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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458화 (458/956)

선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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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의 마지막 기말시험이 시작되는 날,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혹자는 가을의 마지막과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비라고 했고, 혹자는 ‘지랄 맞은 비’라고 평했다.

“오려면 눈이나 올 것이지.”

하은의 과격한 표현은 오후 출근할 때 입고 갈 옷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추위를 생각하면 코트를 입어야겠는데 그러면 비에 젖을 것이 걱정되고, 그렇다고 빗방울에도 크게 상하지 않을 패딩을 입자니 한겨울에나 입을 두꺼운 패딩밖에 없었던 탓에 하은의 심기가 불편했다.

끙끙거리는 호빵에게 아침을 챙겨준 뒤 창밖을 바라보는 하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아, 오늘 시험이지?”

“네.”

“명수야, 문제 끝까지 읽고 풀어.”

“왜 나만 갖고 그래요?”

“단유는 알아서 잘하잖아?”

“단유한테도 한 마디 해줘요. 괜히 섭섭해할지도 몰라요.”

“···설마.”

신발을 신고 문고리를 잡던 단유가 피식 웃었다.

“전 괜찮아요. 다녀오겠습니다.”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현관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튀어 오른다.

“그냥 버스 타고 갈까?”

버스 정류장에서 고작 두 정거장 떨어진 학교다.

“아니다. 그냥 가자.”

명수는 금방 마음을 바꿨다.

“왜? 비 맞기 싫으면 그냥 버스 타지?”

“비 오는 날 버스 타면 그게 더 고생이야. 젖은 우산이 몸에 닿는 건 둘째 치고, 이상한 냄새도 나고 막 그러니까.”

명수는 우산을 펼쳐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러고 보니 지난 3개월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는 게 습관이던 단유에게 비누 하나 없는 곳에서 청결을 유지하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냄새라.’

비록 물을 데워서 세수하긴 했지만, 샤워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물을 데워 쓰지 못한 탓에 제대로 씻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니 어쩌면 자신에게도 꽤 심한 냄새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냄새에 대해 지적하지 않은 건 그들 역시 다를 바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시계니, 자전거니 하는 기계들보다 목욕탕과 비누를 먼저 만들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제 두 번 다시 돌아갈 일 없는, 그리고 언젠가는 희미한 사진처럼 남을 기억에 불과하다.

바람이 불면서 빗방울이 얼굴 옆을 때리고 지나갔다. 명수가 칫, 소리를 내며 얼른 우산을 옆으로 끌어내렸지만 이미 젖을 대로 젖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은 잠깐 사이에 비가 내리는 기세가 세졌다.

“굿모닝!”

오른쪽 골목에서 젖은 바닥을 박차며 튀어나온 지태에게 명수가 툴툴거렸다.

“넌 이게 굿모닝이냐?”

“그냥 인사지, 뭘 그렇게 따져? 그리고 니가 나보다 영어 잘해?”

“내가 아무리 몰라도 굿모닝이 무슨 뜻인지는 알거든?”

“그럼 아침부터 보자마자 배드(bad)모닝이라고 하면 기분이 좋냐?”

단유는 적당히 말리는 척을 할까 하다가 관뒀다. 이것도 나름의 인사니까.

곧 채윤도 합류했다. 채윤의 바지는 거의 무릎까지 젖어 있었다. 마치 바지 밑단을 줄여 정강이에 달라붙게 한 스키니진이라도 입은 모양새다.

“여태 기다렸냐? 그냥 혼자 가지 그랬어?”

“어떻게 혼자 가? 시험날인데 단유 기운이라도 듬뿍 받아야지.”

“야, 얘가 무슨 ‘토템’이냐?”

명수의 대답에 지태와 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수의 입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라 여긴 탓이다.

“토템이 뭔진 알아?”

“축복이나 저주를 비는 물건이잖아! 내가 그것도 모를 거 같아?”

지태가 못 말린다는 눈으로 명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얘 이거 분명히 게임에서 배운 걸 거야.”

