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났네(3)
-------------- 442/952 --------------
“오랜만에 뵙는구려. 한마을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보기 힘들어서야.”
“내가 요새 무릎이 좋질 않아서 바깥나들이를 잘 못 해 그래요. 나중에 날이 풀리고도 나가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오.”
“허허. 언제 날 한 번 잡아서 문진이라도 가야겠구려.”
“이 사람아, 가려면 진작 가볼 일이지 여태 꾸물거렸어?”
“내가 어디 시간이 없어서 못 갔겠나? 겨울이라 쟁여둔 약초가 다 떨어져서 다른 환자도 못 받는구먼.”
“겨울 산에는 약초가 안 난다든가?”
“허, 이 사람. 약초 캐러 갈 시간에 다들 금 캔다고 나갔으니 하는 말일세.”
“아, 거기도 그런가? 자네 아들들도?”
“내 아들이 제일 극성이구만. 금 쪼가리 가져온 게 우리 손자 아닌가.”
“아, 그래? 그럼 그거 진짜 금 맞아?”
“그래. 맞더라고. 작기는 개미 똥만큼 작은데도 금이라 그런지 빛깔이 영롱하더라고.”
“영롱 좋아하시네. 고작 금 쪼가리 때문에 마을이 아주 풍비박산이 나게 생겼는데 무슨 금이란 말인가.”
“풍비박산까지는 아니지 않나? 솔직히 겨울에 일도 없는데 잠깐 짬 내서 보고 오는 게 뭐 어때 그런가. 뒷산보다야 멀지만, 내 아들은 거기서도 땔감을 여럿 주워 오더만. 일거양득 아닌가?”
“이보게, 지금 저 아이들이 겨울이란 핑계로 저렇게 나도는 게 안 보이는가? 만약에 봄이 와서도 금 찾겠다고 나가면 어찌할 셈인가?”
“아, 그거야 그때 돼 봐야 알 일이고. 그리고 만약에 금 찾는답시고 나간다 그러면 그때는 다리를 분질··· 아니지. 그럼 일을 못 하겠구만. 아무튼 봄이 와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일을 미룬다 싶으면 그때 혼구녕을 내도 될 일이지.”
“쯧쯧, 자네는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거야. 내 소싯적에 바깥의 큰 도시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은 안 하고 길에서 구걸하던 거지를 봤더란 말이지. 이 큰 도시에 일거리 하나 못 구하나 의아해하던 중에도 가여워서 동전 몇 개 던져줬더니 냉큼 받아서는 어디로 향하더라고. 그래서 따라가 봤더니···.”
“따라갔더니?”
“아, 그 무슨 도박장 같은 델 들어가더라고. 도박으로 살림 밑천 거덜 내고도 정신을 못 차려서 틈만 나면 달려가는 놈들이 바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꾼들일세. 우리 아들들이 그런 도박꾼마냥 눈이 돌아가면 자네는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잡아야 할 일이야.”
“형님들, 너무 과하신 거 같소.”
“과하다니?”
다른 모인 이들보다 주름이 한 개 정도 적은 노인이 콧잔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도박 따위가 위험하단 거 잘 알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않소?”
그러자 처음 도박장 이야기를 꺼낸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다를 게 뭐냐? 오늘 아침에도 나갔더니 다들 눈을 땡그르르 굴리면서 금 캐겠다고 허겁지겁 달려가는 꼴을 봤는데, 그 눈이 바로 도박에 미친 놈들이랑 같더란 말이야.”
“난 생각이 다르오. 지금 저 아이들이 하는 건 예전에 우리가 산에 귀한 약초가 난다는 말 듣고 허겁지겁 산에 올랐던 일이랑 다를 게 뭐요? 그렇다고 우리가 몇 날 며칠을 산에서 지내기를 했소, 아니면 일을 내팽개치길 했소? 어느 순간 시들해지면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오.”
“그거야말로 경우가 다르지. 그때는 저 집 어르신이 그 약초를 캐오지를 않았더냐? 그 약초가 산등성에 무리 지어 자란다고 하지를 않았더냐? 확실한 근거가 있었으니 잠시 일을 미루고 갈 수 있었던 게다. 그리고 우리 때랑 지금 아들 때랑은 또 다르다. 우리는 그래도 마을의 규칙과 질서를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요즘 아이들이 어디 그러더냐? 우리 아들만 해도 말없이 마을을 나가서 2년을 방황하다 오질 않았더냐? 저 집 아들도 그랬었고.”
