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30화 (430/956)

기하학개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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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소개를 나눈 뒤, 아이들은 제토에게 같이 놀 것을 제안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장 시켜 줄게.”

“정말?”

제토가 반색을 하며 좋아하다 옆에 선 단유의 눈치를 보았다. 척 봐도 두 편으로 나눠서 노는 중인데, 무리의 대장을 시켜주겠다고 하니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유가 끼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당장 모인 이들 중에 단유보다 키가 큰 아이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 마치 초등학생 노는 곳에 어른이 끼어드는 형국 같아 단유는 정중히 거절했다.

“난 저기서 구경하고 있을게.”

‘놀이터’에 들어올 때부터 눈에 들어오던 아이들을 가리켰다. 대략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공터의 가운데에 몰려 있는 반면, 저 네 명의 여자아이들은 공터의 끝에 모여서 방해하지 않으려는 모양새였다. 즉, 단유도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저쯤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심심할 텐데···.”

제토가 미안한 듯 물었다. 애초 핑계가 단유에게 마을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었지만, 결국 핑계였을 뿐 오랜만에 찾아온 마을에서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마을도 볼 만큼 봤으니, 제토에게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았고.

곧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나무 막대를 들고 마주 섰다. 흡사 패싸움이라도 벌일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대면했지만, ‘너희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같은 발연기를 펼치며 칼싸움을 하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이미 약속된 시나리오에 따라 한쪽 편이 밀리는 형세를 취하고 곧 패퇴하는 적들을 쫓아 승리를 거두는 모양새로 놀이가 일단락되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상대에게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져주는 역할을 맡아 받아주는, 일종의 역할극이 그들의 놀이의 정체였다.

단유는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둘은 지선이보다 더 어려 보였고, 한 명은 지선이 정도, 한 명은 지선보다 두 어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제토의 경우(?)에서 봤듯이 외모와 나이가 지구와는 다른 면이 있어 확신할 순 없었다.

단유의 접근에 아이들은 호기심과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단유는 그들의 놀이에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터 바깥은 얕은 둔덕이 있고, 마른 풀들이 듬성듬성 나 있었는데 앉아서 구경하기 좋은 관람석 역할을 했다.

“누구야?”

어린 꼬마 여자 아이 하나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물음을 던졌다. 색 바랜 슈미즈에 헐렁한 튜닉을 걸치고 짧은 망토를 입은 아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공터에 모인 이들 중 이것과 다르게 입은 이가 별로 없었다. 사이즈와 색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이 튜닉과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다른 점이라면 여자아이들은 치마를 입었고, 남자아이들은 바지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또 몇몇 아이들은 두꺼운 망토로 추위를 견디지만, 몇몇은 바람에 흩날리는 얇은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만 있을 뿐이어서 방한(防寒)성에 의심이 갔다.

“루치드. 제토 친구.”

“산에서 살아?”

제토가 늘 산에 있다 보니 그런 추측을 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곳에서 사는데 우연히 오게 됐어.”

“다른 곳, 어디?”

또 다른 아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멀리 있는 곳이라서 잘 모를 거야.”

“혼자 다니는···거예요?”

이번에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물었다. 아니 어쩌면 수줍어서가 아니라 단지 차가운 바람에 볼이 홍조 현상을 보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아요? 바깥에는 도둑도 많고 살인자도 많다던데.”

단유는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무서워할 리 없지만, 이곳의 바깥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쉽게 대답하긴 어려웠다. 단유의 대답이 없자 여자아이들도 더는 물어볼 말이 없는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봤다.

“뭐해요?”

단유는 반쯤은 호기심으로, 반쯤은 화제를 돌릴 요량으로 물음을 던졌고 얼굴에 홍조가 띈 여자아이가 수줍게 대답했다.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한창 클 나이라 식욕이 남다르겠지만, 주변 여건상 넉넉히 먹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닌지라 이렇게 자기들끼리 모여 먹고 싶은 음식들을 이야기하며 수다를 떠는 게 낙(樂)인 모양이었다.

