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긋는 한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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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으로서는 널 걱정해 줄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중은 널 걱정하기보다 의심할 거야. 의심하고 비난할 거다. 너도 모르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 거고, 너와 우린 그것들을 해명하느라고 진을 빼야 할 거다. 너의 컴백은 한없이 미뤄질 거고, 설령 다시 무대에 오르더라도 그 시선들과 싸워야 해. 그건 너도, 우리도 원하지 않는 바야.”
파란색 정장을 갖춰 입은 여자 팀장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동의한다는 듯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나윤을 지켜본다. 나윤은 반항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니까.
“이제 겨우 네 컴백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정말이요?”
나윤이 반쯤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하지만 반은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정말이야. 너랑 같이 팀을 짤 멤버도 구했거든.”
솔로 컴백은 바라지도 않았으니, 나윤에겐 불감청이나 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다. 단유가 저래서야 아무리 집중을 하려 해도 집중하기 힘들뿐더러, 단유 곁에 있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윤아, 가수가 하고 싶어?”
“···네.”
“그럼, 마음 단단히 먹어. 무르게 마음을 먹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리도 그런 사람을 믿고 지원해주긴 힘들어.”
나윤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윤은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도 정리할 시간은 주겠다며 회의를 마쳤다. 그러나 분위기를 보아, 아마 오늘내일 안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이 보였다. 나윤은 무거운 걸음으로 단유를 보러 왔다.
병실에서 단유의 얼굴을 보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자신을 바라보던 따뜻한 시선과 외롭던 자신을 위로해주던 그의 말들이 떠올라 참을 수 없었다.
만약 이대로 단유와 헤어진다면, 자신은 다시 외로움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일어나 제발.”
단유의 손을 잡고 빌었다. 눈을 떠, 단유야. 날 보며 말해줘.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줘.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해줘, 단유야.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하은이 들어왔다.
단유가 쓰러진 첫날, 학원에 급히 조퇴신청을 하고 나온 하은은 둘째 날부터는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것은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실질적으로 단유, 명수네의 가정을 이끄는 것은 하은이었다. 물론 주영에게 부탁하면 연성 재단에서 돈을 내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훈이 선을 끊은 마당에 그런 부탁은 뒤로 미루고 싶었다. 지금은 자신이 이 아이들을 돌보는 책임자이며 돈을 벌어야 할 사람도 자신이다. 명수의 말처럼 언젠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전까지는 병원비와 생계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명수 너도 일단 학교는 나가.”
“싫어요!”
눈이 퉁퉁 부은 명수를 억지로 달래서 출석을 시키는 것도 하은의 몫이었다. 나윤이 회사 대신 병원으로 와서 단유의 곁을 지켜줘 한편으로는 안심을,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나윤이 회사에서 강한 압박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하은은 나윤에게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야 했다.
“너도 네 생활이 있는데, 그걸 포기하는 건 옳지 않아.”
“···단유가 일어날 때까지만 곁에 있을게요.”
“언제 일어날지 몰라.”
“아니에요. 금방 일어날 거예요.”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어려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나윤의 고집을 꺾기엔 하은에게 명분이 부족하다. ‘선생님’. 하은은 단유에게, 그리고 명수에게 그저 ‘선생님’일 뿐이니까.
“명수는?”
단유의 이마에서 손을 떼며 나윤에게 물었다. 나윤은 여전히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친구들이랑 점심 먹고 온다고 해서 잠깐 나갔어요.”
토요일,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라서 명수도 이른 아침부터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지날 무렵, 나윤이 병실에 들어서니, 명수는 마침 비슷한 시간 병실을 찾은 지태와 채윤을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병원을 나섰다.
“나윤 누나만 있어도 돼?”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며 지태가 묻자 명수는 입가를 휴지로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만 있게 해 준거지?”
채윤의 물음에 명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콜라를 집어 마셨다.
“나윤 누나는 매일 오는 거야?”
“응.”
“와, 대단하다. 그 누나도 학교 다니잖아?”
“연예인이니까 오전만 하고 오는 게 아닐까?”
연예인이라고 오전만 수업을 듣는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나윤은 점심시간이 지날 즈음에 병실로 와서 단유의 곁을 지켰다.
“오늘이 13일째던가?”
“12일째야.”
평소의 쾌활한 명수와는 전혀 다른 묵직한 대답에 지태와 채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명수도 달리 할 말이 없다는 듯, 콜라만 마시며 창밖의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딱히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초겨울에 들어서서 그런지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두꺼워졌다. 코트는 물론이고 붉은 목도리로 목을 감은 이도 더러 보였다. 높은 구두를 신고 길을 바삐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이어폰을 끼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이도 있었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면서 걷는 이도 있었고, 옆구리에 서류가방을 끼고 성큼성큼 걷는 이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멈춰 서 있는 이가 없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험이 며칠이랬지?”
지태가 채윤에게 물으며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문다.
“다다음 주 월요일부터.”
“하아. 이럴 때는 차라리 빨리 시험 끝내고 방학이 됐으면 좋겠다.”
“방학 되면 뭐하게?”
글쎄. 지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방학을 기다렸겠지만, 지금은 방학이 되어도 딱히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친구가 병실에 누워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방학이 즐거울 리 없다.
또다시 정적이 흐르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지태는 햄버거를 우걱우걱 씹었다. 그마저도 눈치가 보였는지, 천천히 햄버거를 씹던 지태는 햄버거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푸념을 늘어놓지도 못했다. 채윤은 괜히 휴지로 식탁을 쓱쓱 닦으며 어색한 침묵에 동조했다. 그리고 지태에게 눈짓을 보냈다.
