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59화 (459/956)

선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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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과 저녁을 먹은 후 집으로 돌아오니 호빵이 달려 나와 단유를 반겨주었다.

“밥 먹었어?”

호빵의 집 앞을 보니 깨끗하게 비워진 밥그릇이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밥 주고 나왔어.]

“넌? 밥 먹었어?”

[응. 방금 먹었어. 아, 아줌마가 너 밥 먹었냐고 물어보시는데?]

“나도 먹고 왔어.”

[여자친구랑 밥 먹고 왔대요.]

명수가 아주머니께 대답하는 소리에 단유는 웃음을 흘렸다.

“넌 안 들어와?”

[조금 있다가. 아주머니가 과일도 먹고 가라고 하셔서.]

역시 위‘대’한 식충이다.

“폐 끼치지 말고 얼른 돌아와서 공부해. 아직 시험 안 끝났잖아?”

[알았어. 금방 돌아갈게.]

단유는 통화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종일 잔 비를 맞은 동복 상의는 현관 밖에서 손으로 툭툭 턴 뒤에 옷걸이에 걸어 벽에 걸어 두었다. 저녁이라 다른 집에 소음이 될까 봐 청소기는 돌리지 못하고 대신 걸레로 바닥을 훔쳤다. 예전엔 단유가 움직이는 대로 졸졸 따라와 털들을 날리던 호빵은, 그동안 교육이 되어서인지 자기 방석 위에 눌러앉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실과 방을 구석구석 닦고 나니, 등에 땀이 맺힐 정도다. 그제야 단유는 샤워를 했다.

집 청소와 샤워를 모두 끝냈더니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그제야 단유는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네 가지의 동위 원소. ···지구 중량의 32.07%. 체심 입방정계 결정구조를 가지고 96.1 nΩ·m의 전기저항률을 보인다. 녹는 점은 1811K, 끓는 점은 3134K. 하지만 순철은 726℃, 910℃, 1400℃에서 각각 변태가 일어난다.’

물론 시험에는 절대 나오지 않을 내용이다. 하지만 단유는 지난 경험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그저 암기에 불과하겠으나, 어설프게나마 실험을 거듭하며 철의 물질 변화를 눈으로 보고 기록했던 경험에 의해 입체적인 지식으로 변화되었다. 사실 그때의 경험을 그대로 묻어버리기엔 아깝다는 것도 공부의 한 원인이다.

얼마 후, 명수가 돌아왔다. 과일만 먹고 왔다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아마도 상미와 수다를 떨다가 온 모양인데, 괜히 아주머니께 미안했다. 상미의 경우, 시험이 다음 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롭게 놀고 있을 처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단유는 명수와 두 시간 정도를 같이 공부했다. 물론 시험을 대비한 공부였고, 단유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점검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단유가 짚어준 것만 외워도 시험의 반은 거뜬히 맞출 수 있음을 알기에 명수는 암기하려고 노력했다.

명수는 축구부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다시 말해 중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공부보다 운동에 더 많은 신경을 쓰긴 했다. 물론 장난이지만, 지태가 명수를 놀리듯 무식하다고 한 말이 전혀 사실과 다른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공부에 손을 뗀 건 아니었다. 적어도 단유와 함께 할 때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학교 선생님들보다 더 알아듣기 쉽다고 여길 만큼 단유가 설명을 잘해준 것도 있지만, 단유가 없는 시간도 쪼개서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명수는 단유보다 훨씬 ‘책임감’이 강한 친구였다. 적어도 명수는 단유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니까. 물론 시험 기간이라는 조건부 상황에서다.

****

겨울비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울비가 멈추자 거짓말처럼 날이 따뜻해졌다. 뉴스에서는 이상 기온이라고 했고, 누구는 ‘지랄 맞은 날씨’라고 평했다.

“도대체 뭘 입고 다니란 소리야?”

아침을 먹던 하은이 투덜거렸다. ‘날씨’에서 시작된 투덜거림은 ‘패션의 고민’을 지나 ‘온난화 문제’를 거쳐 ‘국가의 역학 관계’에까지 이어졌다. 오랜만에 하은의 수다가 이어지던 중 명수가 물었다.

