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54화 (454/956)

스스로 긋는 한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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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람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그렇지 않아.”

단유는 사내의 말을 부정했다.

“난 내게 악의를 드러냈던 이들에게도, 나를 해치려 했던 이들에게도 도망가지 않았어.”

“그래서, 용감하다는 소리라도 듣고 싶은 건가?”

비웃는 듯한 사내의 말에 단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넌 네게 악의를 보내는 이들이 더 상대하기 편하지? 그들의 악의에 맞서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네게 호의적인 감정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대했더라?”

호의적인 감정을 보낸 이들. 명수, 하은, 지태, 채윤, 그리고 나윤. 그들에게 자신은 어떻게 대했냐고?

“넌 그들의 호의를 늘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어? 그래서 늘 거리를 두고 있었지. 애써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도망갈 곳을 찾고 있었고.”

‘내가 도망을 가려 했다고?’

“사람은 누구나 상대에게 기대하기 마련이지. 부모에게든, 자식에게든, 친구에게든, 혹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기대하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상대가 이렇게 반응해주길 바란다는 기대를 가지기 마련이지. 넌 어땠어? 넌 그 사람들에게 어떤 기대를 했었지?”

“그건 억지야.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라는 것도 있어.”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우습지. ‘사랑’이라고? ‘사랑’이 뭔데?”

단유는 이를 악물면서 주변 사람들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다. 보육원에서 ‘같이 축구하자’며 자신을 방에서 끌어내던 명수의 웃음. 단유의 농담에 같이 어울리며 익살맞게 미소 짓던 하은. 등굣길에서도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별것 아닌 일에도 웃음을 터뜨리던 지태. 조용히 곁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던 채윤. 그리고, 코앞에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해’라고 고백하던 나윤. 붉게 상기된 얼굴과 그보다 더 빨간 입술.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되돌려도 그 사람들에게 단유 본인이 무엇을 했던 가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네가 말하는 사랑이 설마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이기적’이라는 수식어도 곁들여야겠네.”

다시금 비웃듯 놀려대는 사내의 말에 단유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아니야!”

“아니면?”

“······.”

“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걸 두려워해. 그리고 그 사랑을 부담스러워해. 그래서 늘 피하려고 하지. 제토를 봐봐. 제토, 그 불쌍한 아이는 모처럼 생긴 친구가 반가워서 늘 네 결을 맴돌았지만, 이런. 넌 그 아이의 호의가 부담스러워서 대장간으로, 목공방으로 도망 다녔지. 그러다 공방 사람들이 너에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서려 하니, 이런. 넌 이번엔 아예 마을에서 벗어나겠다고 하지 않느냐?”

“틀렸어. 그런 마음으로, 도망가려는 게 아니었어. 난 그저···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래서 떠나려는 거야. 계속 머무르면 욕심이 생기니까.”

“그 말이야. 욕심.”

사내의 웃음소리가 섞여 나온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지금까지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 많은 날들이 지나는 와중에도 말이야? ···넌 그저 적당히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핑계만 찾아다녔던 거야. 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많아지니 부담스러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고, 이제 다시 기대가 높아지니 떠나겠다고 선언하며 도망치는 거야. 너에게 기대를 갖는 사람이 두렵고,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것 같아 두렵지. 상대가 널 사랑하는 만큼, 넌 상대를 사랑해줄 자신이 없으니 두렵지. 넌, 그래서 사람이 두려운 거야.”

“틀렸어!”

“넌 오히려 너에게 악의를 갖는 이가 상대하기 편해. 그들을 없애버릴 명분이 있으니까, 마음껏 손을 쓰는 거지.”

“그렇지 않아!”

“범죄자.”

“아냐!”

“기만자.”

“아니라고!”

“위선자.”

“······.”

단유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주제에 감히 절대자의 자리를 넘봐? 진리를 연구하겠다고? 웃기고 있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진리를 깨닫겠다는 거지?”

