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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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모자를 잡은 것으로 사냥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사냥꾼은 눈먼 족제비와 나무둥치를 긁던 오소리 등을 잡았다. 풍족한 사냥감에 제토가 기뻐하는 사이 짐이 많아져서 손이 모자랄 지경에 처했다.
“제가 들게요.”
단유가 자청해서 손을 내밀었다. 구해준 보답, 이라기보다는 저녁 한 끼에 대한 감사 인사 정도라고 덧붙였다. 제토의 아버지는 단유의 위아래를 다시 한번 훑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당연히 어미 돼지를 어깨에 짊어졌다. 제토에게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냥꾼은 되도록 움직임에 제한이 없는 편이 좋기 때문에 이렇게 무거운 사냥감은 짐꾼이 짊어지는 게 옳다. 제토의 아버지도 그것을 이해한 탓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해가 뜬 지 3시간여가 지났을 즈음에 사냥을 마무리했다. 보통 이 시간이면 학교에서 1교시를 시작할 시간인데 산길을 걷고 있자니 어쩐지 리듬이 흐트러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평소라면 꼬박꼬박했을 운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산을 타고 올랐으니 운동 대신이랄까?
“이건 오늘 바로 가서 팔아야겠다.”
사냥꾼이 들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기 돼지까지 잡은 뒤, 사냥꾼은 등짐에 지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열고 그 안에 돼지의 피를 받았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더니 그 가죽 주머니에 뿌리자 하얀 가루들이 피 속에 섞였다. 피가 빨리 굳는 것을 막기 위함이란다.
“그럼 마을에 가서 아침 먹는 건가요?”
제토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여 제토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전에 사냥꾼은 마을에 가져다 팔 가죽을 가지러 별장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마을은 세리 산에서 대략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나오는 거리에 있었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하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지만 어딘가로 가기 위해 한 시간을 걸어본 적이 없던 단유는 이 행위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확실히 현대 지구의 문명 속에 많이 젖어 든 단유였다.
반면 제토는―비록 단유와 동갑이라고는 해도―단유보다 훨씬 왜소하고 힘이 약해 보였지만 걷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원체 익숙한 일이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동갑내기가 있다는 사실에 들뜬 영향도 없진 않았다. 가는 동안 줄곧 이런저런 수다거리로 떠들어대던 제토가 지루해할 틈은 없었으리라.
커다란 가죽주머니와 소소한 사냥감 몇 개를 짊어지고 활과 활통, 그 외 몇 가지 도구들을 착용한 사냥꾼은 그저 묵묵히 앞만 보며 걸을 뿐이었다. 저런 아버지지만 제토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걸 보면 평소에는 말을 잘 받아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단유가 대신 말을 받아주기에 저렇게 묵언 수행자처럼 걷고 있을 뿐이겠지만.
“레이도르!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아잘, 여기 이거나 좀 봐줘.”
사냥꾼, 레이도르는 아잘이라는 가죽 공장(工匠)에게 가죽 더미를 내밀었다.
“레이도르. 자네의 무두질 솜씨는 훌륭하다니까? 그냥 우리 가게에 와서 일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사냥꾼에게 사냥 그만두란 소리는 욕이나 다름없어.”
“욕이라니! 우리 가게에서 밥만 축내는 저놈들보다 낫다는 건데 욕이라니? 그럼 난 저놈들에게 무슨 소리를 해야 욕을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아잘의 힐난에 뒤에서 얼쩡대며 가죽을 훔쳐보던 도제들이 움찔거리더니 가게 뒷문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아잘은 혀를 차면서도 레이도르가 들고 온 가죽들을 살피고 값을 치렀다.
“그건 뭔가?”
“돼지 피.”
“호오, 설마 저 돼지가 자네 거였나?”
아잘은 단유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돼지를 가리켜 보였다. 레이도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잘은 감탄의 눈으로 돼지를 바라보았다.
“요즘 저만한 덩치 잡기 쉽지 않을 텐데, 역시 레이도르야.”
“운이 좋았어.”
“암만 운이 좋기로서니 저렇게 가죽이 크게 상하지 않게 잡는 건 기술인 거지.”
