 아니라서 두꺼운 패딩은 못 입겠다던 하은의 말이 무색하게 대부분 사람들의 옷차림은 겨울의 한가운데였다. 물론 그때 이후로 점점 기온이 떨어진 탓도 있지만, 오늘은 유난히 차가운 날씨라 가만히 있어도 볼이 바람에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날씨니 연인들은 더욱 밀착해서 붙어 다녔다. 심지어는 저렇게 안고 있어서야 어디 걸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연습실로 향하던 단유가 핸드폰을 들었다.

[왔어?]

보컬 연습실 안에 있었는지 약간 울림이 느껴졌다.

“네.”

[금방 나갈게.]

“네.”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머니에 다시 챙겨 넣고 연습실 입구로 걸어갔다. 도착할 무렵 지하에서 올라오는 나윤이 보였다.

“춥지 않아요?”

무릎까지 내려오는 패딩이었지만 그 아래로는 맨다리가 훤히 드러난다.

“조금 춥네.”

패딩을 여미는 나윤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어디 가서 이야···아니다. 밥 먹었니?”

단유는 문득 조금 전의 일이 생각났다.

“먹어야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나? 나야 아무거나 상관없지.”

“그럼···.”

“저기 가자.”

한 손은 패딩 호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방향을 가리켜 보이는 나윤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조급함이 엿보이는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자주 가던 분식집이 있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사람은 볶음밥을 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단유는 그 침묵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건 잘도 분석하더만.’

단유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나윤도 다를 바가 없었는데, 다만 나윤의 표정은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오늘 춥지?”

“네, 비 온 뒤로 계속 기온이 떨어지네요. 오늘 뉴스 보니까 내일은 더 추울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그렇구나.”

“누난 감기 조심하셔야겠어요. 목 상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

형식적으로 날씨 이야기를 꺼낸 뒤로는 달리 건넬 말이 없었던 것일까. 나윤은 몇 번이고 분식집 주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 것은 아닐 테니 의도적으로 단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일 테다. 이쯤 되면 아무리 단유라도 이상함을 못 느낄 수 없다.

“하아.”

단유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불현듯 단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최근 자신이 벌인 기행의 이유였다.

‘감정을 따라가기가 힘든 거였구나.’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저 친밀감을 표현하는 정도의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 사람이 표현하는, 혹은 내색하지 않는 온갖 감정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 늘 한결같지는 않다. 슬픔이 가득한 장례식에 가서도 우스운 장면을 보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는 것이 사람이고, 치열한 공방전이 오가는 야구장에서 주위 사람들과 함께 응원 도구를 흔들며 즐기다가도 모종의 이유로―부고(訃告) 연락을 받았다거나, 연인에게서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었다거나―슬퍼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란 게 단순히 조울증 환자를 수식할 때만 쓰이는 것은 아니리라.

그런 의미에서 단유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감정의 격류에 혼란스러웠다. 이전에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느껴지는 감정의 깊이가 다르달까? 단유 본인의 마음가짐이 변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단유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 탓이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을 체감하면서 단유는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단유는 감정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감정이 어색하고 낯선 게 아니라 단유 본인이 체감하는 감정이 낯선 이유였다. 그래서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감정을 분석하고 해석한 것이다. 지난 며칠간 단유가 주위 사람들을 보며 가졌던 다양한 생각들은 바로 그 감정을 ‘이해’해 보려던 단유 만의 프로세스였던 셈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서 혼란, 슬픔, 안타까움과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감정과 마주한 본인에게서도 해석하기 힘든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나윤은 단유의 한숨에 깜짝 놀랐다. 줄곧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더 가슴 아파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한숨과 함께 일그러지는 단유의 얼굴.

“왜? 왜 그래?”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아파? 아프니?”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단유였다. 그걸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윤은 자신을 책망하며 단유의 안색을 살폈다.

단유는 감정과 생각을 수습한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많이 힘들면 말해. 너, 아직 몸조심해야 하잖아?”

“안 그래요. 말했잖아요? 그냥 깊이 잠들었을 뿐이라고.”

“그래도···.”

나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단유를 바라볼 때,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먹죠?”

단유가 싱긋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나윤은 쉽게 숟가락을 들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나윤은 단유에게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솔직히 그 ‘이야기’가 단유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좋아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다. 화를 낼지도 모르고, 기다렸다는 듯 쉽게 동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단유가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격한 반응이 나올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윤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수저를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연습실로 돌아왔다. 이제는 예전처럼 밖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닌 나윤이었다. 좁은 보컬 연습실에서, 어색한 침묵 속에 마주 앉았다. 나윤이야 할 말이 있어도 하기가 어렵고, 단유는 나윤이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먼저 무슨 말을 꺼내기가 곤란했다.

“여기 춥지?”

나윤이 어렵게 꺼낸 말에 단유가 두리번거리며 보다가 말했다.

“아뇨, 괜찮은데요. 그래도 누난 여기서 연습하려면 그 패딩 입고 해야겠어요.”

“응. 그렇긴 한데 또 오래 있다 보면 더워져서 벗었다 입었다 하면서 해.”

아무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오갔다.

“누나.”

“응?”

나윤의 눈이 불안감에 흔들리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응?”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요. 고민이든 뭐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생각하자고.”

나윤은 단유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가 공부는 잘할지 몰라도 이성 관계는 잘 모르는 경향이 있지 않았던가.

나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인지, 자신도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모르겠다.

“무슨 일 있어요?”

결국 단유가 먼저 물었다. 나윤은 눈을 꼭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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