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놀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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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만드는 일은 생각처럼 순조롭진 않았다. 처음 문제가 발생한 것은 나무를 깎아서 단유가 필요로 하는 부품들을 일일이 만들어내야 할 론이었다. 그의 손재주는 나쁘지 않았지만, 실물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단유의 설명과 그림에만 의존해서 복잡한 부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단유는 좀 더 정밀한 그림을 그려서 보여줄 필요성을 느꼈고, 결국 ‘제도(製圖)’를 연구하게 되었다.
제도를 위해 단유가 필요로 한 것은 종이와 연필, 그리고 정밀 측정 도구였다.
“이걸 써라.”
론은 단유에게 거친 질감의 종이를 건넸다. 식물을 가공하여 만들었다는 종이는 색과 질감 면에서 지구의 것과 많은 차이를 보였지만, 못 쓰겠다는 정도는 아니었다. 종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니 단유는 고맙게 받아들였다.
“귀한 것이니 낭비하면 안 돼. 나도 몇 장 없으니까.”
작은 사이즈로 잘라 나눠 쓰면 효율이 높아지겠지만, 단유가 그리는 제도의 치수와 모양을 보고 확인해야 할 론에게 정확한 그림을 전달하고자 단유는 최대한 원본 사이즈에 맞게 그림을 그렸고, 그래서 꽤 많은 종이가 사용되었다. 연필 역시 목탄을 가늘게 잘라서 최대한 얇은 선이 그려지도록 했다. 이 때문에 목탄의 소요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 소모되었다.
컴퍼스는 이미 예전부터 원을 그릴 때 쓰는 게 있었다. 다리 두 개와 그 두 개를 핀으로 연결하여 쓰게끔 만들어져 있는데, 단유가 만든 자를 이용하면 원하는 사이즈의 원을 그리는 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각도기였다.
“그건 중요한 거냐?”
단유는 진지한 얼굴로 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품은 정확한 타이밍에 서로 맞물리면서 돌아가야 하는데, 그 비율대로 정확히 묘사하려면 아무래도 각도기가 필요해요.”
단유는 컴퍼스로 종이에 원을 그려 넣으며 대답했다. 원은 하나로 그치지 않고, 여러 개의 원이 겹쳐지게 여기저기 그려졌다. 때로는 자를 이용해서 사이에 선을 긋기도 하니, 지켜보는 론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단유는 중앙의 원을 중심으로 사분원을 한 뒤, 사분원점을 중심으로 같은 반지름의 원을 4개 더 그려 넣음으로써 간단하게 원을 12등분 시켰다.
“오호?”
단유가 만들어낸 원의 등분은 그 과정의 미스테리함을 떠나 결과는 신비로웠다. 론은 신기한 얼굴로 지켜보다 그 원인을 물었고, 단유는 때아닌 기학학 교실을 열었다.
“그런데 왜 360이란 숫자가 나오냐?”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사실 제가 살던 곳에서 그렇게 나눠 쓰다 보니 익숙해서 사용하는 면도 있고요. 360이란 숫자가 어중간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꽤 유용한 숫자기도 하거든요.”
360은 꽤 많은 약수를 보유한다. 1, 2, 3, 4, 5, 6, 8, 9, 10, 12, 15, 18, 20, 24, 30, 36, 40, 45, 60, 72, 90, 120, 180, 360 과 같은 약수를 보유하는데, 특히 1부터 10까지의 수 중에서 7을 제외한 모든 수를 약수로 가지기에 10진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도 유용한 숫자다. 단유는 간추린 설명으로 론의 이해를 도우며, 내친김에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인 이유, 그리고 이를 응용하여 원을 12등분한 과정에 대한 설명까지 해주었다.
“어렵긴 한데 꽤 흥미롭기도 하구나.”
목재를 가공하여 여러 가지 물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눈에 기하학 이야기는 꽤 재밌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응용한 제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충동까지 느끼게 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단유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바로 시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12등분이 가장 편하기 사용하기 좋은 숫자임에는 분명하다. 그저 단유에게 익숙한 방식이라는 이유 외에도, 12는 각도기 360과 같이 많은 약수를 보유한 숫자기에 활용도가 높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는 기하학적으로 보기 좋은 모양이라는 점이었다.
