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29화 (429/956)

바스크(5)

-------------- 429/952 --------------

우물가에는 남자가 별로 없었다. 대부분 아주머니들이었고, 더러 나이 어린 여자아이들이 단유가 들고 온 것과 비슷한 크기의 통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단유는 적당히 눈치를 봐서 줄의 뒤에 서서 기다렸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에게 경계를 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이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자신을 소개할 단유도 아닌지라 어색함이 있었지만 단유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이봐요.”

머리에 천을 두른 아주머니 한 분이 단유를 불렀다.

“네.”

“이것 좀 도와주지 않을래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르는 일이 여자들의 힘으로 쉽지 않다는 제스처로 어깨를 두드리며 부탁을 하는 아주머니였다. 단유는 흔쾌히 우물가로 다가갔다. 이왕이면 빨리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게 시선을 덜 받는 길이다.

“아이고, 이 청년이 힘이 좋네.”

두레박이라고 불러야 할까, 우물에서 물을 긷는 바가지는 그렇게 크지 않아 물을 가득 채워도 들어 올리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단유의 기준에서였다. 단유는 부지런히 물을 가득 채운 두레박을 끌어올리기를 반복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의 물동이를 채워주었다.

쉴 틈 없이 반복되는 움직임에 사람들이 감탄하면서 물을 채운 뒤 줄을 비워 나갔다. 덕분에 긴 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여기요.”

붉은 색 머리를 한 젊은 여인이 볼을 붉히며 단유에게 물통을 건넸다. 그것은 단유가 들고 온 것이었다.

“저보다 먼저 오셨던 것 같은데, 먼저 채우세요.”

“고맙습니다.”

단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것을 채우고, 그다음 젊은 여인의 물통을 채워주었다.

“아, 됐어요. 더 채우면 무거워서 들기가 힘들어요.”

여인은 두 개의 물통을 모두 채운 뒤, 두 개의 물통을 이은 줄을 어깨에 걸고 양쪽으로 물통을 들어 올렸다. 단유가 보기에 어깨에 메인 줄이 여간 아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녹스에서 오물 처리 아르바이트(?)를 할 때 썼던 지게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덜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곳에는 그런 도구가 없는 모양이었다.

여인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단유의 시선이 부끄러웠던지 또 얼굴을 붉히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수줍게 인사를 건넨 뒤, 눈치를 보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아가씨가 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어서 단유도 두레박을 우물에 걸쳐 두고 나왔다.

그냥 줄을 뒤에서 기다렸다면 지금보다 더 늦게 물을 길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빨리 물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엉성하게 만든 빗자루로 바닥을 쓸던 제토가 단유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계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어 단유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빨리 왔네? 사람들이 별로 없었나 봐?”

“조금 있었는데, 금방 줄이 줄어들었어.”

“그래?”

제토는 별다른 생각 없이 단유의 말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 물질을 할 솔을 찾더니 단유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할게, 넌 저기 가서 쉬고 있어.”

나름 배려를 해주려는 제토의 마음이 고맙지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나도 도울게.”

괜찮다는 제토의 만류에도 단유는 또 하나의 솔을 집었다.

아주 어릴 때 자신의 집을 청소할 때 이런 식으로 했었던 기억이 났다. 어머니가 바깥에서 텃밭을 돌볼 때, 자신과 동생이 솔을 하나씩 붙잡고 바닥을 문지르며 청소했었다. 하지만 그 기억도 너무 오래된 것인지 가물가물하고 흐릿해서 했다는 정도의 기억 외에는 남는 게 없었다. 심지어는 동생의 얼굴도 생각이 잘 나질 않을 정도.

얇은 나무판을 덧댄 마룻바닥이 반질반질해질 정도로 문질러댔더니 물이 마르며 나무판 특유의 적갈색 윤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아버지도 와서 놀라겠는걸?”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제토가 히죽 웃어 보였다. 단유에게서 솔을 받아 정리한 뒤,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럼 이제 나가서 놀아볼까?”

