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46화 (446/956)

Holy Night(1)

-------------- 446/952 --------------

노인이 바라보니, 말로만 듣던 그 ‘외부인’의 정체가 눈앞의 청년, 아니 소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핏 보면 덩치가 커서, 자신의 막내 아들뻘이라 생각할 수 있었는데 레이도르의 아들과 같은 나이라 했다. 실내에 있어도 어둡지 않아 그의 얼굴을 살피니 과연 동안(童顔)인데 눈에서 형형한 기운이 쏟아지는 것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눈빛의 기운과 달리 얼굴은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이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봤다면 어디서 뒤통수 맞고도 웃으면서 넘겨버릴 아이,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아이가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범이라 생각하니 그저 순박하게만 보이진 않는다.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바라보나 저 속을 누가 알까?

“니가 말로만 듣던, 그놈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어르신.”

다시 한번 머릴 숙여 보이는 아이는 결코 비굴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오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우선 앉으시겠습니까?”

자리를 권하는 소년이었지만 주위 어디에도 의자가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 여기서는 그냥 바닥에 앉는 거예요.”

뒤편에 서 있던 꼬마애 하나가 통통 튀는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기가 찬다. 바닥에 그냥 앉는다고? 그러고 보니 바닥이 여간 따뜻한 게 아니란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어찌 바닥에서 열이 날까? 그 원리가 자못 궁금해진다.

노인이 주춤거리다 허리를 숙이니, 다른 이들도 모두 그에 맞춰 바닥에 앉았다. 그 모습을 흘깃 본 노인이 뒤늦게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바닥에 주저앉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길 즈음, 바닥에서 올라온 열기가 엉덩이를 덥히더니 금세 온몸으로 전달된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식었던 몸이 금방 노곤해지는 게,

“으으.”

절로 기분 좋은 신음소리가 난다. 추태를 부렸다 생각한 노인이 얼굴을 붉힐 때, 꼬마 애들은 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아이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 인 것처럼 보인다.

“어르신, 날이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죠? 저기 데루카 아주머니가 수프를 끓여 놓으셨는데 먼저 한 입 드시죠. 언 몸을 녹이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노인의 뒤에서 아잘이 손짓으로 지시하자, 얼른 아주머니 한 분이 나서서 그릇에 수프를 담아 노인에게 건넸다. 식탁도 없이 또 이렇게 받아드는 꼴이 영 아니다. 머뭇거리는 모양새를 본 단유가 옆에서 작은 나무 둥치를 가져왔다.

“본래는 의자로 쓰려고 만들었던 것인데, 다들 바닥에 앉는 걸 즐기셔서 요즘은 간이 식탁으로 쓰고 있어요. 여기에 받치고 드세요.”

거지꼴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건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일단은 앞에 놓인 나무둥치 모양의 토막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영 숟가락을 떠서 먹기가 곤란했다.

“크흠.”

실내에 있던 이들이 전부 자신만 바라보고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노인의 헛기침에 아잘이 눈치 빠르게 손을 저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물렸다.

“다들 한 그릇씩 드세요. 여태 기다리시느라 드시지 못했잖아요?”

단유가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자 분주하게 그릇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그러는 사이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어렵게 한 입 떠서 마신 수프는 나쁘지 않았다. 마주 앉은 소년은 여전히 껄끄러웠지만, 따뜻한 바닥에 앉아 온기를 느끼며 마시는 따뜻한 수프는 지금이 겨울이란 사실을 잊게 하기 충분했다.

단유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달리 할 말도 없었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저 공손한 태도로 손님을 맞는 주인의 모습만 보여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노인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따뜻한 곳에 앉아 수프는 물론이고 따뜻한 물 한잔으로 입가심까지 하고 나니 주위의 아이들처럼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아잘은 연신 눈치를 보면서도 처음에 단유가 일러준 것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노인이 뭔가를 물어보면 그때야 적절히 대답하되, 일부러 설득한다거나 항변을 하는 태도는 최대한 피해달라는 단유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었다. 혹시 불편하진 않을까 살폈지만, 노인도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조금 곤란한 기색은 보여도,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아서 아잘은 조마조마한 가운데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색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할아버지, 저기 저거 제가 한 거예요.”

“저거?”

“저기 저 벽에 흙도 바르고 돌도 나르고 해서 만들었어요. 제가 애들이랑 같이 만든 거예요.”

“그러냐? 잘했구나.”

“잘 만들었죠? 바람도 안 불죠?”

“그, 그래. 따뜻하구나.”

지켜보던 어른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단유의 배웅을 받은 노인이 자전거 뒤의 마차에 올랐다.

“추우실 텐데 이거 덮으시죠.”

단유는 잘 때 이용하던 담요를 곱게 접어 노인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한 번 단유를 보았다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노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이니, 곧 자전거가 출발했다.

그 노인 이후에도 한 명씩 모시고 와서 수프와 따뜻한 물을 대접했다. 처음의 대접 때는 조금 부실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지, 아주머니들은 쿠키 같은 간식거리들도 직접 만들어와서 찾아온 어르신들에게 드리기도 하고 모인 이들과 다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 촌장인 에저가 방문했다.

“뭐냐? 이런 집을 짓겠다고?”

실내에 들어서기 전, 허름하기 짝이 없는 토벽과 겨울나무로 엉성하게 엮어 올린 지붕을 보고 혀를 차던 에저는 실내에 들어오면서, 다른 이들이 그랬듯, 깜짝 놀란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여름철 뜨거운 태양열에 달궈진 바위가 이럴까 싶은데, 여기는 해가 내리쬐는 곳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마당에 어찌 바닥이 뜨거울까 싶었다. 혹시나 다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칠 때 실내에서 뒹굴거리던 아이들을 보며 안심했다.

