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33화 (433/956)

기하학개론(4)

-------------- 433/952 --------------

“내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제토보다도 더 어렸을 때의 일이었지. 그 사람은 우리 마을 사람들을 보고 굉장히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 마치 제르아 오마 너머에 사람이 사는 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넘어왔다고 말했나요?”

레이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나의 아버지가 그 사람을 마을 입구에서 처음 발견했고, 그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거든.”

레이도르는 과거의 그 순간을 회상하는 듯 천장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에게 물과 먹을 것을 줬더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사람은 제르아 오마를 가리키며 산을 넘어왔노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이 무서워서 아버지 뒤에 숨어 있었지. 그 사람의 눈빛은 꽤 날카로웠거든.”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눈빛만큼은 날 선 칼날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람도 물었다. 자기 말고 저 산을 넘은 사람을 본 적이 있냐고.”

응?

“아버지가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미소를 짓더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꽤 많은 사람이 넘어온 적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많은 사람이요?”

레이도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했냐고 묻자, 아버지가 답했다. 모두 죽었다고.”

단유의 안색이 검게 변했다.

“어떻게 죽었냐고 묻길래, 아버지가 되물었다.”

레이도르는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죽길 바라냐고.”

****

제토는 밖으로 나선 김에 우물가로 달려갔다. 사람들의 반응이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토는 대환영을 받았다.

“제토! 정말 네가 만든 거니?”

“제토, 대단하다! 전혀 힘들지가 않아!”

“어릴 때는 그저 말 안 듣는 개구쟁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멋지게 자랄 줄 알았다면 그때 덜 혼낼 걸 그랬구나.”

“이거 말고 또 다른 것도 있니?”

사람들의 환호와 추켜세움에 제토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특히 지켜보던 아이들의 눈에 깃든 선망과 존경의 눈빛에 흥분을 감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럼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요.”

지난 밤, 처음 손잡이를 돌리면서 놀란 것은 제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단유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었고, 그중 하나가 방금의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또 만들 수 있냐고.

단유는 잠시 궁리하는가 싶더니, 간단한 건 만들 수도 있지 않겠냐며 덤덤히 대답했다.

‘이게 간단하다니!’

물론 만드는 작업은 간단했다. 제토 본인이 간단한 제작을 맡아서이기도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동그랗게 생긴 ‘도르래’라는 걸 달기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단유가 ‘역학’이니 ‘힘의 균형’이라느니 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설명을 이어나가니, 절대 간단하지 않은 작업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만들 수 있다고 했으니, 만들면 되는 것이다.

제토는 사냥보다 제작이 더 재미있었고, 자신에게도 소질이 있다고 여겼다. 복잡한 기구 제작은 단유가 맡았지만, 자신도 한몫했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자격도 있었다.

‘루치드에게 하나 더 만들어보자고 해야겠어.’

우물이 하나인 게 아쉬웠다. 하지만 도르래 말고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발명품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제토가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우쭐해 하는 시간을 가질 무렵, 정반대 의미로 얼굴을 붉히고 있던 단유는 레이도르의 무심한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서요?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레이도르는 끼고 있던 팔짱을 천천히 풀며 대답했다.

“웃더군. 너처럼.”

“아무렴 저 험한 산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죽고 싶냐고 묻는들 무슨 대답이 필요할까요.”

“···그래. 그도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자신은 이미 저 산 위에서 한 번 죽었다고. 그래서 달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이야기하더군.”

레이도르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보아도 높이가 남다른 제르아 오마. 저 산을 넘어온 이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평생을 사냥꾼으로 지내며 죽음의 순간을 겪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도 어릴 때 보았던 그의 웃음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과 같은 나이라는 소년은 마치 그 시절의 그 노인처럼 미소를 짓는다. 그 사람을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그 의미를 공감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사람을 여태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 웃음이 인상에 남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한 듯한 웃음과 표정이었거든.”

단유는 과연 그 사람이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일지 궁금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자신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지구와 이곳의 시간은 대략 5배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요컨대 지구에서의 하루가 이곳에서는 5일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계산에 기대어 추정해보면 마법을 가르쳐줬던 핀체노 할아버지와 헤어진 게 대략 40년 전후가 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레이도르의 어린 시절과 적당히 맞아 떨어진다.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시나요?”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와의 문답이 끝나고 그는 바로 마을을 떠났다. 그는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끝을 보겠다며 떠나려 했지. 아버지는 그에게 얼마간 도움이 될 식량을 주머니에 담아주었고.”

그 외에는 별로 기억하는 바가 없다는 레이도르에게 단유는 아쉬움을 감추고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아저씨의 아버지는 저 산을 넘은 사람들을 봤다고 했잖아요?”

“그래.”

“그 사람들은 모두 그냥 죽은 건가요?”

레이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컵을 집어 구석에 놓인 물통으로 향했다. 물통을 덮고 있던 뚜껑을 열고 컵에 물을 담은 뒤, 단유에게 보였다. 단유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고, 레이도르는 그 자리에서 물 한 컵을 마셨다. 그렇게 입을 축인 뒤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참 후에, 내가 좀 더 큰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온 건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 때였다. 당시 아버지는 이 마을의 촌장 역할을 하고 있었지. 갑자기 추레한 몰골의 사람들이 마을로 나타났고,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도끼와 삽, 쟁기 등을 들고 그들을 포위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모두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경계하던 태도에서 구조의 손길로 전환한 마을 사람들이 다급하게 다가갔지만, 마른 얼굴을 한 그들은 대부분 물 한 모금 못 삼키고 죽어갔다고 레이도르는 설명했다.