‘빨리 먹어.’
‘목멘다고.’
지태의 콜라는 이미 예전에 다 마셨다. 유달리 갈증이 많이 나는 상황이라 그럴까. 채윤은 지태에게 자기 몫의 콜라를 건넸다.
“어, 선생님이네?”
채윤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하은을 가리켰다. 지태가 눈으로 좇아 하은을 찾은 뒤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냥 앉아 있어.”
명수가 나직이 말하자 지태의 엉덩이가 다시 의자에 들러붙었다. 명수의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여기서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뭐, 더 마실래?”
채윤이 묻자, 지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야, 너는?”
“난 됐어.”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고마워.”
채윤이 일어나자, 지태가 얼른 따라 일어나려 했다. 채윤이 재차 눈을 부라리며 신호를 보내니 지태는 다시 엉덩이를 붙이며 입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얌전히 있어.’
채윤이 돌아서 카운터로 간 사이, 지태는 빨대만 쪽쪽 빨다가 빈 컵을 빨아들이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며 입술을 떼었다. 하지만 여전히 바깥을 바라보는 명수였다.
“무슨 생각, 하냐?”
채윤처럼 눈치가 없는 지태는 답답함을 못 이기고 물었다. 명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무섭다는 생각.”
“무섭다고?”
명수는 정말로 무서웠다. 단유 없이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금방 일어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단유는 깨지 않았고, 점점 가슴속에서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하은에게는 자신있게 금방 일어난다고, 지금은 마치 죽은 듯이 누워있지만 금방,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날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가슴 속에서는 불신과 두려움이 커졌다. 자신에 대한 불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토록 선명히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명수는 단유의 병실로 가기가 두려워졌다.
명수가 홀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싸우는 동안, 담당 의사가 오후 문진을 시작했다.
단유의 몸에 부착된 각종 기계들을 살피고, 단유의 안색 등을 보더니 돌아선다. 하은은 뭔가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말이 건네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담당의는 건넬 말이 없었다. 10여 일이 지나는 동안 한결같다. 어떤 징조나 변화의 조짐이라도 있다면 그걸 토대로 예측이라도 하겠지만, 환자는 의식을 차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실례하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단유···.”
하은이 병실을 나가려는 의사를 붙잡으려 했지만, 의사의 시선에 담긴 무기력함에 손을 내렸다. 어느 의사가 환자를 살리는 데 소홀할까. 환자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면 의사는 자신의 무능력에 답답함을 느낀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그렇게밖에는 건넬 말이 없다. 어떤 변화라도 있어야 호흡기를 떼던지, 혹은 계속 유지할 것인지를 판단해 볼 텐데, 지금은 어느 것도 쉽지 않다. 특히 환자의 보호자들이 저렇게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면 더더욱 쉽지 않다.
5시를 갓 넘긴 시간인데도 벌써 하늘에 어둠이 찾아들고 있어서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명수도 돌아와서 병실 한쪽의 소파에 앉아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국민 예능이란 타이틀을 놓지 않았던 그 예능 프로그램은 토요일마다 명수를 TV 앞에 앉혔다. 하지만 지금은 TV 안에서 명수가 좋아하던 연예인들이 뻥긋거리며 웃고 떠들고 있어도 명수는 웃지 않았다. 볼륨을 낮춰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니 내용을 몰라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냥 습관적으로, 그리고 애써 시선을 둘 데가 마땅치 않아 TV를 바라볼 뿐인 명수였다.
나윤은 한결같이 단유의 손을 쥐고 있었다. 때로는 단유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하지만, 주로 단유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는 마음과, 자신의 온기를 느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섞여 있었다.
그때, 나윤의 손에 미세한 느낌이 느껴졌다. 너무나 미약해서 혹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사실 이제껏 단유의 손을 잡고 있다 보면 가끔 그런 느낌을 느낄 때가 있었다. 몇 번은 그 느낌에 놀라 의사, 간호사를 부르기도 했었다.
다시 한번 손에 느낌이 왔다. 조금 전보다 더 세게 쥐는 느낌이었다. 나윤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아직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괜히 설레발을 치다가 의사가 들어와, 마치 선고를 내리는 판사 모양으로 ‘아닙니다’라고 선언하는 진단을 듣고 싶지 않았다.
‘눈을 떠!’
차라리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랐다. 깊고 따뜻한 눈빛을 다시 봐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나윤은 단유의 손을 힘껏 쥐었다. 그에 맞춰 나윤의 손을 부드럽게 말아지는 손. 나윤의 눈이 커지며 입술이 벌어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단유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반개한 눈 속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씩 초점을 찾더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선이 옆으로 움직이며 나윤을 찾는다.
“다, 단유야.”
나윤의 목소리에 TV를 보던 명수의 고개가 돌려졌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나윤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명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단유의 눈동자가 나윤의 눈을 찾았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그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린다. 그리고 얼굴이 빨갛게 부으며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호흡기를 달아놓은 상태라 자가 호흡이 되는 순간,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며, 명수야! 의사, 의사 선생님!”
천천히 다가오던 명수가 머뭇거리다 얼른 병실 밖으로 뛰어갔다. 병실을 나서자마자 ‘의사 선생님! 간호사님!’을 외치는 명수의 목소리에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단유는 기침하며 눈을 찡그리다가도 억지로 눈을 떠서 나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윤의 손을 꼭 쥐었다.
‘울지 마요.’
마치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걸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