시계는 네모난 형태로 안정감을 주지만, 시간을 알리는 밑판은 시침, 분침의 운동에 맞춰 원형을 띄게 된다. 즉 숫자가 기재 되는 판은 원형으로 제작하는데, 이때 시계를 알리는 숫자의 간격이 보기 좋게 만들어지려면 7등분, 9등분 같은 어중간한 숫자보다 4등분, 8등분, 12등분이 보기 좋다. 특히 12등분은 정삼각형의 원리가 포함되어서 균형감도 있어 보이니 단유 개인에게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숫자 배열이었다.
그런데도 10등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건, 10이란 숫자의 편의성이 다른 숫자에 비해 월등히 높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손가락이 10개니까, 같은 유치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10은 ‘완전수’의 법칙에 따라 가장 안정감을 주는 숫자였다. 지구라면 어렵겠지만, 아직 시간의 개념도 제대로 서지 않은 이곳에서 시간을 10단위로 설정한다 한들 누가 뭐라 할까?
론에게 이야기했더니, 론은 뭐 별거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만드는 거 아니냐.”
레이도르와 아잘에게 물어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모두가 시간을 나누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라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단유가 만들기로 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도 단유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단유는 편의성과 효율성의 양 갈래에서 효율성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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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시계라는 것이냐?”
무려 1달 이상이 걸려 만들어진, 순수 나무로만 만들어진 시계가 첫선을 보였다.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실상은―단유의 시선에서―허름하기 짝이 없는 목조시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론은 매우 감격한 눈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건 내 인생 최대의 역작일 거야.”
단유의 도움이 많았지만, 나무를 깎고 사소한 부품들을 만들어내는 일은 대부분 론이 도맡았다. 특히 시계의 안쪽에 위치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기어들을 만들어내는 일은 론의 최대 시련이자, 최고의 성과였다. 론은 얼른 이라도 자랑하고 싶어 시계 바깥의 틀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시계 안쪽에서 틱탁거리며 작은 소음을 내는 톱니바퀴 여럿이 서로 맞물리며 돌아가는 모습이 공개됐다.
“우와! 이게 다 뭐야?”
제토는 물론, 아잘과 그 밖의 사람들이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톱니들을 지켜보았다. 각기 다른 속도로 돌아가는 톱니들의 움직임이 현란하게 느껴져 머리를 짚는 이도 있었지만, 아잘처럼 톱니 하나하나를 뜯어 먹을 듯이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가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단유가 와서 펌프를 같이 만들자고 했을 때는 그 황당한 설명에 한 번 머리를 저었고, 거기에 들어갈 수많은 재룟값과 수고비, 하지만 그런 비용에 훨씬 미치지 못한 필요성에 의구심을 가져 단유를 돕지 않았었다. 하지만 가론 역시 한 사람의 장인으로서 이런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는 않았다. 평소, 비록 장난스럽게 내뱉는 말이긴 해도, 나무 부스러기나 만든다고 낮춰 불렀던 론이 이토록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여간 샘이 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쇠로 만들 수 있냐고 묻는다면 결국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쇳물을 저렇게 만들어 낼 자신도 없었고, 만들어봐야 팔리지도 않을 모형이라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 사이 단유는 시계가 움직이는 방식과 시계를 읽는 방법 등을 설명했다.
“몇몇 분께는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눠서 계산하는 거예요. 그리고 해가 낮의 가장 높이 떴을 때를 시곗바늘의 출발점으로 지정했어요.”
처음에는 해가 뜰 때의 시간을 0시로 정해서 해가 질 때를 12시로 맞추는 방식을 고려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낮의 시작을 정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산자락에 걸리는 태양의 빛이 마을에 스며들 때를 시작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하늘에 동살이 비칠 때를 시작으로 정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낮에 이 시곗바늘이 한 바퀴 돌고요, 다시 밤에 한 바퀴 돌아서 다시 12시에 이르면 다음 날 해가 하늘 정상에 걸리는 거죠.”
이 비율을 맞추기 위해 시간이 꽤 걸렸다. 진자의 왕복 운동과 하루 해의 길이를 맞추는 작업은 가장 지루하고 어려운 작업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게 사실 정확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계절이 바뀌거나 할 때마다 낮의 길이가 달라지거든요.”
단유는 이를 위해 사정 청취를 했다.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몇몇 사람들은 낮의 길이가 달라지는 것 같더라는 증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 대부분 이들이 낮의 길이가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일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만약 해가 정상에 뜰 때와 이 시계가 많이 차이가 난다면 둘을 일치시키는 작업이 필요해요.”