역시 일류 사냥꾼은 뭐가 달라도 달라, 라며 레이도르를 칭찬한 아잘이 돼지를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고깃값은 적당히 쳐줌세.”
아잘은 40디루(dirua)를 제안했고, 레이도르는 잠시 궁리하더니 43디루를 제시했다.
“못 말리겠네.”
아잘은 웃으며 호주머니에서 3디루를 더 꺼내 레이도르에게 건넸다.
아무리 힘 좋은 단유라도 대략 100㎏이 넘을 돼지를 어깨에 메고 한 시간 이상을 걷는 것은 무리라 해도 좋을 일이었다. 신음소리나 엄살 한 번 피우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괜한 자존심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좀 더 호흡에 신경을 써서 힘을 아끼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달랐던 모양이다.
“수고했다.”
짤막하지만 감탄과 고마움이 담긴 레이도르의 치하에 단유는 그저 머쓱하게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제토 너도 사냥꾼이 되고 싶으면 저 정도는 해야 할 거다.”
“나도 매일 운동한다고요.”
“힘만 키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럼요?”
레이도르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민망했던 단유는 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냥꾼의 제 일 미덕은 인내다.”
주위의 풍경은 얼핏 보면 빈촌 마을을 보는 것처럼 아주 낡은 가옥들이 곳곳에 있었고, 더러 새로 지은 티를 내는 건물들이라도 구조는 예전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렇게 보면 녹스가 엄청나게 발전한 도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아, 발전한 도시구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수만 따져도 이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곳은 ‘성’이지 않은가. 안전과 치안이 확립된 ‘성’은 일반 마을과 비교가 불가하다.
가죽 공방을 떠난 레이도르는 제토와 단유를 데리고 식당을 찾아갔다. 식당이라고 해서 외식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은 아니었고, 가끔 외지에서 오는 이들에게 가정식을 파는 정도였다. 본래 주업은 주점이었다. 알싸한 술지게미의 향이 깊게 베인 듯한 실내에 들어서자 탁자를 닦고 있던 사내가 북슬북슬한 수염을 자랑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도르! 너무 오랜만인데?”
“에드, 인사치레는 됐고, 밥이나 줘.”
제토를 돌아보며 주문을 하자 주점 주인은 제토에게도 인사를 했다. 제토는 이를 드러내며 손을 흔들며 인사에 답했다.
“옆에는 누구야?”
에드는 낯선 얼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 모르게 아들을 주워왔을 리는 없고.”
“···아들 친구야.”
“친구?”
레이도르는 에드의 안내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아 제토와 단유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에드가 호기심을 누르고 주방에 들어갈 때, 레이도르가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얼마나 머무를 건가?”
“밥만 먹고 바로 돌아갈 거야.”
“이런. 자네랑 술잔을 기울이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이 아쉬워 하겠는데?”
레이도르는 제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들 밥 먹이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저녁에 술 한잔 마신다고 뭐가 문제려나?”
“그래서 자네 아이들이 계속 밖으로 나도는 게지.”
에드의 북슬북슬한 털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웃음소리를 냈다.
“먹고 살길 찾으려고 나가는 애들이야 당연히 장려해야 할 것 아닌가? 제토도 이제 다 컸는데, 말 나온 김에 술 한잔해 볼래?”
제토가 솔깃한 제안을 눈을 빛냈지만, 새까만 아버지의 눈빛에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우리 애는 내가 알아서 키울 테니까 자네는 신경 끄고 밥이나 가져와.”
“이런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혀를 차며 에드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다시던 제토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다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빠, 빨리 돌아가야 돼요?”
“왜?”
“이왕 온 김에 루치드한테 마을 구경도 시켜주고 그러면 좋잖아요? 루치드도 여기는 처음이니까 궁금하기도 할 테고.”
제토의 속셈이야 아버지뿐만 아니라 단유도 쉽게 눈치를 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사냥꾼으로서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도 있겠지만, 역시 사람 없는 산속에서 오랜 기다림을 익히는 것은 젊은 나이의 아이에게 쉽지 않은 일이니까.