채윤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친구의 모습에 명수가 씩씩거렸다.

“야! 그럼 토템이 뭔데?”

“단군신화는 아냐?”

“단군신화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단군신화에 곰이랑 호랑이 나오지?”

“응.”

“그게 토템이야.”

“곰이랑 호랑이가 토템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토템은 일종의 상징이고, 부족의 상징으로 쓰던 걸 말하는 거야.”

“진짜야?”

단유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명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지태에게 물었다.

“시험에 나와?”

“무슨 시험? 이번 시험? 이번 시험에는 안 나오지.”

“그럼 상관없잖아?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애초에 명수 네가 틀린 말을 한 거잖아, 라고 설명할 지태가 아니었다.

“무식한 놈.”

면박을 주면 모를까.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거리던 명수가 이죽거렸다.

“겨우 토템 하나 안다고 잘난 척이냐?”

“책 좀 읽어라, 책 좀. 맨날 게임만 하지 좀 말고.”

“단유보다 무식한 게.”

“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우리 학교에서 단유보다 똑똑한 애가 어딨냐?”

“없으니까 너도 무식한 거지.”

“와아. 미치겠네.”

보다 못한 채윤이 둘을 말렸다.

“아침부터 유치하게 왜들 그래?”

하지만 둘은 학교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도 옥신각신했고, 단유는 괜히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놈이 되어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물론 단유는 둘의 입씨름에 끼지 않았다. 비록 친구들과 좀 더 가깝게 지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갑자기 행동이 180도 달라지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이런 대화에 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변화였다.

****

시험을 마친 후, 단유는 명수에게 들릴 곳이 있다고 전했다.

“언제 올 건데?”

“아마 저녁 먹고 들어갈 거 같은데?”

“아하. 누나 만나러 가는구나? 아주 깨가 쏟아진다, 쏟아져.”

“깨는 무슨. 아무튼 혼자 저녁 챙겨 먹어.”

“네가 그런 말 안 해도 잘 챙겨 먹거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향해 걸어가던 중, 명수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은 상미네 집에 가서 먹어야겠다.”

아마 오늘 상미네 집엔 저녁밥 남을 일은 없겠다. 밥솥에 있는 밥을 싹싹 긁어먹을 식충이가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까.

교문을 나와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명수와 헤어진 단유는 하교한 학생들 무리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좁은 버스 정류장 지붕 아래로 마치 눈보라를 피하려 몸을 밀착한 황제펭귄들의 그것처럼 몸을 붙이고 선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차마 그사이에 끼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단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산을 들고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버스가 오자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가 출입구 근처에서 한 발이라도 먼저 걸치고 올라가겠다는 듯이 서두르는 광경이 보였다. 우산을 미리 접은 아이들은 빗방울에 머리가 젖는 것을 감내해야 했고, 더러 어떤 아이들은 버스에 올라서기 전까지 우산을 접지 않겠다는 듯 팔을 높이 쳐든 채로 무리에 끼어 있었다. 당연히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주변 사람들의 소리 없는 원성이 가득했다.

다행히 단유가 기다리는 번호는 아니어서 그 광경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지만, 다음번에 자신이 기다리던 버스에서도 저런 광경이 펼쳐진다면 어찌하나 걱정도 들었다. 솔직히 ‘가능’만 하다면, ‘이동’으로 바로 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했다.

단유가 ‘루치드’와 하나가 되면서, 단유는 깨달았다. 두 번 다시 그곳, 자신의 고향이라 여겼던 그곳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었던 그곳의 좌표는 물론이고, ‘이동’을 하기 위한 이미지가 마치 깨끗이 삭제라도 된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돌아다녀 볼걸.’

