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27화 (427/956)

바스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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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단유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감은 지 2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낯선 환경 탓에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까치집을 한 제토가 눈을 비비다 단유를 보고 물었다.

“응.”

단유는 대충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다. 벌써 허리에는 각종 도구를 끼워 넣은 가죽띠를 메고, 고리에 짧은 단검을 채우고 있던 제토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아버지도 단유를 향해 눈길을 돌린 참이라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여상하게 대답하는 단유를 보던 제토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 옆으로 미세하게 붉은 핏줄이 보이는 것을 보니, 그도 편히 잠을 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줄곧 신경을 곤두세웠으리라.

하지만 누구보다 심란한 건 역시 단유였다. 갑자기 ‘봉인’이라도 된 건지, 좌표를 구해내는 계산이 되지 않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단유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돌아갈 수 있을지,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그 무엇하나 지금으로써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제토의 아버지는 커다란 활을 들고 마당에 나타났다. 단검의 반대쪽에 활통이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었는데, 가슴 쪽의 줄을 잡아당기자 활통이 죽 끌려 올라가더니 등에 비스듬히 매어졌다. 만약 활을 계속 쏴야 할 때는 가슴에 매어져 있는 장치를 풀기만 하면 활통이 다시 옆구리로 떨어져 내리니 단순한 장치지만 유용해 보였다.

제토의 아버지가 단유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

단유 본인이 상대의 입장이라도 난감하리라. 집에 두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초면에 같이 가자고 말하기도 쉽진 않은 일. 차라리 지난 밤 어딘가로 떠났다면 편했을 것인데 말이다.

“같이 갈래?”

제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단유는 제토의 눈빛이 어린 시절의 명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마 제토는 또래(?) 친구의 등장이 반가운 것일 테다.

“그래도 되나요?”

단유는 제토의 눈빛을 무시하고 떠나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제토의 아버지란 이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하는 점도 있었다.

“···그래라.”

단유는 부자의 사냥에 따라나섰다.

알고 보니 세리산이라고 부른 산은 제토의 집이 있던 산의 맞은편이었다. 숲속으로 난 길을 30여 분 정도 걸어 내려가니 푸서릿길이 나왔는데, 그곳에서 산굽을 따라 양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우리 마을이 있어.”

제토가 오른손을 들어 가리킨 방향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긴 하지만 그 사이로 쭉 뻗은 길이 산과 산 사이로 지나가 넓은 들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마을이 보이지는 않았다.

반대편을 돌아보니 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웅장한 산맥이 보였다. 높이 솟아오른 봉우리들에 비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산은 그저 언덕 정도에 불과할 정도였다.

골안개가 피어 신비스러움을 더하는 그 산은 과연 대산맥을 볼 때와 비슷한 장엄함이 엿보였다. 빈촌 마을에서 대산맥을 볼 때는 그저 높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높은 벼랑과 무시무시한 바위들로 뒤덮여 과연 사람이 오를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 봉우리들 사이로 희끄무레하게 꿈틀거리는 빛덩어리가 보였다.

“서두르자.”

제토의 아버지가 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간이 산돼지들이 막 잠에서 깨어 먹이를 찾느라 느릿느릿 움직일 때라 사냥하기가 편하다는 제토의 설명이 이어졌다. 과거에 단유 역시 무슬라를 따라 여러 번 산행을 하며 그와 같은 지식을 얻은 바가 있었으나, 이제까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라 단유는 금방 제토의 설명을 이해했다.

세리산은 곧은 나무들이 별로 없었다. 마치 소나무를 보는 것 같기도 한데, 소나무와 달리 잎이 넓은 나무들이라 단유는 신기했다. 단유가 두리번거리며 주변 환경을 살필 때, 제토의 아버지는 단유의 허리께까지 오는 야생 회양목들이 수북이 자란 가운데로 들어가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살폈다.

“아직 지나가지 않았나 보군.”

산돼지들이 주로 지나가는 길목이 회양목 자생지 사이였는데, 그곳에 덫을 미리 놓아두었던 모양이었다.

“향이 좋아서 벌레들이 많이 모이거든.”

제토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향을 찾아 몰려드는 벌레들을 기다리는 동물을 사냥하는 산돼지. 그리고 그 산돼지를 사냥하기 위해 덫을 놓은 사냥꾼.

단유는 제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뒤를 따라갔다. 단유의 덩치도 큰 편이라지만, 제토의 아버지는 우람하다는 말로 다 설명이 힘들 정도여서 그의 옷을 빌려 입은 단유는 소매가 너무 덜렁거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몇 단을 접어 올려붙이니 좀 낫다.

“조심해라. 팔에 독 옮는다.”

제토의 아버지가 그 모습을 봤는지 한 마디를 했다. 역시나 제토가 재잘재잘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나무들 중에 잎에 독이 있는 나무가 있어. 피부에 닿으면 빨갛게 부어오른다고. 나도 예전에 멋모르고 지나가다가 닿아서 한참 고생한 적 있거든.”

단유는 옻나무 정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인 소매를 내릴 생각은 없었다.

한참을 더 올라가다 사냥꾼이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제토와 단유도 걸음을 멈추고 제 자리에서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걸음 소리가 죽으니 희미한 콧소리가 들렸다. 킁킁거리는 소리는 누가 들어도 돼지의 그것이었다.

사냥꾼이 활을 빼 들고 비스듬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겨눴다. 활시위가 팽팽해질 때까지 당긴 채로 기다리던 사냥꾼의 움직임에 제토와 단유는 침을 삼키는 것도 참으며 지켜보았다.