이 작업을 위해서도 정오(正午)를 12시로 정하는 것이 좋았다. 해의 그림자를 관찰해서 정오를 알아내는 것은 손쉬운 방법이니까.
“그런데, 이 시계는 하나뿐이야?”
제토가 톱니에 홀린 듯 바라보다 단유에게 물었다. 역시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단유는 론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은 이 시계는 일종의 시험이었어요. 과연 이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시간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죠. 그래서 이제 진짜 마을 분들에게 도움이 될 시계를 만들까 생각해요.”
“어떻게? 나도 도울까?”
제토가 눈을 반짝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시계탑을 만들까 해요.”
단유는 모여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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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만드는 동안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고, 레이도르는 산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제토는 레이도르를 따라가지 않았다.
“루치드랑 같이 있어도 돼요?”
제토는 마치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레이도르에게 물었다. 레이도르는 제토와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했다.
만약 단유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제토는 레이도르를 따라 산에서 겨울을 났을 테고, 그러면 레이도르의 사냥기술을 배울 시간이 늘었을 것이다. 겨울의 사냥은 다른 계절보다 쉽지 않기 때문에 특히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혼자서는 알기 힘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스승의 역할을 할 때 많이 배워두는 것이 좋다.
하지만 레이도르는 그런 점을 제토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본인이 어렸을 적에 기사가 되겠다며 마을을 뛰쳐나갔던 사실을 잊지 않았듯, 자신의 아들 역시 잠깐의 ‘방황’은 있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방황’이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나쁜 사례에서 더 좋은 경험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든, 결국은 아들의 선택이고, 아들의 미래이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질 순 없는 법이다.
“그래라.”
레이도르는 떠나기 전, 단유에게 말했다.
“제토를 부탁한다.”
“반대 아닌가요?”
얹혀사는 건 단유였으니까.
“제토, 는 내 아들이긴 하지만 아직 어려.”
단순히 나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싶어 단유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도르는 어깨에 한 짐을 지고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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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탑 건설을 이야기한 이후 어느 날, 제토와 저녁을 먹으며 그날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던 단유는 가론과 아잘의 방문을 받았다.
“이번에도 나무로만 만들 것이냐?”
가론의 질문은 시계탑 건설에 자신도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쇠가 많이 들지 않는다면, 나도 참여할 수 있다면 참여하겠다.”
아잘 역시 일손을 거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선 이유는 며칠간 시계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였다. 정확히는 시계를 가게에 걸어둔 론의 변화 때문이었다.
론은 마을 사람들이 쉽게 볼 만한 위치에 시계를 걸어두었다. 작은 추가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려고 사람들은 종종 론의 가게에 와서 5분간 시계를 보다가 갔다. ‘5분’이라는 정확한 시간이 측정 가능한 것도 시계 덕분이었다.
“아줌마, 5분 지났어요. 이제 자리 좀 비켜줘요.”
“아이, 조금만 더 보자고?”
“에이, 아줌마 뒤에 줄 선 거 안 보여요?”
“아, 거 되게 쩨쩨하게 구네. 론,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아줌마. 지금 가게 앞이 엉망이 된 걸 보면서 그래요? 나도 장사는 해야죠. 아니면 아예 시계 못 보게 치워버릴까요?”
“알았다, 알았어. 비켜 주면 될 거 아냐.”
그리고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면, 론은 사람들을 내쫓았다.
“밥 먹을 시간이니까, 다들 나가요.”
“저 시간이 밥 먹을 시간이란 건가?”
“네. 지금이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을 때라고 하네요.”
사람들은 해가 내리쬐는 거리에 가서 직접 그림자를 확인하고 신기해했다. 론이 식사를 하는 시간이라고 정하자, 사람들도 각자 점심을 먹겠다고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시계를 구경하다 보면 론이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왔다.
론은 6시가 되면 가게 문을 닫았는데, 얼추 해가 서산 너머로 지기 시작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신통하네그려.”
론이 가게 문을 닫으면 그 시간이 저녁을 준비해서 먹을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론의 움직임에 맞춰 생활하기 시작했다.
론이 점심을 먹고 가게 문을 여는 시간은 오후 일과의 시작 시간처럼 여겨졌고, 그 시간에 아이들은 놀이터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들마저도 노는 시간이 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