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개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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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과학 시간에 대수층에 관해 배운 바를 떠올렸다. 사실 우물이라는 것이 지반 깊숙이 흐르는 대수층의 물을 뽑아 쓰는 것이니 새로울 것은 없었다. 다만 단유는 좀 더 기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뽑아 쓰는 방식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빨 펌프와 같은 방식이었다.
물론 ‘아르키메데스의 나사’라고 불리는 양수기 방식도 고려했지만, 펌프처럼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식을 두고 다른 방식을 취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펌프 제작은 곧 벽에 부딪혔다.
“그게 뭐냐?”
대장장이 가론은 단유의 설명을 듣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어떻게 그런 걸 만든다는 거지?”
흙바닥에 그림을 그려 가론에게 보여줬지만, 가론은 물론 그의 뒤에서 일을 돕던 다른 야장들도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구조도 구조지만, 그 정도 철 덩어리를 만들기 위한 재료가 없다.”
만약 이 펌프를 만들기 위해 철을 쓴다면 당장 필요한 생활 도구들을 만들 재료가 부족해진다.
“우물이 있는데 뭐하러 그런 복잡한 걸 또 만들어? 지금으로도 충분해.”
가론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주문한 칼, 삽, 쟁기 등을 만들기에도 일손이 부족한데 굳이 그런 걸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있으면 편하겠지만, 없어도 큰 불편이 없다는 게 가론의 주장이었다.
단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간 야장들을 보다가 대장간을 둘러보았다. 가론의 옆에서 한 야장이 빨갛게 부어오른 쇳덩어리를 투박한 모양의 집게로 붙잡고 있었고, 그 위를 가론이 망치로 때려서 모양을 내는 중이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두 사람이 커다란 풀무를 눌러서 고로에 불을 키우는 중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대장간 한편에 쌓여있던 목탄을 삽으로 퍼서 가마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대장간 입구 근처에는 가판처럼 넓은 나무판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만들어 진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대기 중이었다. 칼도 있고, 망치도 있고, 냄비도 있었다. 하지만 마치 박물관에나 전시되어야 할 것들처럼 투박하고 엉성했다.
그 외에 만들어진 것들을 살펴봐도 이 정도 기술력으로는 실린더와 피스톤 역할을 할 부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왜 해보지도 않고 그러나? 한번 해 보지그래?”
레이도르가 가론을 채근하자 가론은 다시 들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내가 비록 쇠만 만지는 놈이라 머리가 썩 좋진 않지만, 지금 이 친구가 말한 것은 여기서 만들 수 없는 물건이란 것쯤은 알 수 있어.”
단유가 제시한 조건, 원기둥 모양의 펌프 실린더와 그 안에 들어갈 몇 가지 부품―밸브, 마개, 수관(水管) 등―의 제작은 단유가 그린 그림대로 어떻게 뚝딱거려서 얼추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만든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이 정도 물건을 만들려면 저기 있는 목탄 정도로는 턱도 없을 거야. 아마 저 산의 나무를 모두 베어서 목탄으로 만들고 그걸로 온종일 쇠를 녹여야 겨우 부품 하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밀한 부품을 제작하려면 쇠가 잘 녹아야 한다. 그런데 고로에서 쇠를 녹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대 지구에서야 거대한 제철소를 운영할 정도의 기술력이 있으니 쇠를 녹이는 일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쇠를 녹이기 위해서는 목탄을 가열해 온도를 높이는데, 정밀 작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열이 필요하다. 당연히 많은 목탄이 필요하게 되고, 목탄을 위해 산의 나무를 베어다 써야 하니 더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방식의 특성상 한계가 존재하니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사정이니 아마 부품을 만들더라도 그 내구성이 의심될 것은 물론이요, 정밀하게 규격을 맞추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좀 더 생각해보면 펌프에 필요한 몇 가지 필수 재료가 없었다. 단유가 떠올린 재료 중 하나는 바로 고무였다. 오링(O-ring)을 만들어 내부에서 오르내릴 실린더의 주위를 감싸야 진공상태가 만들어질 텐데, 그런 고무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또 지금 대장간에서 이뤄지는 작업 현장을 보니 ‘치수’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만약 고무가 없다면 그나마 펌프 원통 내부 실린더의 치수와 피스톤의 치수가 같거나 거의 맞물릴 정도로 비슷해야 진공 비슷한 상태를 만들어낼 것인데, 이런 작업환경에서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특히 대장간 외벽에 걸린 물건들을 보며 놓치고 있던 사실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부식’이었다.
단유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금속의 부식은 금속 이온의 용출에 의해 결정된다. 부식되면 녹이 슬고, 그 녹이 물을 오염시킬 것이다. 철이 부식되지 않게 하려면 간단하게는 방수 페인트 같은 것으로 외부를 코팅하거나, 혹은 산화마그네슘을 이용하는 방식인데 어느 것 하나 불가능에 가까웠다.
혹시나 해서 녹이 슬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아냐고 물었더니, 가론이 눈짓으로 가리켰다.
“알면 내가 저걸 저렇게 두겠냐?”
벽에 걸린 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되물으니 단유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쇠파이프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 방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지 말고 나무로 만들면 안 돼? 도르래도 나무로 만들었잖아?”
옆에서 지켜보던 제토의 제안에도 단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무로 한들 가능할까. 나무도 습기에 노출되면 썩기 마련이고, 그 내구성이 쇠에 한참 못 미치니 만들어봐야 일회용이나 다름없다. 고작 일회용이나 만들자고 그런 수고를 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단유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자, 제토가 단유를 위로했다.
