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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452화 (452/956)

스스로 긋는 한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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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이 파릇하니 돋아나고 겨우내 보이지 않던 종류의 새들이 아침마다 울어댔다. 살얼음이 끼던 개천도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개천 주위의 바위틈에서 하얗게 얼어있던 눈들도 녹아서 사라졌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개천 주위의 작은 모래 알갱이들 사이로 이슬 맺힌 푸른 풀잎들 위로 단유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아직은 서늘한 아침 바람이 남아있던 잠기운을 말끔히 씻어내 주었다.

개천의 차가운 물로 세수한 단유는 가볍게 몸을 푼 뒤,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동’

단유가 있던 자리에 얕은 발자국만 남았다.

마을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공방에 먼저 들른 단유는 이른 아침부터 공방에 출근한 에렘을 볼 수 있었다.

“어? 벌써 왔어?”

“네. 잘 주무셨어요?”

“나야 잘 잤지.”

에렘은 새벽부터 공방으로 나와서 석탄 더미를 체크하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해도, 만일을 모른다며 매일같이 아침에 나와서 석탄 보관 상태를 확인하는 에렘이었다. 사실 단유도 주의를 주긴 했지만, 광물 상태의 석탄을 보관하는 방법이나 보관 시의 유의사항을 잘 알진 못했다. 그저 이론으로만 석탄의 산화를 예측해서 말했을 뿐이니까. 그러니 에렘처럼 경각심을 갖는 자세가 나쁘진 않으리라.

“아, 이왕 온 김에 확인해봐.”

에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어제까지 만들었던 부품들이었다. 조립도까지 만들어주긴 했지만, 우선은 정밀 부품 제작이 우선이라 생각해서 부품만 만들어두고 단유에게 확인을 받는 상황이다.

“연마석을 더 구해야겠어.”

“다 썼어요?”

“질이 더 좋은 연마석을 구해야지, 안 그러면 부품 하나 만들 때마다 연마석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정밀한 가공을 위해 연마석은 필수였다. 아직까지는 순철을 생산할 기술도 없고, 강철(鋼鐵)이라고 해도 현대의 기준에 들어맞는 수준엔 이르지 못해서 불순물이 많다 보니 주형(鑄型)에서 뽑아낸 주물도 정밀함에 많이 못 미친다. 이를 가공으로 해결하기 위해 가론 공방의 사람들은 연마석을 이용해 철을 다듬었다.

특히 에렘은 이런 부분에서 꽤 철저해서 단유가 제시한 규격을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연마석이 남아나질 않는다.

“연구할 게 너무 많아. 석탄도 공부해야 하고, 연마석 제작 방법도 공부해야 하고, 철도 그렇고. 도대체 네가 살던 곳은 어떻게 이런 걸 모두 알고 만든다니?”

단유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시간이 답이죠.”

“시간?”

“시간을 들인 만큼 결과가 나오니까요. 실패든 성공이든 그런 경험들이 누적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그 지식을 고스란히 전달하면 자연스럽게 기술도 발전하죠.”

“시간이라.”

단유는 공방의 창으로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 중앙에 짓기 시작한 높은 탑 모양의 건축물. 향후에 시계탑으로 불릴 건물의 기초작업이 진행 중에 있었다.

마침 석탄을 보관하던 상자의 뚜껑을 덮고 단유 옆으로 다가온 에렘이 같은 방향을 보며 물었다.

“시계탑, 아니 시계가 있으면 생활이 편리해질까?”

단유가 이제껏 만들었던 모든 기술들이 삶의 편리를 위한 제품들이었다. 그래서 에렘도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그렇게 이해했고 기술 발전에 천착(穿鑿)했다.

“시계가 있으면, 삶이 바뀔 거예요. 불이 삶을 바꿨듯.”

단유는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에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 만들어졌어요, 이것들.”

“그래? 다행이구나.”

단유는 에렘의 얼굴이 매번 볼 때마다 야위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겠지. 매일 저녁 목공까지 배우고 집에 가서 다시 일지를 정리한다고 들었다.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공방으로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니 피곤할 것이다.