일본, 중국, 베트남, 러시아, 심지어 인도와 북한―금강산이 궁금해서 잠깐 갔다 온 적이 있다―까지도 몰래 다녀온 적이 있긴 했지만, 더 멀리까지는 가보지를 못했다. 본래는 겨울 방학이 되었을 때, 시간 여유를 두고 돌아다녀 볼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이것도 예전과 비슷한 경우라, 지금은 어떤 이유로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지식을 쌓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다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게 마련. 애초부터 ‘공간’의 능력은 단유의 지식과 재능을 넘어선 것이었다.

‘언젠가는 내 것으로 만들 날이 오겠지.’

단유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다시 얼마를 더 간 뒤에야 나윤의 연습실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철은 그나마 나았지만, 버스는 정말 명수의 말 대로였다. 꿉꿉한 버스 실내에 젖은 학생들이 여럿 끼어 있으니 비릿한 물 냄새와 쾨쾨한 땀 냄새가 코를 막고 싶게 만들었다. 다만 너무 유난스럽게 보일까 봐 차마 손을 들어 올리진 못해서 대신 코에 잔뜩 힘이 들어가기만 했다.

그나마 한산했던 지하철을 나와보니 비가 내리던 기세가 조금 줄어든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미리 연락할까 하다가 그냥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그냥 걸음을 떼는 단유였다.

연습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물 냄새와 먼지 냄새가 확연히 느껴졌다. 젖은 우산을 바깥으로 탈탈 털어낸 뒤, 야무지게 끈을 돌려 묶어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연습실의 좁은 복도를 지나 안무연습실을 보니 여러 연습생들이 노래에 맞춰 연습하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연습생들의 얼굴이 다소 붉은 게 꽤 오랜 시간 연습을 했던 것 같았다. 나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자리를 떠나려다 걸음을 멈췄다. 연습생 무리의 가장 왼쪽에 서서 격한 안무를 추고 있는 종철이 보인 탓이었다.

만남의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대화를 통해 종철의 악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나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헤어졌었다. 그 이후에는 따로 만난 적이 없었고, 단유 본인의 일도 겹친 탓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기왕에 얼굴을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오랜 연습 기간도 그렇지만, 재능이 없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춤을 모르는 단유가 보기에도 꽤 잘 춘다. 하지만 그런 춤보다 단유의 관심을 끈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저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니 없던 열정도 생길 것 같다. 저렇게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가 말한 대로, 기약 없는 데뷔와 불투명한 미래가 그의 열정을 깎고 순수했던 마음을 검게 물들였던 것일까? 어쩌면 종철의 그런 모습은 단지 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며, 노력의 결과가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면 누구라도 ‘종철’처럼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기다림이 ‘희망’이지만 때로는 기다림이 ‘절망’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유라고 다를까. 어쩌면 단유는 ‘종철’의 절차를 미리 짐작하고 두려워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종철이 단유에겐 가까운 미래의 자신처럼 보였을지도.

그런 의미에서 종철이 단유를 만난 건 다행이었고, 단유와의 대화를 통해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다시 ‘노력’할 마음을 갖게 되었고, ‘정열’을 되찾았다.

“여기서 뭐 해?”

단유가 뒤돌아보니 나윤이 물통을 든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아.”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네요.”

단유의 대답에 나윤이 방긋 웃었다.

“어머, 그랬어요? 그럼 모른 척할 걸 그랬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오늘 시험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시험 마치고 바로 온 거예요.”

“나 보고 싶어서?”

“네.”

단유의 당당함에 나윤은 기분이 들떠 볼이 상기되었다.

“물 마시려고요?”

“아, 응. 노래 연습할 때는 물을 마셔야 하거든.”

“줘요.”

“아냐, 바로 저긴데 뭐.”

“그럼 가요.”

정수기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나윤이 물었다.

“그런데 거긴 왜 보고 있었어? 나 찾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종철 형이 춤추고 있길래 보고 있었어요.”

“아, 종철 오빠. 춤 잘 추지?”

“제가 춤을 잘 모르니까 섣부르게 말하긴 어렵지만, 멋있던데요?”

“잘 추는 거야, 그게. 춤을 알든 모르든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단유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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