“와, 촌장님이다!”

아이들은 ‘촌장 할아버지’를 반기며 뛰어왔다. 마을에서 자주 보던 아이들의 밝은 얼굴을 보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 사라지긴 했다.

“할아버지! 여기 앉아요, 여기. 수프 갖다 줄까요?”

“할아버지! 저기, 저거 우리가 만들었어요. 튼튼하죠?”

다른 노인들이 그랬듯, 어수선한 분주함 가운데 단유와 마주 앉은 에저는 애초 단단히 혼을 내리라 생각했던 것을 실행할 겨를이 없었다. 밖에서 집을 봤을 때의 그 어설픔을 조롱하려던 마음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에 허둥대고 있었다.

“촌장님.”

단유가 입을 열자, 그제야 단유를 바로 의식하게 된 에저였다. 지금까지와 달리 단유는 에저에게만큼은 대화를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예정입니다.”

당분간? 그럼 나중에는 다시 마을에 돌아오겠다는 뜻?

“향후 이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예정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에저가 콧잔등을 씰룩일 때, 곁에서 듣던 다른 이들이 놀란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어딜 간단 말이냐?”

아잘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직 단유에게서 보고 들을 것들이 많다고 여긴 아잘이었다.

“저도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죠.”

그러고 보니 단유가 어디서 온 것인지 들어보지 못했고, 묻지도 않았다.

“그곳이 어딘데? 여기서 먼 곳이냐?”

가까운 곳이라면 자전거를 이용해서 자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멀어요.”

단유는 아잘의 속내를 안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에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저 때문에 불편하셨던 게 있다면 사과드릴게요.”

선수를 치고 나서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에저가 뭔가 반응을 하기 전에 단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촌장님. 시계가 계속 움직이는 것은 시간도 흐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계절이 바뀌고, 낮과 밤이 바뀌듯, 그리고 저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듯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사시사철 변함없을 것 같은 자연도 매분 매초 변하고, 몇천 년이 흘러도 변함없을 것 같은 저 산도 점점 변하죠. 변화는 당연한 겁니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생각이 변하고 기술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이라고 배워왔어요. 촌장님보다 짧은 시간을 살았지만 그런 변화를 보면서 자랐고요.”

“나빠질 게 뻔한데 그걸 두고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무엇이 나빠질까요?”

에저의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술이 씰룩거렸다.

“제가 살던 곳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성장이 없다고요. 아이들의 순수함이 귀엽다고 해서 성장을 멈추게 하는 것이 그릇된 방법이듯, 사람이 더 나은 방향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응원해야 할 일이라고 봐요.”

단유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아잘과 에저, 그 밖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촌장님의 걱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온갖 범죄들이 매일같이 벌어져요. 소소하게는 남의 것을 훔치거나 기만하여 사기를 치거나, 또는 사소한 시비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죠. 심지어는 살인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역시, 라는 표정을 짓는 에저와 두려움을 눈에 담은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남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놓는 이가 있고, 더욱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부르짖는 이도 있어요. 어린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물려주고자 노력하는 부모들이 있고, 이웃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어요.”

에저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꿈을 꾸죠. 미래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꿈꾸고 배우며 노력하고, 어른들은 더 나은 삶을 살려는 방법을 모색하고 연구하며 제가 만들었던 것 이상의 것들을 만들어내죠.”

꿈을 꾼다는 이야기에 에저와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흘깃 쳐다보았다. 여기 모인 아이들 중에는 단유의 이야기가 와 닿지 않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또 어떤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단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촌장님이 타고 오신 자전거 같은 것도 만들었고, 더 나아가 자동차라고, 사람이 한 시간을 걸어갈 길을 불과 몇 분 만에 가는 탈 것도 만들어냈죠.”

아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기구도 만들어냈어요. 수백 명의 사람이 한꺼번 비행기에 올라타 대륙을 건너기도 하지요.”

“거짓말!”

사람들이 감탄사와 믿을 수 없다는 반응 사이를 오갈 때, 에저가 외쳤다. 사람이 하늘을 난다고? 그 반응을 살피며 단유는 차마 ‘우주’를 건넌 이야기까지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까지 하면 아마 자신을 미친 사람 보듯 할 것 같았다. 이미 충분히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중이긴 하지만.

“그런 기구가 있다면 왜 제르아 오마를 건너오지 않는 것이냐? 만약 그런 기구가 있다면 우리가 그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한 번은 봤어야하지 않느냐?”

“제가 살던 곳만큼은 아니어도, 하늘 위로 떠오를 수 있게 하는 기구쯤은 저도 만들 수 있어요. 아니, 여기 기술자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가능하죠.”

원리만 알면 기구쯤이야.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정말?”

“만들자, 응? 나 하늘 구경하고 싶어!”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고, 그다음 아잘이 단유를 채근했다.

“그것이 사실이냐?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게 아니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서 탑승하는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니냐? 어떻게 만들면 되느냐? 자전거보다 어려운 것이냐? 당연히 어렵겠지. 그래도 시간만 들이면 만들 수 있는 것이지?”

단유는 대답 대신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에저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 방법을 알려드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도 그런 기구를 만들 수 있게 될 거예요.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공부가 뒤따르겠지만, 그건 역사의 흐름이에요.”

“역사, 라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