“재미있으세요?”

“재밌냐고? 당연하지. 내 평생에 이토록 즐거운 날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철이나 두드리고 숫돌로 칼날이나 갈고 있었다면 전혀 느끼지 못할 일들 아니냐. 지금도 머릿속에는 지금 이 부품들을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마치 단유가 처음 학문을 접하고 수학의 묘미에 빠져 밤낮없이 숫자만 생각하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생각은 생각이고 우선 밥이라도 먹어야겠어. 밥 안 먹었지? 같이 가서 밥이나 먹자.”

“네.”

에렘은 단유를 데리고 마을로 향했다. 가기 전, 마을 사람들에게 주문받아 만든 몇 가지 물품들을 수레에 담아서 끌었다. 단유는 수레의 뒤를 밀어주며 마을로 향했다. 공방에서 마을 중심부까지 벽돌로 길을 만들어 둔 터라 수레를 끄는 일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에드 아저씨네에 가 있을래? 난 아잘 아저씨네에 가서 이거 전해주고 올게. 아, 그리고 혹시 거기 우리 아버지 계시면 아침부터 술은 마시지 말라고 전해줘. 날이 풀린 김에 광산에 가자고 했었는데, 술 드시면 먼 길 가기 힘드니까.”

“알겠어요.”

비록 공방을 키우고 시계탑에 들어갈 부품들을 제작하는 데 힘을 쏟는다 해도 대장간 본래의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의 제작도 겸하고 있었다. 원래의 대장간은 벽돌 공방으로 바뀌어서 사용되고 있었기에, 만들어진 제품은 아잘이 위탁 판매 형식으로 물건을 받아 팔고 있었다.

에드의 가게로 향한 단유는 가론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가론의 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었다.

“아저씨.”

“오, 루치드 왔구나. 뭐? 맥주? 괜찮아. 한 잔 정도는.”

“오늘 광산 가보신다면서요?”

“에렘에게 들었나 보구나. 날이 풀린 김에 한 번 가볼까 생각하기도 했고, 또 거기서 일하는 친구에게서 솔깃한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말이야.”

“솔깃한 이야기라니요?”

“석탄도 아니고 돌도 아닌 광석이 나왔다는데 한 번 봐달라고 하더라고.”

“석탄 나오던 탄광에서요?”

“아니, 거긴 아니고 그 옆인데, 우연히 돌아다니다 발견했나 봐. 혹시 아냐? 거기서 철광석이라도 나올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단유는 웃으며 가론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때 앞치마를 걸친 에드가 단유 앞에 갓 구운 빵 하나와 감자 수프 한 접시를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에드가 북슬북슬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있다가 갈 때 빵 한 바구니 줄 테니 그걸 노인 회관에 좀 가져다주겠느냐?”

“그럴게요.”

“고맙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은 공짜다.”

에드의 눈이 호선을 그리더니 금방 몸을 돌려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봐, 에드! 나도 심부름 하나 해 줄 테니 점심 공짜로 한 끼 안 되나?”

“자네가 우리 집 주방 화덕을 만들어주길 했나, 가게 의자를 고쳐주길 했나? 안 했으면 말을 마.”

“에이, 저 사람. 농담도 못 해?”

단유는 주고받는 훈훈한 대화를 흘려들으며 수프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걸쭉하면서 고소한 감자 수프의 따뜻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안녕하세요, 에드 아저씨 심부름 왔어요.”

“아, 너로구나.”

어르신 한 분이 고개만 들어 단유를 확인하고는 다시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 방 한쪽에 놓여있던 소파에 앉아 종이철을 들추며 뭔가를 확인하던 촌장 에저가 단유를 보고 손짓을 했다. 단유는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벽 한쪽의 선반 위에 가져온 바구니를 올려두고 에저에게로 향했다.

지난겨울 동안 워낙에 많은 일이 벌어지면서 고심한 탓인지,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한결 깊어진 것 같았다.