“저는 딸기 파이가 먹고 싶어요.”

“저도요, 예전에 밭에 딸기가 많이 났을 때 먹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저는 달걀이 많이 들어간 오믈렛이요.”

다시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에 빠진 여자아이들을 보다 단유는 고개를 들어 남자아이들을 보았다. 번갈아가며 이겨주고 져주는 놀이에 흠뻑 빠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막대기를 휘두르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 하늘에 붉은 비단이 깔리기 시작했다.

****

“자네 오늘 큰 건수 올렸다면서?”

레이도르의 어미 돼지 사냥은 사실 말처럼 쉽게 얻기 어려운 성과였다. 레이도르는 겸양을 표하는 대신 잔을 들어 올려 사람들의 환호성을 끌어냈다.

“역시 레이도르는 천성이 사냥꾼이었어.”

한 친구의 주장에 다른 친구들이 동조했다.

“그럼, 그럼. 레이도르가 활은 기가 막히게 쏘잖아.”

“처음부터 사냥꾼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레이도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어디 레이도르만 그런가? 우리도 젊었을 때는 다들 헛바람이 들어 방황했었지 않은가? 당장 저기 아잘만 해도 그렇지.”

“갑자기 내 이야기는 왜 꺼내고 그래? 부끄럽게.”

“아잘 저 친구가 학자가 되겠다며 마을을 나갔을 때 동네 어른들이 혀를 차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

친구들이 탁자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카운터에서 맥주를 따르던 에드도 키득대느라 맥주잔에 거품이 넘칠 정도였다.

“평생 책 한 번 본 적이 없는 놈이 왜 갑자기 학자가 되겠다고 했는지 아직도 의문이야. 아잘?”

“묻지 마. 그런 건 조용히 묻어두라고.”

“이제 이야기해 주면 안 되겠나? 레이도르야 워낙에 몸이 날래고 힘이 좋으니까 기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는 그나마 이해라도 했지만 말이야, 자네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오래도록 무두질을 하느라 손에서 가죽 냄새가 떠나질 않는 아잘이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렸잖아? 어려서 꿈도 못 꾸나?”

“터무니없으니까 하는 소리지.”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잘이 잔을 기울였다. 입가를 닦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들 기억하려나 모르겠는데, 그때 우리 마을에 왔던 이야기꾼이 있었잖아?”

“아, 있었지. 근데 그건 한참 전이잖아?”

“어쨌든. 그 양반이 놀이터에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흔들리지 않은 사람 있었나?”

이야기꾼은 바깥으로 나갈 기회가 없던 동네 꼬마들에게 바람을 집어넣었다. 전장을 누비던 전설적인 용병의 이야기와 도시의 온갖 고충들을 해결해주던 현자의 이야기, 한 나라의 젊은이들을 상사병에 빠뜨린 무희의 이야기와 나라를 망하게 한 늙은 왕의 이야기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어렸던 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양한 세계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품었었다.

“내가 들은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어떤 귀족의 이야기였지. 병사들에게 줘야 할 군량을 빼돌려서 착복하던 귀족이 비밀이 밝혀져서 처형당했다는 이야기 말이야.”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왜?”

아잘은 여전히 쑥스럽다는 듯 탁자를 손톱으로 긁으며 말했다. 그의 손톱 아래에는 가죽 때가 끼어 시꺼멓게 변해 있었는데, 때를 지우려고 아무것에나 손톱을 긁어대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 그 귀족의 착복을 밝힌 게 어떤 현명한 학자의 힘이었다지 않던가?”

“그랬나?”

오래된 이야기여서 기억하는 이가 드물었다. 하긴 짧은 시간에 워낙 많은 이야기를 남겼던 이야기꾼이었고,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다들 달라서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숨기려던 비밀도 쉽게 밝혀내는 학자라는 게 대단해 보였지. 그래서 학자가 되고 싶었고.”

