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긋는 한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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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삭용 선반은 정밀가공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가론이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낼지는 알 수 없으나, 에렘이라면 다양한 실험과 상상력을 통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시계탑 부품이요.”
다시 건넨 종이에는 복잡한 모양의 부품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고, 각각의 치수가 그려져 있어 가론은 보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다만 론은 이러한 방식의 설계도에 익숙해선지 보면서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건 우리 시계에 들어가지 않던 모양 같은데?”
“이건 태엽이라고 얇은 철판을 둥글게 말아놓은 모양인데, 이 태엽이 돌아가는 힘을 동력으로 삼기에 적당하거든요.”
물론 이렇게 일정하게 얇은 철판을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의 공방에서는 조금만 신경을 쓰면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유는 시계의 설계도를 보며 설명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돌아가도록 했는데, 사실 직접 만들어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저도 모르겠어요.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거든요.”
“뭐, 어쨌든 해보면 알겠지.”
가론이 뭐 대수냐는 듯, 에렘에게 설계도를 건넸다. 겨울 동안 아들과 함께 이것저것 실험하면서, 가론은 아들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아들은 자신보다 훨씬 더 쉽게 단유의 설명을 알아들을 뿐 아니라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상상해내는 창의력도 보였다.
“우선은 남은 철들로 강철 제품을 만들고요, 그것을 팔아서 더 많은 철광석들을 사와야 합니다.”
에렘이 설계도를 수습하며 말하자, 가론과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루치드, 나는 어디 팔 만한 게 없을까?”
론은 벌써 도르래 장치를 만들어 팔 계획을 세웠다. 마을의 도르래 뿐만 아니라 기중기에 들어가는 도르래도 목재로 만들었던 탓에 목제 도르래의 활용성은 입증이 된 상태였다. 이를 가지고 가서 장사해도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아잘이었다.
아잘은 여태 가죽 체인과 소파 정도밖에는 자신의 기술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가죽 기술이 앞으로 전혀 쓸모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친구들이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며 기술력을 쌓아나가고 있을 때, 자신은 그저 예전처럼 가죽을 대패로 문지르며 무두질만 하고 있을 뿐이니까.
단유는 아잘의 질문에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가죽은 다른 것 못지않게 꽤 고급스러운 소재, 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현대에서도 천연 가죽 제품은 비싸게 거래되지 않던가. 물론 디자인이나 마감 등의 요소가 중요하긴 하지만 ‘가죽 제품’이란 건 ‘비싼 제품’이란 인식이 단유에게 있었다. 그리고 예전 녹스에 있을 때도 가죽조끼나 망토 등이 비싸게 거래되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굳이 가죽 공방에서 특별한 기술을 이용한 제품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 이야기를 줄여 이야기했더니 아잘이 조금 낙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지금 하는 거랑 별 차이가 없는 거구나.”
도구의 손잡이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가죽을 감거나, 늘 만들던 조끼나 장갑, 신발을 만드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제가 가죽 만드는 걸 잘 몰라서 그런 거니까, 한번 견학해봐도 될까요?”
혹시 보다 보면 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단유의 말에 아잘이 흔쾌히 허락했다.
가죽의 무두질은 그냥 대패로 털을 미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가죽을 벗기면 때로 불필요한 부분들―이를테면 지방질이나 단백질―이 붙어서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런 부분을 일일이 칼로 떼어나고 불로 지져서 없애야 한다. 그리고 나서 털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때는 나무뿌리에서 채취한 용액으로 털을 제거한다. 오랜 시간 가죽을 절여 놓으면 털이 녹아 빠진다.
털까지 빠지고 나면 가죽의 흠결이 선명히 드러난다. 물론 제모 이전에 가죽의 상태를 보고 급을 정하기도 하지만, 제모 후에 드러나는 것들, 이를테면 똥 부스러기에 변색이나 변질이 된 부분, 진드기 자국, 쇠파리 종기 구멍 등이 선명히 드러난다. 더러 사냥 시에 긁힌 자국과 억지로 털이 뜯기며 생긴 구멍이 선명하다.
“이렇게 흠이 많은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기 어려워. 그래서 보통은 신발을 만들거나, 일부분을 잘라내서 조각으로 사용하지.”
표피층과 조직층을 칼과 대패로 분리한 뒤, 뜨거운 물에 끓인다. 가죽의 비릿한 냄새를 없애는 작업이었다. 이후 망치로 두드려서 가죽을 연하게 만든다.
