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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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학교로 들이닥친 감사관들은 아주 뿌리를 뽑겠다는 듯, 식사도 거르며 서류들을 검토했고, 현 이사장 아래의 문제뿐 아니라 지난 이사장 때의 문제까지 찾아냈다. 전 이사장의 흠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결국 재단의 문제이기에 당시 이사진들은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의 이사진이라고 해봐야, 지금은 떠난 전 이사장의 부인과 아들을 제외하면 현 재단 이사진 그대로다.
“고작 교복 하나로 떠들 게 아니었구만.”
“아이고, 이거 적당히 드셨어야지. 각 업체들마다 로비에, 뭐야 이건? 상납금이라도 받아드신 거예요? 예?”
감사관 앞에서 누구도 거세게 항의를 하지 못했다. 더러 몇몇이 결백을 주장해도, 감사관들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렇게 결백하시면, 왜 그때는 아무 말씀 없으셨을까? 회의록을 보니 조용하시던데요?”
“관례라고요? 그런 관례 찾으시다가 법전(法典) 앞에서는 아무 말 못 하는 거 봤죠?”
선생님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일개 평교사들이야 크게 문제가 될 일이 없다지만, 교장과 교감을 비롯한 몇몇 주임 선생님들까지 줄줄이 감사관에게로 끌려가니 교무실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특히 정년만 바라보던 교장이 어쩌면 불명예 퇴직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판이다. 떠들려면 학교 밖 포장마차에서나, 아니 거기서도 입조심을 해야 할 형국이니 교사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쉽게 사라지기 어려워 보인다.
그 와중에 단유가 돌아왔다.
“야, 괜찮아?”
물론 괜찮다. 괜찮기만 할까, 정신을 차리고 주말에 걸친 3일 동안, 지극정성으로 돌봄을 받아 오히려 더 낯빛이 좋아진 단유였다.
“살 빠진 거 같은데?”
빠지긴. 나윤이 입에다 욱여넣은 샌드위치, 김밥, 햄버거에 명수가 혼자 먹기 싫다며 사 들고 온 떡볶이, 어묵, 튀김과 하은이 사 온 치킨, 피자를 모두 합하면 거의 한 달 치를 몰아 먹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의 걱정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친구들의 손을 한 번씩 잡아 주었다. 친구들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자리로 찾아온 단유에게 턱을 괸―처음에는 같이 반기려 했지만, 워낙 많은 아이들이 단유에게 인사를 건네는 터라 포기하고 구경만 하던―도하가 물었다.
“선거 나가냐?”
“응?”
도하가 악수하는 시늉을 하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누가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하냐? 늙은 아저씨도 아니고.”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가, 하고 자문했지만 마땅히 그런 식의 인사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여태 만났던 대부분이 자신을 반길 때는 손을 내밀어 악수했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거야?”
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응.”
“그렇구나.”
도하는 멀거니 단유를 보다가, 단유가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낄 때쯤 또 입을 열었다.
“다음 주 시험인 거 알아?”
“들었어.”
“시험공부 못했겠네?”
“응.”
하지만 이제 시험 따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시험과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시험과 성적이 단유의 인생을 좌지우지하진 못할 테니까.
도하는 그래도 계속 단유를 바라보았다.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단유는 그 시선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떠올릴 때, 도하의 얼굴도 얼핏 지나갔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 소년은 정말 독특하다.
“너 좀 변했다?”
“응?”
도하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또 툭 하고 한 마디 뱉었다.
“계속 웃네?”
“내가?”
단유는 얼굴을 더듬어 보지만, 손으로 느껴지는 표정은 아니었다.
“기분 좋은 일 있어? 아니면 학교에 와서 기분이 좋은 거야?”
기분이 좋다, 라. 단유는 여전히 입가를 더듬으며 자신의 표정과 기분에 대해 생각했다.
