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32화 (432/956)

기하학개론(3)

-------------- 432/952 --------------

새벽이 지나면서 우물로 물을 뜨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는데,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도 사람들이 자리를 쉽게 뜨지 않아 우물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심지어는 물을 집에 가져다 놓고 다시 돌아와서 우물에 설치된 도르래 기구를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토는 새벽에 온 몇 사람들에게 방법을 가르쳐준 뒤 집으로 돌아갔고―밤늦게까지 단유를 돕느라 피곤했다―그 뒤로는 먼저 와서 방법을 배운 이들이 뒷사람들에게 알려주어서 장치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사실 손잡이만 돌리면 그만일 뿐이니 기계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려움을 겪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제토나 기구를 만든 단유나 이런 인기를 얻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어떤 원리래?”

“몰라. 근데 확실히 힘이 덜 들어.”

“신기하네.”

물이 필요도 없는데 괜히 손잡이 한 번 돌려보는 이들이 줄을 섰다. 사람들은 두레박이 오르내리는 광경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근데 이걸 누가 만든 거야?”

“그러게? 어제는 없었잖아?”

“그럼 어젯밤에 만들었다는 거네?”

“이게 하룻밤 만에 만들 수 있는 거야?”

“복잡해 보이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는 소란이 일자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오는 이들이 합류하며 우물 주위에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 벌어졌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지내던 마을에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었기에 더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거기에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레이도르와 그의 친구들도 있었다.

“저게 뭐지?”

숙취에 힘들어하던 아잘이 눈을 크게 뜨고 우물 위에 설치된 기구를 바라보았다. 에드나 다른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사람들이 한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입을 다물 줄 몰라 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폭발할 때 즈음, 제토를 만났던 아주머니가 다시 나타나 그들의 호기심을 풀어주었다.

“레이도르! 자네 아들이 만들었다던데?”

뒤에서 구경하던 레이도르가 어울리지 않게 휘둥그레 눈을 뜨고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밸 아줌마! 그게 사실이요?”

레이도르를 대신해 아잘이 묻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물 뜨러 왔을 때 제토가 가르쳐 줬어.”

“제토도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닐까요?”

군중 속에 있던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제일 처음 우물에 왔었는데, 저게 떡하니 있더라고.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르겠고 구경만 하고 있는데 제토가 와서 가르쳐 주더라니까. 자기 입으로 그랬어. 물 뜨기 편하게 하려고 만들었다고.”

아주머니의 체험기에 사람들은 자리에 없는 제토 대신 그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자네 아들이 이렇게 손재주가 좋았나?”

“천재였어? 몰래 산에 데려가서 뭐라도 가르쳤던 거야?”

“에끼, 이 사람아. 레이도르가 가르치긴 뭘 가르쳐?”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서도 레이도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레이도르.”

아잘이 레이도르를 부르자, 레이도르 역시 아잘을 바라보았다.

“이거 보통 솜씨가 아닐세.”

레이도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렸다. 레이도르가 걸음을 옮길 때 아잘 역시 그의 뒤를 따랐고, 몇몇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도 혹시나 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우물 주위에서 자기도 한 번 손잡이를 돌려보겠다고 줄을 서서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우물의 장치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한 레이도르는 늦은 아침을 준비하던 제토와 단유를 볼 수 있었다. 단유는 어제와 비슷한 모습으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제토는 어쩐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빠, 어디 갔었어요? 아침 드셨어요? ···어?”

제토는 말을 걸다 현관 바깥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

“뭐예요?”

레이도르는 제토와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다 물었다.

“우물에 있는 거, 네가 만들었냐?”

제토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치드랑 같이 만들었어요.”

뒤에서 듣고 있던 아잘이 레이도르의 어깨를 밀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너희 둘이서 만들었다고? 저걸?”

“네. 괜찮지 않았어요?”

난 신기하던데, 한 손으로 돌려도 두레박이 이렇게 올라오고, 라며 시늉을 하는 제토에게서 눈을 돌려 단유를 바라보던 아잘이었다.

“네가 만든 거구나!”

“···같이 만들었어요.”

단유의 대답에 아잘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소싯적에 헛꿈을 꾸느라 밖에서 돌아다닌 일이 있었지만, 마냥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저 장치가 예삿것이 아니란 건 잘 안다. 특히 기둥에 매달려 있던 동그란 장치가 핵심이지 않으냐?”

학자를 꿈꿨지만, 분수에 맞지 않다 여겨 다시 마을로 돌아온 아잘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가죽 공방에서 무두질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나름은 도시에 가서 책이란 것도 보고, 학자의 제자가 되어 이것저것 잡학을 공부하기도 했었다.

기둥에 매달린 도르래가 움직이며 걸려 있는 밧줄의 움직임을 용이하게 하여 힘의 손실을 줄인다는 것을 역학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그것이 저 장치의 핵심 부품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 도르래를 만들어낸 기술이 놀랍다.

단유는 쑥스러워하며 볼을 긁적였다. 사실 단유의 눈으로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가 없는 장치였다. 이왕이면 쇠로 된 베어링을 이용해서 마감도 잘하고, 고정장치도 튼튼하게 만든다면 훨씬 보기도 좋고 역학적으로 계산에 가깝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제대로 된 도르래의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도르래를 기둥에 매단 고정장치도 부실하고 두레박을 매단 움직도르래도 모양이 완벽한 원을 그리지 않기에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게 보였다. 그런 것들이 계산 상으로는 힘의 손실을 대략 20% 정도 깎았다. 다시 말해서 제대로만 만든다면 지금보다 20% 더 힘을 덜 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저걸 만든 것이냐? 아니 저 장치의 구동 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원리 정도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동그란 장치의 명칭은 도르래라고 하는데요.”