“···너 누구야.”

“나? 내가 과연 누구일까?”

단유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망토를 펄럭거리는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악의? 그런 것도 없다. 그는 그저 단유를 놀리며 즐길 뿐이었다.

“정체가 뭐야?”

“넌 정체가 뭔데?”

사내의 되물음에 단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정말 도망치기만 했던 걸까?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단유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사내의 웃음소리가 커져만 갔다.

****

단유는 꿈을 꿨다. 그 꿈에서 단유는 아주 어린 아이였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을 새도 없이 숲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쫓기는 걸까? 아니. 단유는 지금 돌아가고 있었다. 집으로. 어머니와 동생이 기다리는 집으로. 어머니는 돌아온 단유를 향해 미소를 지을 것이며, 동생은 혼자 내버려 두고 갔다고 칭얼거릴 것이다.

빨리 돌아가 어머니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고, 칭얼거리는 동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달래야 할 것이다. 눈앞에 익숙한 언덕이 보인다. 숲이 끝나는 자리에서 솟아오른 언덕을 넘으면 마을이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분주한 모습이 보인다. 뛰어가는 단유를 향해 손을 흔들고, 넘어진다며 걱정해준다.

마을의 꼬불꼬불한 길을 가로질러 익숙한 낡은 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굴뚝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고, 들창이 열린 틈으로 빵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외친다. ‘엄마’.

두건을 둘러쓴 어머니가 화덕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을 넣다가 돌아보며 웃는다.

‘왔니?’

‘다녀왔어요, 엄마!’

식탁 근처에서 쪼그리고 앉아 나무 장난감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있던 동생이 쪼르르 다가와 묻는다.

‘왜 이제 와?’

‘빨리 오려고 했는데, 숲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래. 많이 기다렸어?’

어머니가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단유에게 다가왔다.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네며 묻는다.

‘깊이 들어가지 마라니까.’

‘그래도 거기가 쓸만한 장작들이 많이 나오는걸요. 숲 가장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가서 가져올 게 별로 없거든요.’

‘고생이 많았다, 우리 아들.’

‘물 떠올까요?’

‘괜찮아, 쉬고 있어. 엄마가 떠 올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떠 올게요.’

단유는 메고 있던 가방을 벽 한쪽에 세워두고는 그 옆에 놓여 있던 물통을 들었다.

‘금방 갔다 올게요.’

‘서두르지 마. 다쳐.’

‘네!’

단유는 웃음을 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진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의 태양 빛이 이렇게 환할 리가 없는데.

“너랑 계속 이야기 나누고 싶어.”

익숙한 목소리가 빛을 뚫고 들렸다.

‘예, 저도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전화도 좋지만, 자주 만나고 싶어.”

‘저도 자주 만나고 싶어요. 정말.’

피하지 않을 거예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제대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귀 기울여 보고 싶어요. 그래야 할 거 같아요.

“너, 나랑 사귀자.”

덜컥. 단유의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이다.

‘안 돼. 피하지 마.’

자신에게 강하게 주문을 걸어본다. 상대의 진심으로부터 눈 돌리지 마. 할 수 있어, 넌.

“떠날 거야? 이대로?”

대답이 없는 단유에게 채근하는 듯한 목소리. 단유는 주먹을 쥐고 소리를 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두렵냐고? 두렵다. 떠날까 봐. 홀로 내버려 두고 먼저 떠날까 봐. 사라질까 봐 두렵다. 그러니 그들이 떠나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것이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기며 떠나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방법이다. 서로 상처 입지 않아도 된다.

“거봐. 넌 욕심쟁이라니까. 상대에게 사랑받고 싶고, 기대받고 싶고. 그러면서 자기는 사랑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아. 이 무슨 불공평한 관계란 말이냐?”

단유는 망토의 사내와 마주 보았다. 후드 속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였구나.”

망토의 사내가 미소를 짓는다.

“루치드.”