사냥꾼이 바라보는 방향은 새벽 안개 때문에 시야가 그렇게 선명하진 않았다. 점점 옅어지고 있던 참이라 아예 보이지 않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확히 사물이 구별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이를 노려보는 사냥꾼의 팔은, 지금 활시위를 힘껏 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유의 시계(視界)에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안개를 흩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정물화처럼 고정된 풍경에 이질감을 만들었다. 제토 역시 그 모습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냥꾼은 보았던 모양이다.

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친 시위에서 날아간 화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임을 보였던 물체에 꽂혔다.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비명소리가 꽤액 하고 터져 나왔다.

사냥꾼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다시 활을 하나 더 시위에 매겨 다시 그곳을 향해 쏘았다. 여전히 비명을 지르던 돼지가 다시 찾아온 충격에 비명 대신 도망을 선택했다. 안개를 헤치며 달리기 시작한 돼지의 덩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 스크로파의 돌진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릴 만큼 커다란 덩치의 산돼지는, 짧은 다리로 땅을 박차며 산 위쪽을 비스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냥꾼의 손에서 벌써 세 번째 화살이 떠난 중이었고, 네 번째 화살을 메기는 와중이었다. 멀리 달아나기도 전에 뒷다리 위쪽을 맞은 돼지는 근육을 다친 것인지 달려나가는 속도가 반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네 번째가 날아가 돼지의 목 언저리에 꽂히면서 돼지는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어지간한 덩치가 아니어서 그런지 네 대의 화살을 맞고서야 움직임이 멎은 돼지에게 사냥꾼이 단검을 빼 들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가자!”

제토가 신이 난 얼굴로 일어나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단유 역시 몸을 일으켜 뛰어가는 제토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다가갈수록 돼지의 커다란 덩치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크고 흉악한 덩치를 가진 스크로파의 돌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던가 신기할 정도다.

“제토, 뛰지 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의를 줬다. 아직 완전히 숨이 멎지 않은 돼지기에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함이고, 또 다른 짐승이 있을지 모른다는 경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유가 주위를 돌아보니, 달리 위험해 보이는 짐승은 없는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는 짐승은 검은 눈으로 사냥꾼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냥꾼은 단검을 들고도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그 눈을 주시했다. 다리를 버둥거리는 돼지지만 땅을 박차고 나갈 힘을 얻지 못해 검은 흙만 긁어낼 뿐이었다.

“지금 저렇게 보여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치고 나갈 수가 있거든? 그래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돼.”

제토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단유에게 알려주었다. 물론 단유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쓰러지다가도 갑자기 일어나 달려들던 몬스터와 마주하기까지 했으니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끼익.

흠칫 놀란 제토가 고개를 돌렸다. 돼지가 뛰쳐나온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에 단유도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자세를 낮추고 단검을 뽑아 든 제토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소리가 난 방향을 지켜볼 때였다.

“새끼다.”

여전히 돼지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냥꾼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 어미구나.”

제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뽑아 든 칼로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 말처럼 곧 안개를 헤치며 다가온 것은 무릎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은 갈색 돼지였다. 털이 어미에 비해 억세지 않은지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이는 돼지가 바닥에 닿을 듯이 코를 아래로 내리고 총총 달려왔다. 마치 명수가 거실 바닥에 흘린 과자를 주워 먹기 위해 바닥을 훑으며 달려오던 호빵을 보는 것 같았다.

아기 돼지는 어미의 꼬리께에 닿아서 코를 킁킁거리더니 삐익, 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어미가 킁킁거리며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커다란 머리가 바닥을 훑으며 작게 먼지를 일으켰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 이상 자신의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기 돼지는 킁킁거리며 어미의 등을 따라가더니 마침내 어미의 머리 쪽에 닿았다. 시선이 맞닿자 아기 돼지가 끙끙거리며 코로 어미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런다고 밀려날 어미가 아니었지만, 아기 돼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먹이를 찾으러 나선 어미가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온 것일까? 아니면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뿔이 난 아이의 투정일까?

그때 사냥꾼이 움직였다. 빠르게 몸을 아래로 숙이며 들고 있던 칼로 어미의 목을 찔렀다. 어미의 시선이 아기 돼지에게로 간 틈이었다. 칼이 찌르고 들어간 틈으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어미 돼지의 심장이 많이 느려졌던 탓인지 피는 금방 솟구침을 멈추고 목 주위를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빼액, 다시 아기 돼지가 비명을 지르더니 몸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나 완전히 달아나진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어미를 지켜보는 아기돼지였다.

“여기, 잡고 있어라.”

사냥꾼은 아들에게 목을 누르고 있던 칼을 계속 붙잡고 있도록 주문했다. 아들은 대답 대신 재빨리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단검을 힘껏 붙잡고 눌렀다.

“여기 돼지는 좋은 걸 많이 먹어서 그런지 피가 신선하거든? 그래서 피가 많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해야 돼.”

불필요한 설명이었지만, 제토는 계속 단유에게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데 공을 들였다.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사이 사냥꾼은 활을 빼 들더니 아기 돼지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당연히 아기 돼지는 사냥꾼이 보이는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곧 화살은 정확히 아기 돼지의 미간을 뚫었다. 단말마의 비명도 없는 죽음이었다.

“와! 비싼 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토가 기쁨에 찬 소리를 질렀다. 말인즉슨, 아기 돼지가 꽤 비싼 요리 재료로 이용되기 때문에 비싸게 팔린다는 이야기였다.

사냥꾼은 새벽이슬로 젖은 흙을 저벅저벅 밟아 나가 화살을 집었다. 화살을 집어 들었을 뿐인데도 아기 돼지가 박힌 채로 공중에 들렸다. 얼마나 절묘하게 박혔는지 아기 돼지는 피도 흘리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지금 막 떠오른 동녘의 햇살이 반사되어 단유의 시야에 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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