레이도르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실 레이도르 입장에서 단유를 어리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제르아 오마를 넘어왔다는 그의 주장도 믿을 수 없지만, 자신도 가볍게 들기 힘든 어미 돼지를 어깨에 지고 마을까지 한 번을 쉬자는 말 없이 묵묵히 따라왔다. 아들인 제토와 같은 나이라는데 힘은 이미 자신과 비등한 수준으로 보이니 경계를 풀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철없는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저 수상한 아이에게 친근감을 보인다. 물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그만큼 외롭게 자란 탓이리라.
“루치드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고 네 마음대로 결정할 셈이냐?”
결국 선택은 단유에게로 넘겨졌다. 어젯밤과 똑같은 선택지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마을까지 확인했고 언어의 문제가 없으니 단유 혼자서라도 주변을 탐문해서 정보를 얻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단유는 그게 쉽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제르아 오마, 대산맥을 넘어온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함에 있어 레이도르가 단서를 걸었던 말이 있었다. ‘제토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어릴 때’라는 조건은 지금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다는 뜻이니 단유가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일부러 먼 길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잠깐 구경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아저씨한테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요?”
레이도르는 눈을 빛냈다. 어젯밤과 같은 선택을 내렸음을 간접적으로 알린 것이다. 아직까지는 단유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조금 더 심력을 낭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 하지만 눈을 보건대 자신의 아들에게 해를 끼칠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모처럼이지만 집에 가서 청소나 해야겠다, 제토. 집 청소를 마치면 외출을 허락하마.”
“진짜요?”
제토는 신이 난 얼굴로 이를 잔뜩 늘어 보였다. 아들의 활짝 핀 웃음꽃에도 레이도르는 웃지 않았다. 그 사이 에드가 가져다 놓은 맥주잔을 들어 입을 축일 뿐이었다.
레이도르의 집은 마을 변두리에 있었는데, 주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집을 비울 때가 많아 무기나 비싼 것들은 없지만, 살림살이는 더 많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 동네 사람들은 다들 얼굴을 알기 때문에 도둑은 없어.”
단지 얼굴을 알기 때문에 도둑이 없다는 것보다는 이곳의 경제 자체가 남의 것을 탐낼 정도로 궁핍하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도둑은 경제적 빈곤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경제적 격차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소규모 공동체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빈촌에서의 생활과 비슷하달까?
“도와줄게.”
“정말?”
레이도르는 도구들을 점검하기 위해 대장간으로 향했고 제토와 단유만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쌓인 먼지만 닦아 내면 되니까, 여기 쓸고 있을래? 내가 물을 길어 올게.”
제토가 물통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아냐, 내가 물을 길어 올게. 힘이 더 좋으니까.”
“아, 그렇지.”
제토는 단유의 팔뚝을 툭툭 두드린 뒤 씨익 웃으며 물통을 건넸다.
“마을 우물은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핀 아저씨네, 아, 그러니까 여기서···.”
“아까 오면서 봤어. 우물이 어디 있는지.”
“아, 그래? 그럼 부탁해.”
단유는 물통을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마른 바닥에서 먼지가 일었다. 곧 겨울이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딱히 춥다는 느낌은 없었다. 지나는 사람들도 딱히 두꺼운 로브를 걸친 이가 없으니 이곳이 원래 따뜻한 지방이거나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더운 것일 수도 있겠다.
주변을 살필수록 단유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지구에서 지낼 때 배운 것들이 영향을 미친 것인지, 주변 사람들이 먹고사는 생활과 환경, 기후, 사회 규칙과 경제, 법 등이 모두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며 지내는 걸까? 어떤 규칙과 통제 속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걸까? 외부에서도 사람이 온다는데 그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 작은 마을을 방문하는 걸까?
우물가에 도착하니, 몇몇 아주머니들이 외줄에 바구니를 매달아 물을 뜨고 있었다. 뜻밖에 원시적인(?) 형태의 수원(水原)을 보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하다못해 펌프 같은 것이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한 가지가 더 궁금해졌다. 이 세계의 기술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