사내, 루치드가 미소를 짓는다.

“난 또. 내 이름 잊은 줄 알았어.”

“잊지 않았어.”

“새벽 동살이 비추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겠지. 지난 밤의 악몽은 잊어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겠지. 하지만 악몽은 언제나 너의 꿈을 지배할 거야.”

“루치드(Lucid).”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쇠가 단단해지도록 만들 듯, 넌 너 자신을 매일같이 두드리고 몰아붙이겠지. 마침내 쇠가 모양을 잡듯 넌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만나겠지. 하지만 거기에 미래는 없을 거야.”

“김단유(金鍛侑).”

이름을 읊는 순간, 그리고 그 이름의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단유는 사내와 하나가 되었다.

****

병실의 문이 열리며 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비비며 들어온 하은은 곧 단유 옆에 앉은 사람을 발견했다. 쓸쓸한 표정으로 단유의 손을 쥐고 있는 소녀, 나윤이었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니?”

“아, 언니.”

나윤이 얼른 손을 떼고 일어나 하은에게 고개를 숙였다.

“단유는 어때?”

“···똑같아요.”

1인실에 들어온 지 벌써 12일이 넘었다. 열흘 넘게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단유를 보며, 의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가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들도 어떤 수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단유가 어떠냐 묻는 건, 그냥 인사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찾아와서 단유의 손을 붙잡아주는 나윤과 하은에게는 다른 의미다.

단유는 ‘기적’과도 같은 아이였다. 늘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늘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리라. 나윤은 그렇게 믿으며 잡은 손을 꼭 쥐었다.

‘이렇게 따뜻한데.’

누가 보면, 몇십 년이라도 사귄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윤의 마음에서 단유는 평생을 지켜보며 곁에 머물고픈 사람이었다. 어쩌면 어린 치기에서 오는 어설픈 연애 감정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 회사에서 무슨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었니?”

하은이 소독한 손으로 단유의 머리를 짚으며 다시 물었다.

“오전에 빨리 끝냈어요.”

“···혹시 단유 때문에 이야기 나온 건 아니고?”

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단유가 쓰러지고 놀란 나윤이 3일간을 단유 곁에 머무르면서 회사에서도 단유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비밀로 하고 싶던 관계도 아니었기에 나윤은 회사에 정직하게 밝혔다. 아니, 밝힐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회사만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학교도 3일을 빠졌으니까.

비록 나윤이 지금은 거의 준 연습생 수준으로 취급받고는 있지만, 엄연히 데뷔했었던 가수이고 대중들에게도 꽤 얼굴이 팔린 ‘연예인’이다. 그런 나윤이 회사 모르게 연애를 했었다는 사실도 펄쩍 뛸 일이지만, 상대가 혼수상태에 빠져 병실에 있다는 스토리도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미성년자 아닌가. 회사의 관리 책임이 도마 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여겨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그나마 하은이 나윤을 말려 병원에서 밤을 새우지 못하게 한 덕분에 학교에는 등교했지만, 그 이후엔 회사 대신 병원으로 향하는 나윤이었다.

긴급히 회사 실무진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한 뒤, 나윤을 불렀다.

“가수 안 할 거야?”

“······.”

“가수 계속 할 뜻이 있으면, 당장 병원 가는 짓은 그만둬. 니가 의사도 아니고 거길 매일 가서 어쩌겠다는 거야? 소문이라도 나면 안 좋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혼자 둘 수 없어요.”

“걔가 왜 혼자야? 우리가 걔를 몰라? 너 아니라도 간호해 줄 사람 있고, 걱정해 줄 사람 있어. 네가 왜 그 난리를 쳐? 병원에서 네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그 뒤에 생길 소문들은 걱정 안 되니?”

“그런 건 걱정 안 해요. 저랑 단유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걱정을 해요?”

“네가 아무리 잘못을 안 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볼 거야.”

“왜요?”

“그게 대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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