“괜찮아. 못 만들면 어때? 우물이 있으니까 괜찮아. 가론 아저씨 말대로 우물 하나로 여태껏 불편 없이 살았는걸.”
제토는 단유가 자신의 발명품을 만들지 못해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실망한 것은 맞지만, 대상이 틀렸다.
단유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다.
‘아무리 많이 알면 뭐해? 현실에 적용도 못 시킬 지식 따위.’
그동안 끼니를 채우는 것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던 지식들이 모두 쓸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 지식들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들을 쓸모없게 만든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위대한 과학자, 현인들은 자기가 가진 것보다 못한 지식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냈었다. 그들이 아는 것 이상의 지식을 습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고작 이런 펌프 하나 만드는 게 힘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물론 그들이 만들었던 방식대로 만드는 게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정수를 공부한 입장에서 고무링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 낮은 기술력의 야금술을 대체할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부끄럽고 한심했다.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위해서 공부한 것이냐.’
어쩌면 단유의 기댓값이 너무 높아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시대에 살았던 단유가 굳이 타협해서 ‘시대에 맞게’ 나선형 양수기를 만든다거나 하는 것은 배운 지식을 헛되이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증기기관의 원리를 안들, 유체의 흐름을 역학적으로 계산할 줄 안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생각해보니, 이곳이 아니라 지구에 간다고 해도 단유가 직접 무언가를 만들거나 실생활에 적용할 만한 것들을 구상해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단유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대장간에서 물러났다. 제토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단유의 뒷모습을 레이도르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원래는 이날 다시 산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레이도르는 며칠을 더 머무르기로 했다. 겨울을 지내기 위한 준비라는 핑계가 있었지만, 실상은 주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단유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처음부터 호기심을 드러냈던 아잘이었다.
“나무는 안 되나?”
대장간에 갔다가 실망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잘이 물었다.
“나무는 물에 닿으면 썩잖아요. 두레박 같은 경우라면 교체할 수 있지만, 지반 깊숙이 박을 관은 교체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위생도 문제고요.”
“위생?”
이 마을 사람들은 우물에 뚜껑도 덮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물을 단순히 생활용수로만 쓰는 게 아니라 식수로도 사용하고 있으니, ‘위생’이란 개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썩은 나무가 물을 오염시키면, 그 물을 먹고 탈이 날 수 있어요.”
단유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 그럼 배탈이 나는 경우도 오염된 물을 먹어서 그런 것이냐?”
아잘이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호기심은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여서 지켜보던 레이도르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배탈이 나는 경우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물도 원인일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이유는?”
“뭐, 오래된 음식이나 썩은 음식을 먹어서 그럴 수도 있죠.”
“아, 그렇지.”
아는 사실인데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깜빡했다. 아잘은 자신의 머리를 쿵 치며 실수를 자책한 뒤, 다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을 물었다.
“쇠도 녹이 스니까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렇죠.”
“그런데 넌 처음에 쇠를 쓰려고 했다며?”
단유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때는 그 생각을 못 했었죠.”
“그럼 니가 살던 곳에서는 뭐로 관을 만들었던 거니?”
쇠나 나무 이외에 재료라면 혹시 돌일까? 아잘의 질문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쇠를 쓰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그 쇠에 녹이 슬지 않게 하는 거죠.”
“쇠가 녹이 안 슬어?”
그것은 마치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빵이 있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칼에 기름칠을 할 필요도 없고, 쟁기도 부러지지 않는 이상 평생 쓸 수 있을 것이다.
“쇠에 녹이 스는 것은···.”
단유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부식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 기초 과학 상식을 요구한다. 분자는 물론 전자와 이온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하고, 금속의 전위와 전위차에 의한 흐름, 반응성도 알아야 한다. 그 이후에나 ‘부식은 양극(Anode), 음극(Cathode), 전해질(Electrolyte), 전기적 회로(Return Circuit)등 4가지 요소를 갖춰야 발생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단유가 말을 잇지 못하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아잘이 되물었다.
“아니, 그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요.”
이해는 하는데, 그 이해를 상대에게 전달시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특히 지식수준이 현격히 차이가 나는 상황이니 이를 쉽게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쇠에 녹이 스는 이유는 조금 복잡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이유를 알기 때문에 문제를 고치는 방법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쇠에 녹이 슬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서 적용했어요.”
“그 방법을 여기서는 쓸 수 없는 것이냐?”
문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방법을 알고 있지만, 그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치 지금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훌륭한 선생님은 어려운 문제도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단유는 훌륭한 선생님은 아니었다. 훌륭한 제자도 아닌 것 같지만.
제토가 끼어들었다.
“루치드는 지금 많이 실망한 것 같아요.”
“실망?”
“그런 거 있잖아요. 어른들이 쉽게 하는 걸 아이들이 못할 때, 어른들이 그 아이들에게 실망하는 거요.”
그렇게 비유하면 마치 단유가 어른이고, 앞에 앉은 아잘이나 레이도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아이인 것처럼 돼버리니 자리에 앉은 이들이 듣기에 민망하다. 하지만 그 비유가 지시하는 바는 정확하게 와 닿았다. 아잘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부족한가?”
단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단지 기술의 한 면만 가지고 그 사람들이 부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비판할 순 없는 걸요. 게다가 제가 실망한 건 이곳의 기술이 아니라 저예요.”
“너?”
단유는 자신이 고민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마치 자신이 아는 게 굉장히 많은 사람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거꾸로 자신의 지식이 너무 얕아서 그런 것이라고 피력했다. 자신이 배운 지식들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전 여태 헛공부를 한 셈이에요.”
아잘은 혀를 찼다.
“그건 아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