“뭔가 밝히고 싶은 비밀이 있었나 보군.”

한 친구가 말하자 아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사 하는 말이지만, 르네의 남자친구가 누군지 궁금했거든.”

그러자 다들 시선이 레이도르에게로 쏠렸다. 레이도르는 무심히 잔을 들이킬 뿐이었다.

“하긴 당시에 르네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가 없었지.”

“그런데 그런 르네의 마음도 모르고 누구는 마을을 나가서 기사가 되겠다고 했으니···.”

레이도르는 탁 소리 나게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나간 얘기는 그쯤 하지?”

“제토가 르네를 많이 닮았어.”

아잘이 한마디 하자, 숨죽여 웃는 소리가 났다.

“제토가 르네를 닮은 게 다행이지. 저 친구를 닮았으면 지금쯤 제토는 생을 비관했을 거야.”

또 피식하며 실소를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레이도르는 무뚝뚝한 얼굴로 맥주잔을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내 아들이 아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지.”

사람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도르에게 잔을 내밀며 건배를 제의하고 아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등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잠시 후, 에드가 새로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레이도르. 아까 그 젊은 아이는 어떻게 된 건가?”

제토가 단유를 데리고 다니며 마을을 구경시켜줄 때 그 아이를 본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들 호기심을 갖고 있던 차에 에드가 가려운 곳을 긁어준 셈이라 눈을 빛내며 레이도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레이도르는 심란하다는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

레이도르는 어차피 친구들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거로 생각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세리산 입구에서 쓰러진 이를 구했다는 이야기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아크리스토스’라는 지명, 제르아 오마를 넘어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니까.

“그래서 계속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군.”

레이도르가 신중한 친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나치게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덩치는 커도 어리지 않나? 그렇게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힘이 좋거나 한 건 문제가 아니야.”

“그럼?”

레이도르는 맥주잔을 들고 마실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무 침착해.”

아이답지 않은 침착함과 어른들만이 가지는 특유의 통찰력이 엿보이는 아이였다. 그의 말대로 혼자 이곳에 왔다면, 어른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날 텐데 전혀 그런 불안함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냥을 할 때도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건만 말없이 보조를 맞추던 모습을 보면 사냥을 배웠거나 혹은 눈치가 남다른 아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럼 제토랑 둘만 놔두면 위험한 건 아냐?”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진 않은 것 같다.”

‘위험’이 보이지 않더라도, ‘수상’하다는 것만으로도 경계하는 마음을 갖기에 충분했다.

****

집으로 돌아오던 제토는 기분이 좋은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보랏빛 하늘을 등에 지고 돌아온 제토는 물청소를 할 때 물을 다 써서 물을 새로 길어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는 네가 갔다 왔으니까, 이번엔 내가 갔다 올게. 넌 쉬고 있어.”

단유는 대답 대신 물통을 들었다.

“내가 갔다 올게. 하는 일 없이 계속 신세만 지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야.”

“신세는 무슨 신세라고. 됐어. 그냥 쉬고 있어.”

하지만 단유도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같이 우물가로 가기로 했다. 사람이 늘었으니 물도 많이 필요할 거란 생각에 제토도 물통을 하나 들고 나섰다. 사실 힘으로만 따지면 단유가 물통 두 개를 들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제토는 단유에게만 일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물가에 다다르니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줄을 서 있었다. 오후와 달리 이번에는 남자들도 몇몇 서 있었다. 제토를 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유를 보고 경계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친구예요.”

단유를 소개하는 제토의 얼굴이 밝았다.

“아, 아까 봤던 그 청년이구만? 그런데 친구라고?”

말을 꺼낸 이는 낮에 단유가 우물물을 대신 길어줄 때 물을 받아갔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저 청년 힘이 좋던데?”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순서를 기다리던 남자들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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