“사실 그 당시에 기이하게도 제르아 오마를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가 목숨을 연명하며 아버지의 신세를 졌고, 그러면서 아버지는 제르아 오마 너머의 일들, 네가 말한 아크리스토스의 일들도 들을 수 있었다.”

“왜 넘어왔는지도 이야기를 하던가요?”

“전쟁이 났다고 하더군.”

“전쟁이요?”

단유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레이도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게 벌써 수십 년 전의 이야기니까, 당연히 넌 모를 수도 있겠지.”

아니, 그런 의미로 놀란 표정을 지은 게 아니었다. 단유의 기억에 이곳에서, 정확히 녹스 주변에서 전쟁이 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이 어렸을 때는 그저 산에서 나무나 캐던 아이였던데다 워낙 빈촌이 대륙의 구석에 위치한 탓에 전쟁의 참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대륙에서 도망쳐 아크리스토스로 왔더니, 다시 도망을 쳐야 할 위기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저 산맥을 넘어왔노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셨지.”

결과적으로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그들은 단유의 가족, 빈촌의 주민들과는 상관없는 이들이란 이야기가 된다.

겨우 실종된 이들에 대한 실마리를 구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기회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실망한 단유의 기색을 읽었는지 레이도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려주었다.

“그 사람들이 쓰러진 건 병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젊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마을에서 멀리 벗어난 언덕에 매장했다. 병이 옮을 것을 염려한 탓이었지. 다행히 병은 전염되지 않아, 마을에 별일은 없었지만, 한동안 마을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특히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을 간병하다 죽음을 목도한 마을 사람들이 꽤 힘들어했었나 보더군. 그래서 그 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이 마을에 왔을 때, 아버지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집으로 데려왔다가 아무도 모르게 마을 밖으로 나가게끔 도와준 모양이다.”

그 사람 중 이름을 말한 사람이 있는지 묻자,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들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름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매장된 묘지에도 그들의 묘비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단유는 고개를 털어냈다. 계속 찝찝한 기분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니가 처음이지. 그리고 너처럼 건강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처음이고.”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매일 운동을 해서 그런가 봐요.”

“운동?”

딱히 운동이라고 명명할 활동을 하지 않아도 매일매일이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뭔가를 할 수 없는 환경인지라, 단유의 ‘운동’이란 표현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집의 문이 열리며 제토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레이도르가 단유의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끝났다. 나는.”

이제는 할 말이 없다는 표시에 단유도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충분히 다 들었다는 표시였다.

“무슨 일이냐?”

“아, 밥 먹자고요. 생각해보니까, 우리 아직 밥 안 먹었잖아요?”

제토는 수프를 끓이기 위해 장작을 모으다 밖으로 내쫓겼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는 기분이 좋아서 배가 고프단 사실도 잊었지만, 신체가 간절하게 원하는 탓에 제토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 먹자.”

레이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의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고, 레이도르의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화의 내용과 과정 중에 두 사람은 당분간 함께해도 무방할 거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일단 ‘전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유였지만, 완전히 의심을 풀기에는 그가 보여주는 능력이 너무 남달라 보였다. 하지만 단유의 성정이나 태도, 자세가 레이도르에게 나쁘게만 다가오지 않아 당분간은 지켜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레이도르가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털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단유는 레이도르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들을 만한 정보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루치드.”

“응?”

조금 간이 짠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며 배를 채우던 단유가 제토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저거 말고 또 만들 거 없어?”

레이도르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제토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글쎄···.”

“어제 이야기 한 거 있잖아? 물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것도 있다고.”

“뭐?”

레이도르가 놀란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물이 저절로 나오다니?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것도 원리는 간단하긴 하지만, 그걸 설치하는 일은 쉽지 않은 거라.”

“그래?”

단유가 어렵다고 하니, 정말 어려운가보다 싶어서 제토는 풀이 죽었다. 하지만 레이도르는 그 말을 쉽게 넘기기가 어려웠다.

마을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물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고작 우물이 하나뿐인지라 사람들이 여간 불편을 여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단유와 제토가 만든 ‘도르래장치’라는 것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이 저절로 나오게 한다? 어디서 물이 나오는지, 어떻게 물이 나오게 하는지는 몰라도, ‘물이 나온다’는 그 명제 자체만으로도 귀가 솔깃했다.

“자세히 설명해봐라.”

레이도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단유를 추궁했다.

식사가 끝나고, 레이도르는 단유와 제토를 데리고 마을의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숙취를 대장간의 열기로 날리려는지 벌건 민낯의 대장장이는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망치를 내려치고 있었다.

“어이, 가론.”

“어이, 레이도르. 왜 또 온 거야? 칼은 아직 덜 갈았어. 오후에 오라니깐.”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냐.”

“그럼 뭐? 오늘 저녁에 한 잔 더 하자고? 안 돼, 오늘도 마시면 일이 너무 많이 밀린다고.”

“그것도 아냐.”

그제야 가론은 망치를 내려놓으며 레이도르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럼?”

“우물에 있는 ‘도르래 장치’ 봤나?”

“아, 그게 ‘도르래 장치’라는 건가? 이름은 처음 듣는데?”

“이 아이들이 만들었다고 하더군.”

가론은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다 피식 웃었다.

“자네 아들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레이도르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단유를 가리켰다.

“이 아이가 그 장치를 고안했다네.”

“호오,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만들고 싶은 게 있다는군.”

“뭐?”

“물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장치, 라고 하던데.”

“뭐?”

가론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레이도르와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