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긋는 한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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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놀란 것은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들어요?”
“네.”
의사들은 여기가 어딘지, 오늘이 며칠인지 알겠냐는 둥의 질문을 던지며 혹시 뇌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살폈다. 호흡기를 방금 제거한 탓에 잔기침이 종종 섞였다는 것 외에는 명료한 대답이 이어졌다.
“오늘이 며칠인지는 제가 알 도리가 없지만, 앞에 계신 분이 의사 선생님이란 건 알겠네요.”
“이름은 기억나요?”
단유는 잠깐 목을 다듬더니 대답했다.
“김단유입니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다 왔던 하은은 병실의 분주함에 혹시 어떤 일이 생긴 게 아닌지 불안해하며 병실로 뛰어들어왔다.
“선생님.”
하은은 입을 틀어막고 미소 짓는 단유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우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능청스러운 단유의 말에 하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명수보다 네가 더 사고뭉치구나.”
“아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또 그래요?”
옆에서 붉어진 눈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던 명수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토라진 시늉을 했다. 하은은 그런 명수를 신경 쓰지 않고 단유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오래 쉬었더니, 몸이 찌뿌둥한 거 빼고는요.”
“그래. 너무 오래 쉬었어.”
단유는 손을 뻗어 하은의 손을 붙잡았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으이구.”
하은도 단유의 손을 꼭 쥐었다.
담당의는 몇 가지 검사를 더 정밀하게 한 뒤에 퇴원 절차를 밟자고 권했다. 단유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하은과 명수가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월요일까지 병실에 묶여 있어야 했다.
단유는 신문보급소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미 집으로 전화해서 하은과 통화를 했었던 소장은 단유의 일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단유의 전화를 받았을 때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했다.
[그래서 몸은 괜찮고?]
“네. 좀 깊이 잠들었을 뿐인데요.”
[능청은. 그런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사람 구했다.]
“아, 다행이네요.”
[다행은 무슨.···알다시피 이 일이 하루도 빠지면 안 되는 일이잖아. 어쩔 수 없었던 거긴 하지만 미안하다.]
“아뇨. 오히려 저 때문에 피해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요.”
그 뒤로도 대충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통화를 끝내자 잠자코 듣고 있던 명수가 물었다.
“그럼 이제 아르바이트는 끝이야?”
“뭐, 새로 구해봐야지.”
“계속하려고?”
“이제 겨울방학이잖아? 시간도 많은데 돈 벌어야지.”
“돈?”
갑자기 돈타령하니 명수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물론 종종 돈을 버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건 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난 뒤의 사정이다. 단유나 명수나, 일단은 학교를 다니는 일에 충실하고 그동안 하은이나 여러 사람에게 진 신세는 이후에 꼭 갚자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단유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명수가 부축이라도 해줄까 싶어 손을 내밀려다 말았다. 이미 단유는 침대에서 내려와 명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창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1인실이라는 사치는 하은의 욕심이었고, 단유에게는 빚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넓은 채광창으로 바깥을 훤히 볼 수 있어 좋았다. 지난 3개월, 그러니까 이세계에서의 3개월간 겨울을 지내다 왔는데 다시 겨울을 맞이하게 되니 계절 감각이 비틀리는 기분이다.
마른 가지의 가로수들 아래로 사람들과 차들이 지나는 거리를 보며 단유가 입을 열었다.
“지난···시간 동안 반성을 좀 했어.”
“무슨 반성을 해, 네가?”
의식 없이 누워만 있던 것도 모자라, 반성이라니? 의사의 말로는 뇌 활동이 거의 멈춰진 상태라고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그 말대로라면 단유의 반성은 쓰러지기 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려나?
“내가 너무, 무지했어.”
“···그 말은 내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명수에게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인 뒤, 단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내가 너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몰라줬던 거 같애. 무시하기도 했고.”
“무시했다고?”
“응.”
단유는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다 얼른 명수를 보며 말했다.
“넌 빼고.”
“섭섭할 뻔했다?”
명수가 눈썹을 한번 위로 들썩거려 보이니 단유가 또 한 번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내 흐려진 웃음 뒤에 단유의 말이 계속되었다.
“뭐 솔직히 말하면, 너한테도 미안해. 네가 나를 생각해주는 것만큼 너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한테도 미안하고, 아무튼 그냥 다 미안한 기분이야.”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어. 넌 누구보다 좋은 친구고, 좋은 학생이었고, 좋은 사람이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네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
차마 마지막 말은 쑥스러워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단유는 그런 명수의 마음을 안다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고맙네.···아무튼 날 되돌아봤어. 난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으로 지냈었던가. 어떤 마음으로 내 주위의 사람들을 대했던가. 그래서 반성도 하고, 깨닫기도 했고.”
명수는 계속 단유를 바라보고 있기도 민망해서 같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눈을 찔러 살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난, 책임감이 없었어.”
단유의 나지막한 선언에 명수가 고개를 돌렸다.
“네가 책임감이 없다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모두의 기대를 받는 게 두려웠고, 그래서 계속 피하려고 했어. 다른 사람에게 받는 사랑도 부담스러워서 애써 모른척하기도 했었고,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고.”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과 만나는 와중에 단유는 그렇게 행동해왔다.
“생각해보니 그게 책임감이었던 거 같아. 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고, 책임을 지는 일을 피해왔던 거지. 그래서 이제 고치려고.”
명수가 고개를 휘저었다.
“전혀 아닌데? 내가 보는 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야. 스스로 한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잖아? 그리고 기대를 무시하지도 않았고. 모두가 네게 기대하는 걸 아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전교 1등도 된 거잖아?”