“그래서 이 날씨가 미국 때문이에요?”

모처럼 하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명수의 질문에 하은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단유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늘이 시험 마지막 날이지?”

“네.”

“끝나고 집에 바로 올 거니?”

“아니요!”

명수가 대뜸 외쳤다. 마치 억울한 조서에 항의하는 변호사에 빙의한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시험 뒤풀이를 해야죠.”

하은은 얕은 숨을 내쉰 뒤, 마침 준비해뒀다는 듯 옆에 둔 지갑을 들어 펼쳤다. 단유에게 돈을 건네며 ‘이걸로 써’라고 말하니, 역시나 명수가 ‘왜 단유만 줘요’라고 항의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아르바이트를 할 때 벌었던 돈이 남아 있던 단유의 사양에,

“선생님이 주는 용돈은 그냥 써도 돼.”

나중에 돈 벌면 그때 써, 라며 지갑을 닫는 하은이었다.

용돈은 단순히 부모가 자녀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군것질이나 하라고 주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용돈이 자녀의 경제 개념을 키우기 위한 교육적 용도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용돈의 그 이면에는 관계를 정립하는 목적도 숨어 있다. 요컨대 용돈을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에 상하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친구나 동등한 관계에서는 용돈이란 게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하은이 ‘내가 너희들을 보호한다’, 혹은 ‘내가 너희를 돌보는 책임자’라는 의미를 용돈에 부여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무의식은 분명 존재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하은은 용돈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 이 집에서의 위치를 증명하려는 셈이다.

‘무슨 생각이람.’

단유는 피식 웃으며 하은의 용돈을 받아 챙겼다.

“고맙습니다. 아껴 쓸게요.”

망상이든 뭐든, 하은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쭉 단유와 명수에게 ‘선생님’일 테니까.

****

시험이 끝난 뒤, 떠들썩한 교실에서 도하가 가방을 챙기다 물었다.

“어딜 갈 거야?”

“아직 안 정했는데? 명수나 지태가 정하겠지.”

지난번에 한 번 어울린 뒤부터 도하도 종종 단유의 무리에 끼어 놀기 시작했다. 오늘도 시험 뒤풀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미리 어딜 갈 건지 물은 것이다.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아니.”

예전의 도하는 무리를 이끄는 대장 역할을 했었다. 물론 그 무리가 ‘불량한’ 무리였고, 도하가 ‘불량함’의 끝판왕 격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지금의 도하는 ‘평범하게’ 놀고 즐기는 문화를 배우는 중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도하는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 중이었다. 단유의 역할이 컸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사건’ 이후의 도하는 점점 변했고, 지금은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예전의 모습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개심(改心) 초기의 나른함과 어딘가 모르게 위험해 보이던 느낌도 사라져서, 이제는 흔하디 흔한, 중학생의 전형(典型)을 보는 것 같았다. 약간은 소심하고 엉뚱한 소년이랄까?

“시험 잘 봤지?”

“뭐, 어느 정도는?”

“그럼 오늘은 네가 쏘는 거네?”

맥락 없이 이어지는 대화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런 점을 제외하고 보면, 단유는 인간관계에도 ‘관성’이 있음을 느꼈다.

관성은 단순히 물리학에만 적용되는 힘의 성질이 아니었다. 종종 사람들이 말하듯 역사에도 관성이 있었고, 인간관계에도 관성이 있었다. 관성으로 흘러가는 인간관계는, 만약 그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면 계속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만약 옳지 못한 방향이라고 생각된다면, 브레이크를 밟기보다는 핸들을 움직여 방향을 틀어 보는 것이 좋겠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는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 아침부터 왜 이럴까?’

단유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온갖 잡다한 생각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왜? 어디 아파?”

도하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짓자, 도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진짜 변한 거 같아.”

“내가?”

오히려 변한 건 너라고.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무리다 싶으면 집에 가서 쉬어.”

“괜찮아. ···만약 내가 집에 가면 넌? 너도 그냥 집에 가게?”