“이틀 뒤, 마을을 나갈 때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면서?”

마을 바깥에도 눈이 많이 녹은 터라 다른 마을로 가는 길이 열렸을 것이다. 그때에 맞춰 큰 마을로 나가서 물건을 사고팔 계획이라는 아잘의 이야기를 듣고 단유가 부탁을 했었다.

“네.”

에저는 한동안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종이들을 정리해서 소파 옆에 내려둔 에저가 단유를 돌아보았다.

“떠날 생각인 것이냐?”

단유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지난 밤에 가론과 잠시 시계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들었다. 가론은 니가 곧 떠날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구나.”

“가론 아저씨가요?”

어쩌면 최근 가장 오래 붙어 지냈던 이가 가론이기에 단유의 속내를 바로 읽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애초부터 단유가 이 마을에서 오래 머무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놀이방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았고, 누군가가 고마움의 사례로 무언갈 주겠다고 해도 받지 않았다. 당장에 허기를 채울 먹거리 정도라면 받았지만, 그 외에는 옷이나 신발, 혹은 기타 가재도구들은 일절 받질 않았다. 물론 그렇게 받지 않아도 놀이방에 쌓이고는 있었다. 하지만 다 남겨두고 갈 것들뿐이었다.

“도무지 모르겠구나. 이만큼 살다 보니 어지간한 사람 속은 눈만 봐도 알겠다 여기며 살았건만, 너란 아이는 도저히 모르겠어.”

얕은 숨을 뱉으며 에저가 고개를 젓는다. 단유는 단지 지식이 없을 뿐, 연륜으로 쌓인 지혜를 한가득 담은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비록 이런 작은 마을에 있어도 조그만 욕심 때문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부분은 이타적이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친구이고 삼촌이고 이모니까. 옆 사람이 굶으면 빵조각이라도 떼어낼 줄 사람들이다. 앞집의 사람이 아프면 밤새 간호해줄 정도로 정이 깊다. 그럼에도 사람은 이기적이지. 자신에게 아무런 이유가 없다면 절대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에저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얕게 코를 고는 노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마을의 질서란 그런 것이다. 서로의 이기심을 이해하며 적당히 배려해주는 것. 그러면서도 이웃을 위해, 마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마을 사람들이다.”

에저는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넌 오롯이 이타적이기만 하구나.”

“그렇지 않아요.”

“내가 비록 니가 만들려 했던 것들에 대해, 니가 가져오려 했던 변화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긴 했지만, 자전거나 벽돌이나 하는 것들이 얼마나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르지 않아. 아마 이번에 두 수레에 벽돌을 가득 담아내놓으면 두 수레 가득히 곡식과 옷감을 채우고도 주머니를 두둑이 채울 돈을 벌어올 게 분명하다. 니가 만든 자전거나 마차라는 것도 아마도 높으신 분들이 서로 가지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다. 그런 걸 만들고도 아무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마을 공방 사람들에게 전한 지식의 가치는 더 크겠지. 그런데도 넌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떠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런 건 마을 사람, 아니 내 손자라고 해도 하지 않을 짓이야.”

그럴지도. 그런데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것이?

“그래서 너에 대해서 내가 보지 못한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에저가 옆에 뒀던 서류들을 집어 흔들어 보였다.

“가만 보니 네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네게 받은 호의에 감사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해.”

마을을 오가다가 틈틈이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도움을 준 바가 있었다.

“넌 이 마을에서 뭘 하려고 했던 것이며, 뭘 했던 것이냐?”

과학 실험? 마을 발전? 새마을 운동? 어떤 대답도 단유의 속내와는 거리가 멀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았어요.”

“아이들?”

그 아이들을 위해 ‘놀이방’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익히 아는 바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편을 갈라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죠.”

요즘은 그 아이들이 전쟁놀이 대신 단유가 가르쳐 준 놀이를 하느라고 바쁘다는 것을 에저도 알고 있다.

“그 아이들에게 미래를 주고 싶었어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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