책임감을 가지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당장 어떤 행동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의 궤적이 갑자기 바뀐 것도 아니다. 하지만 책임감을 느끼고, 당당하겠다고 선언하며 마음을 먹는 순간 단유는 본인은 바뀌었다.
벽을 허물고 주변과 당당히 마주 보기로 했다. 그 결과에 대해서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책임을 지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더니 단유는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동안 내가 나를 구속하고 있었던 걸까?’
속박, 어쩌면 집착. 자신을 좁은 틀 안에 가둬 두고 가능성도 막은 채, 그저 자기 위안과 만족에만 몰두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이.”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직 안 괜찮은 거 아냐?”
도하가 턱에서 손을 떼며 미간을 좁혔다. 단유는 소년의 미간을 보다 피식 웃으며 미간을 검지로 꾹 눌러 주름을 폈다. 예상치 못한 단유의 행동에 도하가 당황하고 어리둥절할 때, 단유가 입을 뗐다.
“너보단 건강하고, 힘도 좋아. 의심스러우면 팔씨름이라도 할까?”
“···됐다. 우리 반 애들 전부를 한 팔로 이긴 너한테 어떻게 당해?”
그러면서도 단유의 팔을 주물럭거리며 ‘그동안 약해진 거 아냐’라고 의심해보는 도하였다. 단유는 팔에 힘을 주어 그의 의심을 날려버렸다.
****
“단유야, 이야기 좀 할까?”
하은의 부름에 명수와 함께 TV를 보던 단유가 호빵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뒤 다가왔다. 호빵은 오랜만에 만난 단유가 그리웠던지 졸졸 뒤를 쫓아왔다.
“사실은 너랑 명수가 하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명수랑요?”
워낙에 많은 이야기를 나눈 터라,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돈 벌겠다면서?”
“아, 네.”
단유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하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나랑 한 이야기한 거 있지? 너 쓰러지기 전에 했던 거 말이야.”
그제야 단유는 하은의 어법에 단유에 대한 걱정이 많이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하려는 말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어법. 하은은 계속 단유의 기억을 테스트했다. 병원에서 정상으로 검사 결과가 나왔음에도 단유의 기억에 문제가 없는지, 혹은 후유증이 남은 건 아닌지 걱정을 하는 하은이었다.
“자퇴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단유가 정신을 잃기 전날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자신에 대한 처벌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단유가 하은에게 상의했던 내용은 바로 자신의 자퇴에 관한 문제였다.
교장 선생님과의 껄끄러운 관계, 학교와의 불편한 공존 때문에 자퇴를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부수적인 문제였을 뿐, 실제로는 당시의 단유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 이상의 지식을 원했다는 점이고, 좀 더 빨리 대학에 들어가 고등 학문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혹시 빨리 돈을 벌고 싶어서, 그래서 빨리 독립하고 싶어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건 아닌지 묻고 싶어서 그래.”
“아니에요.”
단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식탁 위에 올려진 자신의 두 손끝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도하 말대로, 웃음이 많아진 것 같긴 하다.
“당장 무슨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겠다는 건 아니고요, 독립도 아직은 멀었죠. ···빨리할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빨리 독립하고 싶어?”
“그럼요. 그래야 우리 선생님도 걱정 없이 결혼하시겠죠.”
하은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다가 단유의 뒤에서 들려오는 키득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단유의 머리를 쥐어박으려고 손을 휘둘렀지만, 단유가 잽싸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하는 통에 짓궂게 웃고 있는 명수의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놀리니?”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솔직히 우리 선생님이 외모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머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 시대 최고의 설리번이자, 이 시대의 신사임당 같은 분 아니세요?”
“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너 아직 덜 깬 거지? 그렇지?”
명수가 배를 잡고 웃는 소리에 하은이 빽 하고 소릴 질렀지만, 명수는 웃음을 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사이 단유가 여전히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로 말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나 참. 누가 그런 소리나 듣자고 그러니?”
“아무튼요.”