“그냥 가죽을 오래 두면 쉽게 썩기도 하지만, 물이 닿으면 가죽이 늘어나고 마르면 딱딱해져서 굳기 때문에 사용하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이렇게 두드리는 작업이 필수지.”
이를테면 가죽 안의 수분을 짜내는 작업이었다. 끓이고 짜고 펴고 말리는 작업을 수차례 반복하면 가죽은 연하되 냄새는 나지 않고, 수분이 없어 변질이 쉽게 일어나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죽 위에 또 다른 나무 기름을 바른다.
“이 기름을 바르면 처음의 가죽에서 보였던 자국들의 상당수가 가려지거든. 없어지진 않지만 덜 눈에 띄게 하는 거야.”
이후에 사용이 가능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가죽이 완성되면 장인의 손에서 제품으로 디자인되어 만들어진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손도 많이 가네요.”
“그럼. 사실 가죽은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지.”
아잘은 진열대 위에 놓인 가죽 장갑을 들어 올리며 뿌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단유는 그 웃음을 보다가 공방 안을 다시 돌아보았다.
“여기는 아예 지붕을 없앴군요.”
“대장간 못지않게 냄새가 지독하니까.”
가죽 원피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도 냄새지만, 무두질 과정에서 수분을 짜내기 위해 두드릴 때 가죽에서 온갖 냄새가 다 풍겨 올라온다. 그래서 환기는 필수였다.
단유는 턱밑을 긁적이다가 아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가죽 제품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기껏해야 장갑이나 소파 정도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네요.”
대장간에서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에 아잘이 별수 없나, 라는 듯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들이 있는데, 이걸 기계의 힘을 빌려서 줄이면 좋지 않을까요?”
“기계의 힘? 어떻게 말이냐?”
단유는 당장에 생각나는 것만 몇 가지 언급했다.
“예를 들면, 가마솥에 가죽들을 집어넣을 때요, 저렇게 많이 넣고 뺄 거면 기중기 같은 장치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밑에 이런 넓적한 판을 만들고 그 판을 기중기에 연결하면요···판 위에 가죽들을 적재해서 한꺼번에 용액에 넣고 빼는 게 가능해지겠죠.”
“오호라.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 응용하는 법이 있어!”
아잘이 손뼉을 칠 때, 단유가 덧붙였다.
“대장간에도 소형 도르래 장치 만들어 둔 거 보셨죠? 그것도 무거운 주물을 옮길 때 쓰려고 만든 거니까, 그거랑 비슷하게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그리고 가죽의 수분을 뺏기 위해 망치를 두드리잖아요? 이걸 기계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단유는 당장 몇 개의 톱니바퀴와 체인으로 연결된 기계를 구상해냈다.
“옆의 손잡이를 돌리면 여기서 힘을 전달하고, 이 힘이 여기까지 오면 여기 달린 망치를 아래로 내려찍는 거예요. 밑판이 돌아가도록 설계만 해놓으면 한 손으론 손잡이를 돌리고, 한 손으로는 밑판을 돌리는 거죠.”
“그냥 손잡이를 돌리기만 해도 망치가 알아서 가죽을 찧어줄 테니까 무거운 망치를 들 필요가 없겠구나!”
그림을 그려놓고 보니 그것이 마치 구형 재봉틀 같은 모양새라 여겨졌다. 옛날 재봉틀도 손잡이를 돌리면 바늘이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실을 꿰던 방식 아니던가?
단유는 일단 상념을 지우고 마저 설명했다.
“마지막에 가죽을 펼 때는 이런 거대한 ‘롤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한쪽에 가죽을 넣고 돌리면 거대한 롤러가 가죽을 압착해서 가죽을 연하게 하는 작업을 돕는 거죠.”
“어서 만들자! 어서!”
아잘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예전이라면 이런 기계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터였지만, 지금과 같은 공방이라면 만드는 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이참에 재봉틀도 만들어?’
산업 혁명 당시 획기적인 아이템이었던 재봉틀은 대한민국에서는 60년대와 70년대, 가혹한 노동 현실을 상징하는 물건처럼 변했다고 배웠다. 만약 만든다면 과연 이 시대에도 재봉틀은 사람들을 가혹한 노동 현장으로 몰아넣는 기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로 발돋움하는 아이템으로 기억될 것인가?
