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26화 (426/956)

바스크(2)

-------------- 426/952 --------------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야 단유는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식사 전에는 쾌활하기만 하던 제토가 단유의 나이를 알고 난 뒤부터는 괜히 서먹해 하는 것 같았지만 따뜻한 화로 곁에서 맛있는 수프로 배를 채우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시 명랑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름이 뭐야?”

단유는 모처럼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루치드.”

“루치드? 여기 사는 것 같진 않고, 어디서 왔어?”

단유는 고민하다 말했다.

“녹스.”

“녹스?”

제토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제토의 아버지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기를 다듬던 도구를 정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모르는 곳이면 되게 먼 곳인가 봐?”

그 반응에 오히려 단유가 당황했다. 녹스를 모른다? 그럼 정말 여긴 어디지?

단유는 기억을 더듬어 또 다른 지명을 떠올렸다.

“아크리스토스 아세요?”

이번에는 제토의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아크리스토스, 쓸모없는 땅이란 의미로 드뷔시의 최남단, 녹스가 있던 곳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핀체노가 가르쳐줬던 그 이름을 떠올린 단유가 기대를 품고 물었다.

“아크리스토스?”

제토의 아버지가 살짝 놀라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틈에 단유는 제토의 아버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눈꼬리가 약간 아래로 쳐진 그의 눈은 검고 깊었다. 눈꼬리 근처의 깊은 주름은 그의 고된 세월을 드러내는 것 같고, 왼쪽 눈 아래의 희미한 흉터는 거친 젊은 시절을 보낸 훈장처럼 보였다. 희끗해진 귀밑머리 아래에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긴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흘러내린 앞머리가 짙은 눈썹 위에서 흔들렸고, 껌뻑이는 눈꺼풀을 지나 불거진 광대뼈는 사내의 성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듯 다부지게 보였다. 레고 조각처럼 각진 턱은 굳건한 심지를 보는 것 같았고, 다듬지 않은 턱수염이 야성적인 남성성을 드러냈다.

“들어본 적 있다.”

“정말요?”

제토가 더 호기심을 가지며 되물었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단유를 바라보았다.

“제토, 니가 태어나기 전일 거다. 마을에서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제르아 오마(zerua horma)에서 넘어오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왔다고.”

제르아 오마? 하늘의 벽(sky wall)? 단유는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뜻은 이해되지만 지칭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토는 엄청나게 놀란 얼굴을 하고 단유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제르아 오마를 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아버지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아주 가끔 거기에서 넘어오는 이가 있다더구나. 나도 본 적은 없고 이야기만 들어서 믿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단유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르아 오마가 뭐죠?”

껍질이 일어날 정도로 거친 입술을 가진 제토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제르아 오마는 하늘을 가릴 만큼 높은 산맥이다. 사람은 누구도 넘어설 수 없다고 알려졌지. 그래서 그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단유는 매우 익숙한 설명을 들으며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가끔 그곳을 넘어왔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산을 넘는데 체력을 다 쏟은 것인지, 마을에 다다르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이 없지.”

단유는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르아 오마’라는 곳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산이 맞는다면, 그래서 이곳으로 온 사람이 있다는 말도 사실이라면, 어쩌면 단유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자신이 염원했던 일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르아 오마라는 산맥은 혹시 동쪽에 있나요?”

“제르아 오마는 태양을 낳는 산이다.”

단유는 제르아 오마가 ‘대산맥’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마을에서 늘 대산맥의 산줄기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했었으니까. 핀체노도 대산맥을 일컬어 ‘인간이 넘어갈 수 없는 자연의 험지’라고 표현했다. 그 스스로도 생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내겠다며 대산맥으로 향했었다.

“그 산을 넘어오는 이가 많나요?”

제토의 아버지는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얼굴로 단유를 보다가 말했다.

“다른 곳에서 넘어오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잘은 모르겠다만, 내가 살았던 마을에서는 넘어오는 이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조금 남아있긴 해도 많지는 않은 편이었다. 말했듯, 대부분 마을에 도착할 때 즈음 다들 죽거나 혹은 죽어가는 중이었으니까.”

제토의 아버지는 완전히 몸을 돌려 단유에게로 향했다. 이미 모든 도구는 가죽 띠 안에 가지런히 정렬된 뒤, 곱게 접혀서 아버지의 옆에 놓여 있었다.

“나야말로 묻지 않을 수 없군. 네 입으로 ‘아크리스토스’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으니 분명 제르아 오마를 넘었음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 산을 넘을 수가 있었냐고 말이다.”

단유는 말문이 막혔다. 단유의 침묵에도 제토와 제토의 아버지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침묵의 추궁에서 단유는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모르겠어요.”

“모른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지만, 이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제 기억은 이 집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거든요. 그리고···.”

단유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들여다보았다. 지구에서 입고 있던 옷도 아니고, 자신의 고향, 빈촌에서 입던 옷도 아닌 처음 보는 복식이었다.

“이 옷도 제 옷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 옷은 우리 아빠 옷이야.”

제토의 말은 단유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처음 봤을 때, 벌거벗겨진 채여서 처음에는 강도를 만난 건가 싶었는데, 이곳에는 강도가 없거든? 그래서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옷 벗고 다니다가 다쳐서 쓰러진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고.”

