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35화 (435/956)

친구야 놀자(1) (수정 :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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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내가 젊은 시절에 학자를 꿈꿨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제토를 돌아보며 아잘이 묻자, 제토가 처음 듣는다는 얼굴을 했다.

“아저씨가요?”

“그것 때문에 마을을 나가서 3년간 돌아오지 않았었지.”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이야기를 듣던 레이도르가 첨언하자, 아잘이 눈을 치켜떴다. 레이도르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시늉을 했다.

“내 비록 그때 많은 것을 배우진 못했지만, 그리고 그 당시 배운 것들도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아잘은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단유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새로운 길을 가고 싶으면 새로운 생각을 해라.”

단유는 놀란 눈으로 아잘을 쳐다보았다.

“당시 나를 가르쳐 주던 스승님이 해주신 말씀이었지. 어느 한 방향에 익숙해지면 다른 길을 찾지 못하는 법이라 했다. 너도 어쩌면 너무 한 쪽으로 익숙해져 있어서 다른 길을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 만약 새로운 방법을 찾고 싶다면 새로운 생각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

단유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레이도르가 툴툴거리는 어조로 침묵을 깨고 나섰다.

“아잘, 자네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몰랐군.”

아잘은 턱을 치켜들며 뽐내듯 말했다.

“3년이라도 배운 내가 자네보다 말을 잘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나?”

“그래서, 자네는 새로운 길을 가기라도 하는가?”

“왜 이래? 내가 만든 가죽 허리띠를 보라고? 다른 곳에서 그런 걸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나니까 그런 기능을 가진 허리띠도 만들어내고 그러는 거야.”

그러고 보니 활통과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거나 늘리는 것만으로 위치를 변환시켜 사용자의 편의를 돕게 하던 레이도르의 허리띠를 보고 내심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이 아잘의 솜씨라고 하니, 비록 단순한 장치라 해도 그 발상과 편의성을 고려한 디자인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군요!”

제토가 제 손바닥을 내리치며 감탄하자 아잘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제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당연히 레이도르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용불용(用不用)이라는 말이 있다.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생물학자 라마르크의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 만큼이나 많이 차용되어 쓰이는 이론이었다. 단유 본인도 가끔 그 이론의 적합성에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불과 얼마 전에도 ‘바람’을 이용하는 마법의 응용판을 고안할 때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단유는 그저 머릿속에 지식을 쌓기만 했을 뿐, 제대로 풀어낼 기회가 없었다. 고작해야 시험지의 답을 고를 때 지식을 풀어낼 뿐이었다. 그러니 단유가 지금 현재 곤란해 하는 상황은, ‘용불용’의 이론을 적용해서 풀이해보자면, 결국 평소에 그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려 하는 버릇이 들지 않아 그런 것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맹자>에도 그런 말이 있다.

산속의 사람들이 지나는 작은 길은 사람들이 다니면 큰 길이 되나, 다니지 않으면 풀이 자라 길을 막는다.(孟子謂高子曰 : “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 則茅塞之矣.”) 그리고 끝에 한 마디가 붙는다.

“지금 그 풀이 자네의 마음을 가로막았다(今茅塞子之心矣).”

단유는 풀이 자라서 막혀버린 길을 앞에 두고, ‘길이 막힌 게 자기 탓’이라고 한탄하는 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잘의 한 마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면 새로운 생각을 하라.”

말 한마디에 깃든 현기(玄機)가 보통이 아니라고 여긴 단유는 아잘의 스승이란 분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단유가 무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무링을 이용한 빨 펌프는 지구 기준으로 19세기 후반에나 나온 것이다. 원시적인 구조의 펌프가 나온 것도 13세기이니 무려 600년의 격차를 뛰어넘으려 했다. 그런데 이곳의 야금술은 못해도 10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단유는 무려 1000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뛰어넘으려고 시도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대한 배경지식도 부족한 상황인데 말이다.

단유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깊이 반성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을 했든, 형편없는 기술력을 가진 이곳에 실망을 했든 결국 자신의 마음공부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임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고맙습니다.”

단유의 정중한 인사에 아잘이 손을 저었다.

“이런, 그런 인사치레나 받자고 한 말은 아닌데.”

아잘은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고마워한다면 오히려 내가, 아니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도르래장치’ 같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줘서 말이야.”

도르래장치를 생각하자 단유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 단유는 레이도르를 보며 말했다.

“저기, 생각난 김에 드리는 말씀인데요.”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 한발 벗어나 지켜만 보려던 레이도르가 의아해하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이걸 만들어달라고?”

대장장이 가론은 또 왔냐는 표정으로 레이도르 일행을 바라보다 단유의 설명을 듣고는 난감하다는 듯, 단유와 레이도르를 돌아보았다.

“이건 그냥 길게 만들어낸 뒤에 두드려서 죄기만 하면 돼요.”

단유가 부탁한 건, 도르래 장치를 보다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죔쇠였다. 지금은 밧줄로 엉성하게 묶어 놓았을 뿐이라 아무래도 불안했던 단유는 쇠로 만든 죔쇠를 생각해냈다. 물론 재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고 단순한 모양이니 만드는 것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거면 충분하겠나?”

레이도르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자 가론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돈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니 집어넣게. 게다가 마을을 위해 쓴다는 데 자네에게 돈을 받을 수야 있나?”

“그렇다고 자네가 부담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받게.”

가론은 혀를 차다 못 이기는 척 레이도르가 내민 동전의 반을 챙겼다.

“반값에 해주지.”

“고맙네.”