단유는 허공에 손을 저어가며 나름 이해하기 쉽도록 움직도르래와 고정도르래를 이용한 힘의 절약을 설명했다.

“···이만큼이 움직이면 그 길이의 절반만큼만 올라와요. 하지만 길이가 짧은 대신 힘도 반으로 줄어들거든요.”

단유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뒤에 선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여러 개의 도르래가 있다면 더 힘을 줄일 수도 있는데, 그 값이 움직도르래의 개수에 비례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는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사용하면 그만 아닌가?”

“그렇지.”

원리를 안다고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싶었다. 만든 사람도 알았고, 만들어진 원리도 ‘대충’ 들었으니까 이제는 다시 돌아가 그 장치를 한 번 더 만져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레이도르를 따라왔던 이들 중 다수가 발길을 돌렸다. 몇몇은 빨리 돌아가서 제작자의 정체를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에 걸음을 서두르기도 했다.

반면 모두가 이해를 하지 못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겉핥기로라도 학문을 공부했다는 아잘은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감탄했다.

“놀랍구나. 그럼 도르래의 크기는 상관이 없느냐?”

“별로 상관은 없어요.”

그저 힘의 방향을 바꿀 뿐이 도르래이기에 크기가 크든 작든 힘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다만 움직도르래가 크면 그 무게가 더해지니 별로 이득은 아니겠죠.”

“그렇구나.”

아잘과 단유의 대화를 묵묵히 듣던 레이도르가 아잘의 어깨를 잡았다. 아잘이 왜 그러냐는 듯 돌아보자, 레이도르가 턱으로 밖을 가리켰다.

“잠시 나가 있게. 이야기할 시간은 나중에 충분히 있을 테니까.”

친구의 눈빛을 읽은 아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도르는 제토에게도 잠시 나가 있도록 권했다. 제토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나간 후, 무거운 침묵이 집에 내려앉았다.

“앉아라.”

집안 가운데 위치한 식탁에 앉은 레이도르가 단유에게 마주 앉을 것을 권했다. 단유가 마주 앉아 덤덤히 레이도르를 바라보자, 레이도르는 심란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물었다.

“정체가 뭐냐?”

“네?”

“···정말 15살이 맞긴 하느냐?”

의외의 질문에 단유는 잠시 당황했지만, 맞는 걸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도르는 의심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침착함과 담대함도 수상하지만, 도대체 저걸 만든 저의가 무엇이냐?”

단유는 괜히 또 볼에 열이 올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편할 것 같아서요?”

“그냥?”

단유는 괜히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살던 곳은 보다 편하게 살기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어내던 곳이었어요. 사실 우물에 만든 도르래는 가장 기초적인 것들 중 하나예요.”

‘기초적인 것’이란 말에 레이도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이도르의 지식수준에서 도르래만 해도 ‘최첨단’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게 고작 ‘기초’라는 표현으로 급을 낮추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많다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크리스토스라는 지역은 도망자들이 살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엔 단유가 놀랄 차례였다. 레이도르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도망자들이 살던 곳임에도 그렇게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다면, 아마 제르아 오마 너머는 엄청나게 발전한 곳이겠구나.”

착각을 바로 잡아줄 의무는 없으니 단유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혹시 아크리스토스에서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나요?”

“말했듯, 대부분은 죽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레이도르는 단유를 지켜보다 물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냐?”

“···네.”

레이도르는 단유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제르아 오마를 넘어왔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저런 놀라운 기술들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낼 정도이니 제르아 오마도 넘을 수 있었던 것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지만, 사실 이 사실은 그렇게 간단히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만약 제르아 오마 건너편에 욕심이 많은 나라가 있다면, 그리고 그들의 군대가 제르아 오마를 건넌다면 이곳에서는 그들을 막을 방도가 없다. 예전에는 넘기만 해도 기력이 다해 죽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넘을 수 있을 만큼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힘을 온전히 보전한 채로 저 산을 넘어 올 군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안심되지 않았다. 당장 이 마을에, 평화로운 이곳에 전화(戰火)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니 끔찍함이 앞선다.

‘어쩌면 이 녀석은 척후병(斥候兵)일지도?’

그렇게 생각했다가도 금방 머리를 저어서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는 레이도르였다. 만약 척후병이었다면 저런 장치를 만들거나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너무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누굴 찾는 것이냐?”

단유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솔직히 가족을 찾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시간’을 생각하면 그리 쉽게 말하기가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적어도 십 년, 혹은 수십 년이 될지도 모른다. 동생이라면 눈앞에 있는 레이도르보다 더 나이가 많이 들었을지도 모르고, 어머니라면···.

“예전에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면서 대산맥, 아니 제르아 오마를 넘은 사람이 있었어요. 혹시 그 사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레이도르는 팔짱을 끼고 단유의 눈빛을 계속 지켜보았다. 확실히 아이의 눈빛은 맑고 선했다. 하지만 사람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것을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익힌 바 있던 레이도르는 자신의 감으로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지켜보고자 한 것이었는데, 어쩐지 불안했다. 단지 자신뿐이라면 모르겠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저 수상한 녀석과 함께 있으려 하는 게 보이니 불안했다.

“제르아 오마를 넘은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역시!’

단유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