“아니? 니가 아픈 거지, 다른 애들이 아픈 게 아니잖아? 걔들이랑 놀아야지. 걔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괜히 얄밉다.

“아파? 그럼 집에 먼저 들어가.”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마.”

“아, 그렇네.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머리를 많이 써서 아픈 거네. 그렇지?”

명수, 채윤, 지태가 한 마디씩 건넸다. 그리고 도하와 함께 어디서 무엇을 하며 놀까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도하의 예상과 한 치의 오차가 없다.

“섭섭하지만, 너희들이 날 이렇게 걱정해주니 고맙네. 그럼 나 먼저 갈게.”

“진짜 가게?”

“삐졌어?”

“저래 놓고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거 아냐?”

“그저께도 만났다며?”

“아주 빠졌네, 빠졌어.”

“여자친구랑 뭐·하·고 놀까?”

“그야 당연히, 으흐흐.”

“얼레리 꼴레리?”

아주 신이 났다.

결론적으로 단유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단순하지만, 단유에게는 하은에게 받은 용돈이 있었고, 아이들은 단유를 극진히 모셨다.

****

최근 회사에서 다시 레슨을 받도록 한 탓에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중인 나윤은 새롭게 배정된 팀장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운 팀장은 여자였는데, 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커트머리를 해서 마치 잘 생긴 남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헤어졌니?”

성격도 남자 같은 부분이 있어, 털털함을 넘어서 꽤 직설적이고 말을 강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니요.”

나윤은 여태 만났던 매니저들 중 가장 기가 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크러쉬? 그냥 크러쉬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예 활동하려면 인간관계부터 정리해. 이건 그냥 소문이 나고 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야.”

나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톱 끝의 굳은 살을 잡아 뜯었다.

“손!”

팀장의 한 마디에 바로 손을 뗐다.

“만약 예능 프로에 게스트로 나갔다가 그런 짓 하는 게 카메라에 잡히면 어떤 소릴 들을 것 같아? 평소에 습관 제대로 고쳐놓지 않으면, PD들한테도 혼나. 너만 욕먹는 게 아니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우리도 욕먹어. 알겠니? 자세 똑바로 하고 앉아. 허리 펴고.”

혼이 나는 와중에도 자세 교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연애는 상대한테도 피해를 주는 거야. 앞으로 얼마나 바빠지겠니? 그런데 제대로 만날 틈도 없는데 관계가 계속 되겠어? 넌 뭐라고 할 건데? 내가 바쁘니까 기다려 달라고 말할래? 스케줄 있으니까 나중에 보자고? 그러다가 니가 한가하면 부르고? 걔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네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여야겠니? 걔도 걔 생활이 있을 텐데, 너랑 맞출 수 있겠어? 진심으로 상대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헤어지는 게 맞아. 그리고 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일에만 집중해야 하고.”

틀린 말은 없다. 틀린 말이 아닌 걸 아니까 더 항변하지도 못하겠다. 고개를 들었지만 차마 시선은 마주 보기 어려워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나윤이었다.

“지금 마음 아픈 거? 나중에 다 보상돼. 너, 성공해야 하잖아? 너희 어머니 고생하신다며? 이제 행복하게 해드려야지? 니 나이 또래 애들 중에서 너처럼 기회 가진 애들이 많던? 없잖아? 그럼 더 열심히 할 생각을 해야지, 생각이 한쪽으로 빠져서 무슨 일을 하겠니?”

눈물이 찔끔 나오는데, 차마 손을 들어 훔쳐내지를 못하겠다. 나윤은 눈을 깜빡깜빡, 하며 눈물을 참으려 했다. 어머니 생각, 단유 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럽다.

“나윤아.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뭐 이 세상에 반은 남자다, 그러니? 이 남자 아니라도 만날 남자 있다, 그러니? 나도 알아. 니가 얼마나 그 애를 좋아하는지, 지난번에 봐서 알잖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넌 이미 대중에게 인정받은 가수야. 성공 가능성이 있는 가수라고. 네 꿈, 네 재능이 모두 그걸 입증했어. 그러니 독하게 마음먹어야 돼.”

나윤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끝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눈에서 툭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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