“그때는 뭐, 마치 무슨 유행이라도 된 듯 다들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하는 말이다. 유행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쫓아다니는 꼴이라니.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걸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어.”
“형님, 그런 소리 마시오. 우리 애들도 이제는 나이들이 차서 그리 경솔히 행동하진 않을 거요.”
“자, 그쯤하고 다들 주목하세요.”
손뼉을 두어 번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에저는 다른 이들이 수다를 떠는 사이 목이 잠겼던지 얕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대체로 두고 보자는 쪽과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는 것 같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 개인으로도 조치를 취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자리는 모두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리는 자리니 일단 전 중립을 지키겠습니다.”
몇몇 사람은 콧잔등을 찡그리기도 하고, 턱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결코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건 다들 동의하실 겁니다. 그렇지요?”
“뭐, 좋을 건 없지.”
“당연하지. 어디 다른 때보다야 할 일이 적다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시간을 허비할 정도는 아니지.”
겨울에도 할 일은 많다. 삭풍에 덜컹거리는 지붕과 문틀을 보수해야 하고, 마을 전체적으로도 손 봐야 할 곳이 많다. 농사 때문에 미뤘던 마을 내의 잡일들을 해야 할 시간이 바로 겨울이다. 만약 이번 겨울에 할 일을 못 하면 봄이 힘들어진다. 농사일로도 바쁜 와중에 마을 일까지 겸하려면 몸이 남아나지 않으리라.
“우리가 어디 우리 좋자고 이러는가? 다 자기들 편하게 지내도록 지혜를 나눠주는 것 아닌가.”
“그럼, 그럼.”
“지금 당장 급한 곳이 어디요?”
“원래는 이번 겨울에 다른 우물을 하나 더 찾기로 하지 않았소?”
“동생 말이 맞네. 에저, 가장 급한 것은 우물이네.”
“그건 도르랜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해결된 거 아닌가? 요즘은 물 떠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반으로 뚝 줄어든 탓에 그리 오래 줄을 서지 않아도 되더만?”
“그거 참 신통하더구먼. 자네, 그거 한 번 돌려봤나?”
“집 안 여자들이 신통하다고 떠드는 통에 궁금해서 가 봤지. 내가 요즘 팔심이 많이 떨어져서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별 힘을 들이지도 않고 두레박이 쑥쑥 올라오던걸?”
다시 화제가 엉뚱한 쪽으로 튀려고 하자 에저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
“조용, 조용. 별 상관없는 얘기는 나중에 돌아가시면서 하시고. 아무튼 말입니다. 마을이 점점 커지고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나는 추세인데 아무래도 우물 하나로 버틴다는 건 무리입니다.”
“그건 촌장 말이 맞아. 당장 우물을 하나 더 찾아야 하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우리끼리 해서 뭣 하는가? 젊은 애들이 와서 해야 할 일을.”
“그런 걸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이리 동분서주하는 거 아니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여태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모인 이들 중에서는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이가 입을 열었다.
“뭔가?”
“시계탑입니다.”
“시계탑?”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고, 그게 왜 급하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어리둥절 해하는 얼굴도 있었고,
“에이, 그 놈의 시계는.”
혀를 차며 못 마땅해하는 이도 있었다.
“론과 루치드란 아이가 시계탑을 만들기로 했는데, 그걸 마을의 한가운데 세워서 모든 사람이 시계를 볼 수 있도록 할 거랍니다.”
중년 사내의 소개에 혀를 찼던 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난 그게 마음에 안 들어.”
“뭣이 말인가?”
“시계라는 거 말이야.”
“시계가 왜요?”
혀를 찬 노인이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해보니 그 시계란 것이 고약한 물건이란 말이다. 다들 생각해보게. 옆집 사람이 와서 자네 일 안 나가고 뭐 하는가, 라고 물으면 처음에야 웃으며 대답하겠지만, 매일 매시간 찾아와서 자네 일 안 나가는가? 밥 안 먹는가? 잠 안 자는가? 라고 물으면 어떨 것 같나?”
“뭐, 귀찮긴 하겠네요.”
“귀찮다 뿐인가? 쯧쯧. 자네가 자네의 하루를 자네 뜻대로 지내지 못한다는 말일세.”
“네?”
“시시콜콜한 것까지 시계라는 놈이 시간을 알려주면서 이거 할 시간, 저거 할 시간 정해주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거야 자기 나름으로 할 일 아닌가요?”