단유는 간단하게 그러자고 대답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집을 나와, 가장 먼저 간 곳은 동네의 광장이었다. 본래 고향 마을이었던 빈촌에서도 마을 중앙의 공터를 ‘광장’이라 부르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특히 그곳은 마을의 중앙 우물이 있는 곳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마을의 중앙 광장은 공터 주변으로 상점들이 모여 있었다. 상점가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그냥 소규모 가게들이 모인 거리 정도라 부르는 게 적당하겠지만, 아무튼 주변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가장 번화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마치 녹스의 상점가를 연상케 하기도 만든다. 하지만 녹스의 중앙 대로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온갖 길드의 상점들이 늘어선 것에 비하면 이곳은 아파트 상가 정도 수준이었다. 그것도 소규모 아파트 단지 수준이랄까?

그래도 이 근방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이 보이는 곳이기는 했다. 무엇보다 집에서 쉽게 보기 힘든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흥미를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잡화점으로 보이는 가게는 인기가 좋아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지나가며 슬쩍슬쩍 눈길을 주곤 했다.

“와, 이것 봐.”

제토가 상점 가판대 근처에 다가가 손을 가리켰다. 단유가 바라보니, 구슬처럼 반짝이는 사탕이었다.

“예전에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되게 맛있었어.”

지금도 침을 꿀꺽 삼키는 모양이 여간 탐이 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제토, 먹고 싶으면 먹어. 3딜루아(dilrua) 밖에 안 하는데.”

상점 주인이 제토의 얼굴을 알아보곤 투실투실한 턱살을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 제토가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주인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저씨,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아빠가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어쩌겠니? 그래도 그 양반이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건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건데.”

“그렇게 이용하려는 놈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더라? 피만?”

제토의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상점 주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모두들 자네 술값을 대느라 허덕댔었지.”

레이도르가 팔짱을 끼고 상점 주인을 무심히 바라보자, 상점 주인은 여전히 웃는 모습으로 손짓했다.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왔는데 술이나 한잔하자고. 자네 오늘 돈 좀 벌었다며?”

작은 동네라 소문이 빠르다. 누가 얼마를 벌었는지도 알려질 정도면 거의 비밀이 없는 동네라 해도 무방하리라.

“내가 이래서 이 동네가 오기 싫은 거야. 보는 사람마다 술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있는지.”

“허허, 참. 그러니 친구 아닌가.”

친구라고 하기엔 나이 차가 있어 보인다만,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들과 다른 법이니까.

레이도르가 단유와 제토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사고 싶은 거라도?”

제토가 우물쭈물 거리며 가판대 위의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과연 사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탐나는 것들은 많았다. 사탕뿐만 아니라, 허리에 매다는 고리라든가 특이한 자수가 놓인 수건이라든가, 겨울을 대비해 팔에 씌울 수 있는 토시 같은 건 꼭 필요할 것만 같았다.

제토가 망설이는 사이 레이도르가 단유를 향해 시선을 던지자,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신세를 더 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필요한 것도 없었다.

“괜찮다. 오늘 어미돼지 값에는 네 몫도 있으니까.”

이를테면 짐삯이랄까?

“아뇨, 그건 아까 밥값으로 퉁쳐도 되겠는데요.”

“퉁쳐? 크크.”

상점 주인이 옆에서 듣다가 웃음을 흘렸다.

“어린놈이 표현이 기가 막히구먼. 계산이 정확한 친구 같은데, 누구지?”

레이도르는 주점에서 그랬듯, ‘아들 친구’라고 설명했다.

“이런 친구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 물음에는 믿어도 되는 사람인가, 라는 물음이 같이 섞여 있었다. 레이도르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아직까지는 어떤 대답도 섣불리 하기 어렵다는 뜻.

그 사이 제토가 가판대 위의 것들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보였다.

“아저씨. 이건 얼마예요?”

제토가 집어 든 것은 팔꿈치에 끼는 보호대 같은 것이었다.

“그런 건 여기보다 아잘에게 가서 사는 게 더 낫다.”

“무슨 소리야? 이건 아잘 그 친구도 탐내는 물건이라고.”

피만은 역정을 내며 제토의 손에서 보호대를 뺏어 레이도르의 눈앞에 들이댔다.

