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25화 (425/956)

바스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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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

단유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목소리를 가진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넌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괜찮아. 난 널 기억하니까.”

“언제 만났다는 거죠?”

“음···처음 만났던 건 아마 니가 ‘리아빈’을 건너고 있을 때였을 거야.”

리아빈? 단유는 뒤늦게 리아빈이란 지명이 가리키는 곳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너무나 넓고 광대한 늪지대. 그곳을 빠져나가는 길이 마치 미궁과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리아빈’이었다. 그리고 단유가 그 리아빈을 지나갔던 경험은 오직 한 번이었다.

“라보네와 함께 있을 때 말인가요?”

“그렇지.”

단유는 기억을 되짚어봐도 이런 목소리를 만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은 니가 살았던 집에서였지.”

“네?”

목소리는 흥미롭다는 듯 콧소리를 내더니 이죽거리는 듯 물었다.

“생각 안 나? 난 엄마를 버리지 않았어요! 난 동생을 버리지 않았어요! 전 원하지 않았어요! ···너의 의지로 이 길을 걷더니 너의 의지로 권능을 부정했었지.···그때 넌 완전자로 향하는 길을 부정했었다.”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굵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는 엄숙함으로 가득 찬 재판관의 그것처럼 묵직한 울림을 단유에게 던졌다.

“넌 너의 길을 가겠노라고 선언했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단유가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하는 사이, 목소리의 울림이 와 닿았다.

“그랬던 니가, 다시 완전자의 길을 엿보고자 하니 결국 운명인가 싶다.”

“완전자(完全者)?”

목소리는 화제를 돌렸다.

“너는 뭘 찾는 중이지?”

다시 익살맞은 목소리로 돌아온 그의 질문에 단유는 가만히 대답을 궁리하다 대꾸했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진리, 혹은 진실.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 오롯이 정당할 법칙.

“과연 그런 게 있을까?”

단유는 곰곰이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기원을 찾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지만,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명확한 논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진리’는 존재한다.

“나는 또다시 너의 길을 엿보며 즐거움을 얻을 거야.”

목소리는 쾌활하게 단유의 길을 환영했다.

“무슨 뜻이죠?”

“아이들이 바른 길을 찾아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부모의 즐거움이지.”

“부모?”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아버지이신가요?”

“나는 너의 아버지이고, 너의 친구의 아버지이며, 너의 아버지의 아버지. 모든 이의 부모이며 모든 이의 기원(起源).”

절대자.

단유는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당신은 신이군요?”

“신?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신은 인간의 초월에 기댄 관념일 뿐이지 않아?”

“그렇다면 당신은 실체를 가지고 있나요?”

“그 반대야. 나는 그저 존재할 뿐.”

목소리의 울림이 단유를 스치고 지나가자, 단유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신이, 제게 좌표를 남겼군요?”

“아닌데?”

“아니라고요?”

“그것은 애초부터 니가 알던 것. 단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해 주었을 뿐.”

“그렇다면 다른 좌표는,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나요?”

“그건 니가 구할 답이지, 내가 건넬 답은 아니야.”

목소리의 잔향이 단유의 방향 감각을 어지럽혔다.

“그렇다면 왜 다시 제 앞에 나타나신 거죠?”

“내가 나타난 게 아냐. 니가 나에게 온 것이지.”

“제가 뭘 했길래요?”

“너는 뭘 하고 있었는데?”

모든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니 단유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냥 대답해주시면 안 돼요?”

대답이 없었다. 거대한 진공관에 들어간 듯 이명이 귀를 울렸다. 잠시 후 작아진 목소리가 단유의 귀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기억하거라.”

기억하라고? 뭘?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다가 단유는 정신을 잃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이 바람인지, 풀인지, 아니면 작은 개미 떼인 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단유는 손을 들어 코를 문질렀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었던 것 같다. 정신이 돌아오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로 빛이 들어오면서 온몸에 감각이 돌아왔다. 마치 어렸을 적 아이들이 하던 얼음 땡 놀이처럼, 지금까지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가 갑자기 술래가 땡, 하고 녹여준 것 같았다.

입에서 뜨거운 신음을 뱉으며 몸을 일으킨 단유는 자신을 덮고 있던 두꺼운 이불을 벗겨냈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지 주위가 흐릿해 보였다. 하지만 일단 어둡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내 방은 아닌데.’

일단 누워있던 자리의 느낌이 단유 방의 포근한 침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딱딱한 나무 침대와 거칠한 질감의 이불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점차 눈에 초점이 맞으면서 주위의 것들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낯설지만 한편으론 익숙한 분위기의 실내였다. 톱밥 냄새가 가득한 나무 벽과 곧지 않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풀을 엮어 조악하게 지붕을 덮고 있는 천장. 흙과 돌이 뒤섞인 바닥과 아귀가 맞지 않는 나무를 맞대어 만든 외벽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이 모든 것이 단유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좌표가 생긴 이후, 강제로 이곳에 끌려온 적이 없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득 머리가 지끈거려 단유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뭔가 복잡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인데.’

항상 꿈에서 뭔가를 보고 들은 것 같지만, 막상 꿈에서 깨어나면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 원래 꿈이 그런 식이니까. 가끔 단편적인 기억이 남을 때도 있지만 그건 운이 좋은 경우지, 라며 단유는 머리를 저었다.