“그게 애들이 게을러지는 요령일세. 모름지기 아이들에게 일할 시간을 정해주는 건 어른들의 몫인 거야. 우리가 시계가 없다고 해서 어디 일을 못 했던가? 잠을 못 잤던가? 해가 뜨지 않았다고 해서 일 할 때를 놓치기를 했나, 해가 졌다고 해서 잘 시간을 몰라 헤매기를 했나?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부지런할 수 있었던 건 다 오랜 세월을 살았던 어른들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네. 그런데 지금 꼴을 보시게. 시계니 뭐니 이상한 걸 만들어서 어른들의 지혜를 무시하려는 작태가 아닌가? 그리고 자기들이 시간을 정한다고? 내 듣기로 그 시계란 놈은 매일 같은 때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하더만.”
“아니라고요?”
“그래. 자네들도 알겠지만, 겨울에는 밤이 길고 여름에는 밤이 짧지 않던가? 그런데 시계란 놈은 그걸 구별하지 못한다 하더라고. 그래서 해가 뜨는 시간도 오락가락한다고 하더란 말이야. 그럼 생각해보게. 해가 떴는데도 시계가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라고 알려주면 어떻게 되겠나? 계속 잠만 자고 있을 거 아닌가? 사람이 그런 식으로 게을러진다는 말이야.”
“아아, 역시 어르신의 혜안은 놀랍습니다!”
에저는 다시 수다에 빠진 어른들을 본 주제로 돌리기 위해 여러 번 탁자를 두드려야만 했다.
****
아이들의 사금 채취는 계속되었지만, 참여하는 이는 줄어들었다. 날이 점점 추워질수록 물속에 손을 담갔다 빼는 작업이 힘들어진 탓도 있었고, 금 쪼가리 하나 나오지 않는 일에 계속 매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더 열성적으로 접시를 돌리는 이들도 생겼는데, 이들은 남들이 다 지루해하는 접시 돌리기(패닝)에 재미를 붙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무 접시를 살살 돌려서 물을 회전시키고, 그 물에 모래 따위가 쓸려가도록 만드는 기술에서 손맛을 느꼈다. 금이 나오고 나오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유는 모닥불 근처에 주르르 앉아 접시를 닦는 아이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놀이터에서 잘들 놀던 아이들이 어쩌다 ‘6시 내 고향’에나 나올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을까.
단유는 이들을 간단하게 이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다 곧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손이 많이 가겠지만, 마법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해결 가능하리라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날 밤, 몰래 집을 나온 단유는 새벽까지 작업을 했고, 새삼 자신의 마법이 ‘건축’에 특화된 부분이 많다며 자축하며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홀린 듯이 접시와 그릇들이 담긴 광주리를 품에 안고 나타난 아이들은 어제와 달라진 물가의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모닥불을 피우던 자리 주변으로 네 개의 기둥이 서 있었었는데, 기둥 안쪽으로는 대략 3평 남짓한 범위에 석판들이 오밀조밀 틀을 맞추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들 이거 깔고 앉아. 그냥 앉으면 뜨거우니까.”
단유의 말처럼 석판에서 열이 오르고 있어, 그 위에 서 있으면 차가운 겨울 바람도 둘러가는 것 같았다. 그냥 앉더라도 그렇게 뜨거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해서 단유는 나무 원목을 적당히 잘라 앉은뱅이 의자처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모닥불을 피우던 위치는 다른 쪽으로 옮겼는데, 그곳에는 화덕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 열기가 다른 곳으로 새지 않게 만들었다. 그곳에 불을 지피면 석판 아래로 열기가 지나가게끔 만들었는데, 당연히 이것은 온돌 방식을 응용한 것이었다.
“저기는 불 때문에 굉장히 뜨거우니까, 웬만하면 저기로 가지 마. 위험해.”
마음 같아서는 아예 집처럼 벽과 지붕까지 만들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적당히 타협을 보았다.
“여기 기둥에다가는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까 하는데, 어떠니?”
“그럼 여기가 집이야?”
“지붕이 없어서 집이라고 부르긴 그렇고, 그냥 겨울 동안만 쓸 놀이터라고 하자.”
“와, 신난다!”
사금 채취를 하려던 아이들도 따뜻한 석판이 신기한지 물가에서 벗어나 온기를 즐겼다.
아이들이 벽을 만들겠다며 물가의 돌들을 주워와 쌓기 시작했다. 단유는 진흙을 물에 개어서 돌과 같이 쌓을 수 있게 해주었다. 추위에 떨며 가사 노동에 매진하는 아이들을 돕고자 만든 온돌인데, 도리어 아이들을 건축 현장 막일을 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힘들지 않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