“이게 밖에서 얼마나 귀한 줄 알아? 나도 겨우 구한 거라고. 다 우리 동네 사람들을 생각해서 어렵게 구한 건데 말이야. 여기 이거 보여? 이게 완충 작용을 해서 갑자기 바닥에 넘어져도 팔꿈치를 완벽하게 보호해준단 말이야. 그리고 바깥에 이거 보이지? 이게 평소에는 이렇게 물렁물렁한 가죽처럼 보여도 쉽게 찢어지지 않고 단단하기 때문에 공격용으로 사용해도 제품에 무리가 안 가게 해준다 이 말이야. 아잘의 가죽이라면 금방 찢어지고 말걸? 게다가 여기 이 끝을 조이면 보호대가 쉽게 벗겨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고작 팔꿈치 보호대에 그런 불필요한 기능들이 필요한가?”

“허, 이것 참. 이 봐. 자네야 워낙 몸을 돌보지 않고 막 굴리는 인간이니 그렇다 쳐도, 보통 사람들은 조심해야 하는 곳이 바로 관절이라고. 특히 산에서 잘못 굴렀다가 쉽게 다치는 곳이 어딘가? 바로 여기, 팔꿈치 아닌가?”

단유는 주인의 어설픈 논리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레이도르의 뚝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제토를 구경하다, 혹시나 해 자신도 가판대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무엇하나 조악하기 이를 데 없고, 딱히 필요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특히 현대에서 살던 단유에게 이런 조악한 품질의 물건들은 그 사용처를 떠나 욕심이 나질 않았다.

“얼만데?”

“1디루, 아니 특별히 자네니까 80딜루아에 쳐줌세.”

그렇게 들으니 꽤 비싸다. 아까 주점에서 한 끼 식사가 12딜루아였는데, 무려 6끼분의 가격이다.

“갖고 싶냐?”

제토는 아빠의 물음에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상점 주인이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눈 아래의 희미한 흉터가 꿈틀거리는가 싶을 때, 레이도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 술값은 이걸로 내게.”

언제 들고 있었는지, 1디루의 동전을 주인에게 던진 레이도르였다. 주인이 반색하며 공중에 뜬 동전을 낚아채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지. 오늘은 내가 술 한잔 사는 날이네.”

그러면서 제토에게 팔꿈치 보호대를 건넸다.

“자, 받아라. 너희 아버지가 오늘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제토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제토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본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오늘 너도 네 몫을 잘 하지 않았느냐. 그건 오늘 네가 번 돈으로 산 거다.”

“고맙습니다! 아빠!”

제토는, 그제야 방긋 웃으면서 주인의 손에서 보호대를 뺏어 들었다.

“너희들끼리 놀다 들어가거라. 아빤 친구들이랑 이야기 좀 나누다 들어가마.”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라.”

그 자리에서 바로 발길을 돌리는 레이도르를 지켜보던 제토가 뒤돌아서며 물었다.

“우리도 가자.”

“어디로?”

“저기로 가면 애들이 많이 모여 있을 거야.”

“애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을의 규모로 보면 못해도 몇백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을 마을인데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대부분은 놀이터에서 지내니까.”

‘놀이터’라고 말한 제토의 단어 선택이 올바르게 이해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단유의 기준에서 놀이터란 미취학 아동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을 의미하고 미끄럼틀이나 시소, 그네 등의 소소한 놀이기구들로 채워진 곳을 말하는데, 그런 곳이 이곳에 있을 턱이 없으니까. 하다못해 녹스에서도 아이들은 그저 거리를 뛰어다니거나 혹은 성벽 근처에서 술래잡기하는 정도의 놀이 문화만이 존재했었다.

제토를 따라간 단유는 금방 놀이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을 바깥의 작은 둔덕에 풀도 자라지 않는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에서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척 보기에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애들부터 제토 또래의 아이들까지 두루 섞여 모인 형국이었다.

조악한 나무 막대기를 들고 편을 갈라 칼싸움을 하는 아이들은 주로 남자아이들이었고, 두세 명 정도의 여자아이들은 공터의 변두리에서 주저앉아 바닥에 뭔가를 끄적이며 자기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제토!”

아이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제토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야울!”

야울이란 불린 이들뿐만 아니라 곁에 모인 아이들도 제토를 보며 환영했다.

“제토! 완전히 돌아온 거야?”

“아냐. 잠깐 일이 있어서 온 거야. 아마 내일 다시 돌아가야 할 거야.”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나누며 회포를 풀다, 제토의 뒤에 선 덩치 큰 단유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구···?”

“아, 인사해. 내 친구, 루치드야.”

친구? 그 단어에 의아함을 느끼던 아이들에게 제토가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랑 동갑이야. 15살.”

아이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