철제 톱니바퀴를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의 협조가 필요했다. 론은 나무로 목각 틀을 만들었고, 아잘은 가죽 장갑과 가죽 작업복을 만들어 가론에게 주었다. 가론은 목각 틀을 이용해 주형(鑄型)을 만들고, 주형에 쇳물을 부어 톱니바퀴 주물(鑄物)을 만들어냈다. 세밀하게 다듬는 작업을 끝내고 보니 괜찮은 기어(gear)가 만들어졌다.
“이런 바퀴라면 정말 부서질 염려가 없겠구나!”
론이 감탄하며 만들어진 기어를 만져보고 두드렸다. 가론 역시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자신도 이런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만들어진 기어는 절삭용 기계에 들어갈 부품이었다. 이런 기어를 몇 개 더 만들어 수동식 절삭용 기구를 만들면 단순히 절삭뿐만 아니라 다듬는 작업에도 응용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맷돌을 달고 돌리면 원형 제품의 겉면을 깔끔하게 다듬을 수 있겠네요.”
에렘이 바로 기구의 응용법을 캐치해냈다. 에렘은 보기 드문 인재였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 작동원리를 논리적으로 파악한 뒤, 그 원리를 응용해서 다른 기계 장치를 상상할 수 있으니 타고난 장인이자 발명가라 하겠다.
최근 에렘은 저녁을 먹은 뒤 목재 공방으로 가서 론에게 목재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제품들을 제작할 때 목각틀이 필요할 텐데, 그때마다 론에게 부탁하기가 어려우니 자신이 직접 목재를 다루는 법을 익혀보려는 것이었다. 론도 에렘의 그런 열정을 높이 사서 저녁 늦게까지라도 에렘을 가르치는 일에 성의를 보였다.
겨울의 막바지에 마을의 공사들이 대부분 끝이 났다. 공사 기간 중에 만들어진 기중기와 벽돌 등이 공기(工期)를 단축하는 데 도움을 줬다. 어른신들과의 마찰로 갈등을 빚었던 젊은이들이 대부분 마을로 돌아온 것도 큰 역할을 했다. 한 달이 넘게 산을 누볐음에도 금이 나오지 않자 시들해진 것도 원인 중의 하나겠다.
어르신들은 겨울이 다 가고 추위가 거의 가셨음에도 아침마다 노인 회관으로 출근해서 뜨거운 온돌에 몸을 데웠다. 마을의 길들은 몇몇 작은 골목길은 제외하고 큰길을 모두 벽돌로 포장했더니 거리가 깨끗해지기도 했고 통행이 한결 편해졌다.
또 이전의 대장간을 벽돌 제조 공방으로 바꿔서 계속 벽돌이 공급되도록 했다. 자기 집 앞 골목길을 벽돌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개별적으로 벽돌을 구매해 바꿔나갔다.
금을 찾으러 갔던 사람은 대부분 마을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금광 대신 석탄으로 자리를 옮겨서 일했다. 석탄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겨울이 거의 다 지났지만, 불은 계절을 가려 사용하는 것이 아니니 나무보다 더 화력이 좋은 석탄의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론은 도르래와 노끈을 이용한 장치를 여러 벌 만들었다. 노끈의 길이만 조절하면 어디에라도 달아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았다. 당장 마을에서는 이를 개별적으로 사용할 이가 없었지만, 애초 외부 마을에 가져다 팔 생각이었기 때문에 론은 봄맞이 상행에 직접 참여해서 기회만 닿는다면 기중기 제작도 역시 팔아볼 생각을 했다.
“수익이 나면 너에게도 나눠주마.”
론의 이야기에 단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온전히 이 마을의 것이에요. 저한테 주실 필요 없어요.”
“그럴 수야 있나? 너한테 얻은 것이 이렇게 많은데 모른 척한다면 천벌을 받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요. 저도 많이 얻었는걸요.”
“혹시 ‘놀이방’을 말하는 것이냐?”
“그것도 있고요.”
단유는 호주머니에 넣어둔 하얀 결정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아!”
단유가 갑자기 탄성을 지르더니 히죽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서요.”
단유는 나중에 보자며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단유가 론에게 무언가를 선물했다.
“뭐냐, 이게?”
“줄 톱이요.”
“톱?”
론이 바라보니 다소 가볍기도 하거니와 톱니 끝부분이 하얗다.
“꽤 쓸만할 거예요.”
어쩐지 창백해 보이는 단유였지만,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워낙 환해서 론은 고맙다는 말로 선물을 건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