레이도르가 피식 웃었다. 고로에 녹인 쇠를 두들겨 직사각형의 긴 띠 모양을 만들어낸 가론은, 같은 모양의 죔쇠를 여러 개 만든 뒤 단유에게 건넸다. 이를 이용해 단유는 우물 위에 장치된 도르래 장치를 다시 조립했다. 하는 김에 어른들의 손을 빌려 더 튼튼하게 땅에 박았더니 안정성이 보다 커졌다. 이제는 손잡이를 돌려도 기구가 흔들리거나 하는 일이 없어 단유는 만족스러웠다.

단유는 자신이 이곳, 대산맥 너머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약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그중 하나는 자신의 지식이 머릿속에만 잠든 지식으로 남지 않길 바라며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현실화시키는 일이 바로 이 마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유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보기로 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이 마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식을 풀어내는 것도 생각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하지만 단유가 먼저 지식을 풀어 도움을 준 대상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

“제토! 뭐야, 이제는 우리랑 같이 안 놀 거야?”

제토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제토를 불렀다.

“나 바쁘다.”

제토는 짐짓 어른스러운 체하며 아이들을 쫓으려 했지만, 아이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같이 놀자, 응?”

그들의 놀이 문화는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서 역할을 수행하는 역할 놀이였다.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가 더 많아지는 것은 기본이고, 그중에 특히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재미가 배가된다. 그리고 제토는 연기를 잘했다. 상대의 연기를 잘 받아주는 이에 속했기에 제토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안 돼. ‘발명가’는 계속 고민해야 하는데, 너희들이랑 놀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단유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기구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일컬어 ‘발명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들은 후, 제토는 스스로를 ‘발명가’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필요한 게 뭘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실 그동안 살면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갑자기 생각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영 재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무문 대신 철문으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그러면 밤에 잘 때 덜 춥지 않을까, 라는 이유였다. 철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철문을 여닫을 때 들어갈 힘이 많이 필요할 거란 지적에는 쉽게 수긍했지만 말이다. 사실 보안의 문제와 견고함의 문제가 지적된다면 철문도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이곳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 굳이 철문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철이 쓰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제토는 이후 집 안에 필요한 것이 있나 없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식탁을 보고, 의자를 보고, 침대를 보아도 당장 필요한 게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 바닥에 있는 이 나무들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왜?”

“나무도 썩는다며? 썩으면 벌레나 쥐들이 많이 모이잖아?”

그것은 제토 나름의 예리한 관찰에서 비롯된 추론이었다. 썩은 음식에 꼬이는 벌레와 쥐를 봤던 기억을 참조해서 ‘썩은 것에 불결한 것들이 꼬인다’는 결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역시 적당한 이유는 아니지만, 확실히 위생을 생각한다면 집안 환경을 바꾸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물론 제토가 위생을 염려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제토는 그저 자고 있을 때 잠을 깨우는 벌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뿐이었다.

“돌을 깔아서 바닥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러면 너무 일이 커지지 않을까?”

“돌로도 바닥을 만들 수 있어?”

그보다는 ‘시멘트’와 같은 방식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좀 더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아무튼, 제토의 때아닌 호기심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같이 놀아주지 않아 삐친 친구들만이 아니었다. 레이도르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어디 불편한 곳이 없냐고 물어보는 제토 때문에 지금이라도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이 됐다. 어미 돼지를 잡으면서 꽤 큰돈을 벌지 않았다면 고민의 여지도 없었을 일이다.

“가자, 응?”

칭얼거리며 제토를 부르는 아이들이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자 제토도 난감해했다. 아이들과 노는 것도 좋지만, 뭔가 멋진 발명품을 만들어서 또 한 번 마을 사람들의 환호와 축하를 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제토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떡하지?”

제토가 단유를 돌아보며 묻자,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단유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제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아이들의 끈질긴 청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너도 가자.”

제토는 혼자 끌려갈 수 없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문밖으로 보이는 상쾌한 햇볕을 보며 흔쾌히 제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오랜만에 향한 놀이터에는 예전에 봤던 그 멤버들이 그대로 모여 있었다.

“같이 하자!”

단유는 같이 오긴 했으나 같이 역할극을 하자는 제안은 거절했다. 그들이 즐기는 역할 놀이―아마도 어떤 전투를 재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 같이 어울리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어쩐지 그런 놀이는 너무 유치한 것 같다고 여겨졌다.

“혼자 구경만 하면 심심하지 않아?”

문득 단유는 초등학교 때 자신이 뭘 하며 놀았던가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보니 명수 때문에 끌려가서 놀았던 게 몇 번 있긴 했어도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난 정말 비사교적인 인간이었구나.’

이런 식으로 또 한 번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는 단유였다. 하지만 그런 성찰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단유에게도 같이 놀자고 졸랐다. 비록 또래보다 덩치가 커서 마치 어른 같다는 느낌이었지만, 제토와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게 여겨졌다. 장군 역할을 맡겨도 어울릴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할극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단유는 머리를 굴려 제안을 피할 방법을 모색했다.

“저기 있잖아.”

단유가 아이들의 재촉에도 꿈쩍하지 않기에 다들 포기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단유가 입을 열자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내가 그거 말고 다른 놀이 하나 알려줄까?”

“다른 놀이?”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사실 매일같이 반복하는 놀이가 그렇게 좋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니, 달리 즐길 거리가 없는 아이들에게 역할극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새로운 놀이가 있다는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뭔데, 뭔데?”

단유는 그저 역할극을 면피하기 위해 즉석에서 게임을 만들었을 뿐이라 과연 이 아이들이 좋아할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즐겼던 놀이가 별로 없던 터라 지구에서 초등학생들이 즐기는 놀이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란 어려웠고,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머리를 굴렸을 뿐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전쟁 놀이야.”

“전쟁 놀이?”

아이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무럭무럭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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