미친 사람이면 깨어났을 때 큰일일 수 있지 않을까? 단유가 몰래 그 생각을 하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 제토의 아버지가 저 도구를 멀리 떼어놓지 않은 이유. 굳이 저녁 식사 시간에 고기를 베어서 정리하던 이유가 실은 단유가 미친 사람인지 혹은 경계해야 할 사람인지를 몰라 주의하던 중이었음을, 저 날카로운 칼과 꼬챙이가 단순히 고기를 걸기 위한 도구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단유는 제토의 아버지에 관한 판단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조심성이 많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슬기로운 지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아무튼, 단유가 벌거벗은 채였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단유가 이곳으로 건너올 때는 복식에 대해 걱정을 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늘 빈촌의 마을 사람들이 입고 있던 복식과 유사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교복을 입고 있던, 사복을 입고 있던 이곳에 오면 한결같이 같은 복식으로 변해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오는 경우는 그가 누군가를 강제로 이곳에 데려올 때만 그랬다. 그것도 끌려오는 이들이 벌거벗은 채였지, 단유는 늘 같은 복식이었다.

의문을 품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의아한 일이었다. 왜 저들은 벗고 있을까. 하지만 매번 이곳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늘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던 상태여서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해 고민에 빠질 틈이 없었다.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자신이 원래 이곳의 주민이기 때문이고, 그가 데려온 이들은 이곳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지만, 어설픈 논리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단유로서는 명쾌하게 그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유가 벌거벗은 채로 오게 되었다. 그것도 대산맥 너머로.

단유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챘는지, 제토의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밤이 늦었으니까, 우선은 자자.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오늘 못한 사냥 거리를 구해야 하니까 좀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구나.”

처음의 말은 모두에게 한 말이었고, 뒤의 말은 제토에게 한 말이었다. 제토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제토를 먼저 방에 들여보낸 뒤, 제토의 아버지는 단유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방이라기보다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잠자리가 충분치 않지만, 대충 이곳에서 저 가죽을 깔고 누우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아직은 경계를 풀 수 없다는 제토의 아버지였다. 하긴 단유가 두루뭉술 설명을 한 탓에 정체가 모호해진 탓도 있었다.

“고맙습니다.”

“혹시 볼일을 보고 싶으면 저 문을 써라. 나가면 밖에 덤불이 많으니까, 적당히 일을 보면 될 거다.”

거기까지 설명하고 제토의 아버지는 제토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유는 적당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어둠이 자리 잡은 방구석 대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덮치며,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대자연의 청량함이 느껴졌다. 작은 집 마당에는 잡초가 듬성듬성 나 있고, 울타리 하나 없이 그대로 숲과 이어졌다. 모래가 바삭거리는 마당 가운데로 향하니 주변이 훤히 보였다. 아마도 세리산이라는 곳 언저리라 추정되는데 산장이라 불러야 할지, 별장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모옥(茅屋)의 뒤로 높은 벼랑과 산이 서 있었다. 벼랑 때문에 혹시 모를 산짐승들의 습격은, 적어도 집 뒤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았다. 마당 앞에 뻗은 산길은 숲속을 가로지르는데, 아마도 이 산의 아래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단유는 고개를 들었다. 산자락에 가렸는지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얀 별빛들이 마치 고향에서 보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유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구의 기준에서 보면 이 세계는 자신이 살던 세계고 그러니 이곳의 하늘은 모두 자신의 고향에서 보는 하늘과 같은 하늘일 것이다. 하지만 제토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낯설게 느껴졌고, 고향의 하늘과 ‘다른’ 하늘인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모옥을 바라보니 벌써 잠이 들었을 리 없건만,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마 이것도 아버지의 배려이리라. 만약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조용히 떠나라는.

‘그래도 가죽을 쌓아놓은 곳에 눕히는 건 아니지.’

만약 자신이 그 가죽들을 들고 가면 어쩌려고? 한때나마 녹스 최고의 사냥꾼과 함께 생활해 봤던지라 가죽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가죽들을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리에 깔고 누울 수 있게, 아니 의심스러운 사람이 들고 갈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놓아둘까?

아마 제토의 아버지는 잠이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단유가 이 집을 떠날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단유가 가죽을 들고 간다면, 도둑이라고 생각해서 붙잡으려나?

다행히도 단유가 그런 물욕(?)이 없으니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설령 있다 해도 제토의 아버지는 단유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단유는 공간을 넘나드는 마법사니까.

우선 단유는 집으로 가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도 자신이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면, 걱정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어?’

단유는 좌표 생성에 실패했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 저장된 좌표를 불러오려 했지만 좌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유는 당황한 채로 머리를 붙잡고 쪼그려 앉았다. 세게 머리를 붙잡고 어떻게든 좌표를 만들어내려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돌아가기 위한 좌표를 떠올릴 수 없었다. 마치 ‘벽’에 부딪친 것처럼 어느 순간 계산이 멈춰버렸다.

‘돌아갈 수 없어?’

단유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피다가 커다란 나무 하나를 눈에 담았다.

곧 그 나무 옆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단유는, 마치 소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듯 강하게 그 나무줄기를 붙잡고 좌표를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나무가 벼락 맞은 대추나무도 아니고, 신령이 깃든 신목(神木)도 아닌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산자락에 가려져 있던 달이 하늘 중앙에 다다를 때쯤에야 단유는 계산을 포기하고 말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그대로 풀밭에 드러누운 단유는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하얀 달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숲을 뒤흔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비명을 지르고 풀들이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했지만 단유는 그저 멍한 눈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괜한 심술에 바람을 일으켜 보았지만, 안 되는 이유를 몰라 답답함만 쌓일 뿐이었다. 대신 얼굴을 뒤덮었던 땀은 거센 바람에 모두 말라버리고 버석한 소금기만 남아 찝찝함을 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