단유는 씁쓸하게 웃었다. 명수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선후가 바뀌었다. 스스로 한 말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니까 지키려고 했을 뿐이고, 전교 1등은 그런 기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오히려 2학년 들어서는 더욱 그런 마음이 커져서, 아예 학과목과 다른 공부만 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니 재수 없네, 나.’
만약 지태가 단유의 생각을 알았다면, 금방이라도 손가락질을 하며 핀잔을 줬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한테도 미안하고. 솔직히 선생님은, 우릴 책임질 필요가 없는데도 희생을 하고 계신 거잖아?”
“···그렇긴 하지.”
“비록 예전에 우리가 선생님께 진 빚은 나중에 갚자고 했지만, 그래선 안 될 거 같아. 내 책임을 유예시켜서 선생님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거, 잘못된 거였어.”
“음, 살짝 머리에 쥐가 날 뻔했지만, 그건 봐줄게. 어쨌든 요지는 네가 돈을 벌려는 이유가 선생님께 신세를 지기 싫다는 이유라는 거잖아.”
“그것도 있지만, 굳이 지금 내게 주어진 가능성을 무시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야.”
“가능성?”
“돈을 버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혹은 다른 무엇을 하는 것도 다 가능성이 있는데 애써 무시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명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네가 지금 당장에라도 프로 축구팀에서 널 데려가고자 한다면, 넌 어떡할래?”
“그럼 당연히···.”
명수는 말을 잇다 말았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가능성’이 주어진다면 굳이 지금의 위치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네가 하면 뭘 못하겠어?”
명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단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만능인데.”
“하하. 이러니까 내가 부담스럽다는 거야. 내가 무슨 만능이야?”
“흐흐, 너만 모르지 다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명수가 단유의 어깨에 깊이 팔을 걸치며 속삭였다.
“돈 벌면, 뭐 있냐?”
“뭐 필요해?”
“아니 딱히, 뭐가 필요한 건 아닌데 자전거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 통학용?”
능글맞은 명수의 너스레에 단유가 같이 명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까짓거 자전거 하나 만들어주지 뭐.”
“자전거를 네가 만든다고?”
“왜 못 할 거 같아?”
“아니, 너라면 금방 만들 거 같아서 더 걱정이다.”
“그게 왜 걱정이야?”
“사람들이 점점 널 사람이 아니라, 무슨 신처럼 생각할 거 같아서 말이야. 아니면 마술사?”
명수는 늘 이렇게 무심한 듯 핵심을 파고든다. 다만 자신이 핵심을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모를 뿐.
두 사람이 창가에 서서 웃음꽃을 피울 때, 병실 문 근처에서 하은이 눈꼬리를 손등으로 찍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언제부터 단유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자기가 너무 단유의 마음을 몰라줬던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의 기대에 단유가 힘들어한다는 것도 몰랐다. 오죽 힘들면 피하고 싶달까.
그런데도 지금은 저렇게 웃으며 자신의 책임감이 부족했다고, 이제는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겠다며 선언하는 단유가 너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애틋하다.
“언니, 안 들어가세요?”
“어? 왔어?”
잠깐 집에 들렀다 온다며 나갔던 나윤이 병실 밖에 나와 있는 하은을 보며 물었다. 하은은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물었다.
“뭐야 그건?”
나윤이 손에 들고 있는 게 있어 물었더니 나윤이 볼을 붉혔다.
“···병원식 안 먹어도 된다고 하길래, 집에 가서 좀 만들어봤어요.”
“직접 만든 거니?”
“···네.”
하은은 엄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유가 좋아하겠다.”
“맛없으면 어쩌죠?”
“맛없어도 맛있다고 할 애인 거, 모르니?”
“그러니까 더 걱정인데요?”
“···들어가자.”
두 사람이 병실로 들어서니, 단유와 명수는 서로의 목에 팔을 걸친 채 힘자랑을 하고 있었다.
“니가 먼저 풀어.”
“참으면 아플 텐데?”
“네가 더 힘들걸?”
“너 열흘 동안 운동도 못 하고 누워만 있었잖아? 허리 아프지 않냐?”
“열흘 만에 일어난 친구한테 힘자랑 하고 싶냐?”
“그러니까 먼저 포기해.”
“너야말로 포기해.”
“두 사람 동작 그만!”
하은의 외침에 두 사람은 얼른 팔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애다 애야.”
하은이 혀를 차며 말하자, 나윤이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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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도 병원에 있느라고 결국 학교에 가지 못한 단유는 오후 늦게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은은 학원 일 때문에라도 오지 못했지만, 단유가 혼자 할 수 있다며 극구 말린 탓에 더 올 생각을 못 했다.
“오랜만에 오니까 좋지?”
대신 학교를 일찍 마치고 병원에 온 명수가 단유의 짐을 덜어주었다. 2주를 병원에 있었다지만, 그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을 뿐인데 짐은 왜 그렇게 많은지, 가방이 한 가득이었다. 대부분은 간병인의 몫이었지만, 혹시 몰라 가져왔던 단유의 옷가지와 수건, 책 등도 무게를 많이 차지했다.
“오랜만이긴 하네.”
무려 3개월, 아니 정확히는 달력이 없으니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계절을 보냈으니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누워있었던 시간을 역산(逆算)해도 그 정도 시간이 흘렀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내일 바로 학교에 갈 거지?”
“그래야지.”
명수가 학교 이야기를 꺼내면서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요즘 학교 분위기 되게 안 좋다?”
“···왜?”
“교육청 감사 왔던 거 있잖아? 그것 때문에 완전히 난리야.”
“감사? 그거 계속하고 있던 거였잖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뭐가 많이 달라졌나 봐. 아니면 어떤 비리 같은 거라도 발견했던지. 아무튼 학교 분위기가 장난 아니야.”
단유가 실습 체험(?)을 하며 변하는 동안, 학교에도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