단유는 하은이 더 뿔이 나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때 자퇴하고 싶다고 말했던 건, 그때 이야기한 이유 그대로예요. 빨리 진급해서 더 많은 책과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아니라고?”
“네. 지금은, 자퇴 안 하려고요.”
“···다행이긴 한데, 혹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거나 뭐 그런 거니? 그래서 돈을 벌겠다고?”
“에이, 아니요. 여전히 공부는 재미있어요. 계속할 거고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거예요.”
하은은 단유의 진심을 파악해보려는 의도인지 단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물론 단유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좋아, 일단 믿겠어. 그럼 자퇴는 안 하고, 계속 학교를 다니겠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겠다?”
“신문 배달하듯이요.”
“공부에 방해가 되는 일은 없도록?”
“네.”
“다시 신문 배달할 거니?”
“다시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못해도 상관은 없죠. 그냥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요.”
“하지만 중학생이 아르바이트할 만한 건 별로 없을 거야.”
“알아요. 지난번에도 찾다 찾다 못 찾아서 결국 신문 배달을 했던 거니까요.”
“그때도 안 됐던 게 지금 되리란 법은 없잖니?”
“그건 장담할 수 없죠.”
“···너 아무래도 후유증이 남아 있는 거 같아.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지?”
단유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다가 고개를 돌려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명수를 가리켰다.
“쟤한테 옮았나 봐요.”
“야! 왜 또 난데?”
“이래서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하는 거야.”
하은의 대꾸에 명수가 벌떡 일어섰다.
“아, 정말! 둘 다 왜 또 가만있는 날 건드려···요!”
“어쭈? 선생님한테 대드는 거니?”
하은이 째려보자 명수가 ‘맨날 나만 뭐라 그래’ 라며 툴툴거리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단유가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것 같아 어울려주었던 하은이지만, 그렇다고 단유에 대해 안심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번 대화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고 말하며 결론을 미뤘던 건, 오늘과 같은 대답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 막상 단유가 생각을 고쳤음에도 하은은 편하지 않았다. 혹시 ‘책임감’이란 것 때문에, 괜히 부담을 가지는 건 아닐까?
‘괜찮을 거야. 단유는 똑똑하니까.’
스스로에게 되뇌며 단유를 믿자고 다짐을 해보는 하은이었다.
****
모처럼 지태와 채윤, 상미가 집으로 찾아왔다. 상미는 웬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와서 단유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건 병원에 있을 때 가져오는 거 아니야?”
“우리 엄마가 가져가랬어.”
상미는 식탁 위에 올려놓고 거기서 바나나를 하나 꺾어 단유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단유가 고개를 저으니, 상미가 껍질을 까서 입 앞에 대었다.
“먹어.”
어쩔 수 없이 입에 넣으니, 그제야 상미가 다른 바나나를 집에 넣고 우물거렸다.
“니들도 먹어.”
지태와 명수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달려와 바나나를 하나씩 집었다.
“그런데 너도 공부할 시간 없었지 않아? 설마 일주일 만에 시험공부 다 끝낸 거야?”
어느새 빈 껍질만 손에 든 지태였다.
“다 끝낸 건 아니고 너희들이랑 같이 하려고 부른 거야. 하는 김에 족집게 흉내도 내 보고.”
“역시 전교 1등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상미는 바구니 안에 든 멜론을 깎아볼까 생각하며 주방을 눈으로 더듬는 중이었다.
“난 이번에는 그냥 혼자 공부해야 하나 싶어서 걱정이었는데, 잘 됐다.”
채윤은 자칫 상미가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돼서인지, 서둘러 칼을 집었다.
단유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하는 친구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단유가 부르기 전에는 혹시라도 피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해서 오지 않은 것일 테다. 하지만 단유가 부르니 이렇게 바로들 달려오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다른 아이들이 그랬듯 뻔한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일부러 과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혀 무신경하지도 않으니, 이들이 바로 자신의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친구들이 곁에 있다면, 종종 힘들거나 무서울 때도 위로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