지금은 팔자 좋게 꿈이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닫힌 문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구수한 냄새를 맡다 보니 더는 자리에 누워있을 수 없었다.

단유는 침대에서 벗어나려다 몸이 꽤 많이 굳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몸 관리를 철저히 하는 편인지라, 아무리 깊은 잠이 들었다 해도 몸이 이렇게까지 굳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몸인데도 낯선 느낌이었다.

아무튼 단유는 억지로 바닥에 발을 딛고 서서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호흡으로 몸의 긴장을 풀고, 몸의 구석구석에 에너지를 보냈다. 가볍게 몸을 떨어 근육을 이완시키고, 사지에 힘이 제대로 전달되는지를 가늠했다. 몸의 상태가 적당히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후, 단유는 경계태세로 조심스럽게 닫힌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려다 단유는 습관적으로 문고리를 찾고 있었단 사실에 피식, 실소를 지어 보였다.

슬쩍 문을 열고 바깥의 동태를 살펴보려 고개를 내미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어, 깼네? 아빠! 깼어요!”

쾌활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단유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채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에 담았다. 이제 10살이나 됐을까? 몸은 왜소했지만 커다란 눈에서는 밝은 빛이 날 만큼 깨끗하고 선명했다.

“이리 와요.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걱정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얼굴이 되게 어려 보이네요? 몸은 우리 아빠만큼 큰데?”

활달한 성격이란 것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단유는 화로 위에 올려둔 냄비에서 흘러나오는 냄새가 자신이 맡았던 구수한 냄새의 정체임을 깨달았다. 단유의 시선이 냄비에 가 있음을 눈치챈 아이가 손에 든 국자로 냄비를 휘저으며 물었다.

“배고파요? 조금만 기다려요. 우리 아빠가 오면···.”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들어왔다. 아이는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아빠! 이 형 깨어났어요!”

“나도 봤다.”

무뚝뚝한 사내는 등에 짊어진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죽이 벗겨진 고깃덩어리였다. 겉에 묻은 물기로 보아 방금 씻어서 온 모양이었다. 아래가 갈라져 있으니 내장을 모두 들어낸 것 같다.

“우선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아이는 그거 넣어야죠, 라고 대꾸하면서도 국자로 휘휘 젓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칼로 고깃덩어리 일부를 조금 잘라내 냄비 안에 퐁당 집어넣었다. 여러 조각을 넣으니 곧 구수한 향이 진해졌다. 어딘가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에 단유는 처지도 망각하고 식욕이 동했다.

“이리 와서 앉아라.”

사내는 왼쪽 발을 뻗어 옆에 있던, 작은 나무 둥치를 베어 만든 것 같은 의자를 단유 쪽으로 보냈다. 단유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경계하고 있으면 우리가 나쁜 사람인 거 같군.”

사내는 여전히 호기심 많은 얼굴을 하고 단유를 훔쳐보는 아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설마 우리 아들이 저 국자로 네 머리를 깨부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단유보다 아이가 먼저 반응했다.

“이게 무기가 돼요?”

고작 수프를 젓는 일에나 쓰던 국자로 사람 머리를 부술 수 있나, 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들에게 사내가 말했다.

“내 머리는 안 돼도 니 머리는 깨질 거다.”

“으휴, 아빠는 꼭 나한테 이런 무서운 걸 시키더라.”

아이는 무섭다는 듯 국자를 엄지와 검지로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장난 그만하고, 계속 저어. 눌어붙으면 맛없다.”

단유는 부자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생각 안 나요?”

단유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들이 아버지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설명했다.

“세리(txerri) 산 입구에 형이 쓰러져 있었어요.”

“세리 산?”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거기 멧돼지들이 꽤 많이 살 거든요? 아빠랑 자주 사냥하러 가요. 물론 나는 덫에 잡힌 것들만 잡을 뿐이지만요. 하지만 1년만 지나면 아빠가 활을 가르쳐 준다고 했으니까 내년부터는 나도 본격적인 사냥꾼이 되는 거예요. 그렇죠?”

사내는 묵묵히 남은 고기를 베어서 정리하고 있었다. 벽에 걸려있던 꼬챙이에 큼지막하게 잘라낸 고기를 꽂아서 옆에 놓아두는 모습을 보는 단유에게 아이가 설명했다.

“아, 저거요? 저건 훈제를 할 거라서 지금은 못 먹어요. 이제 곧 겨울이라 비상식량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사내의 오른편에 벽난로처럼 보이는 화덕이 보였다. 작은 돌과 진흙으로 조잡하게 만든 그 화덕을 관찰하니, 그 위에 꼬챙이들을 걸 수 있는 막대가 가로 지르고 있었다. 화덕에서 위로 향하는 굵은 기둥은 연기가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그런데 형은 어디서 왔어요?”

“나?”

그때 사내가 단유를 힐끔 보더니 아들에게 물었다.

“제토. 넌 왜 계속 ‘형’이라고 부르는 거냐?”

“예?”

아들, 제토가 단유를 위아래로 훑더니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버지에게 속삭이듯 대꾸했다. 하지만 셋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황에서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덩치가 아빠만 한 걸요?”

“얼굴은 어려 보이는데?”

제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른이 보는 눈은 다른가? 제토가 우물거리다 물었다.

“몇 살이에요?”

단유는 나이를 말하기에 앞서, 과연 이곳에서도 같은 셈법을 쓰는지 혹은 어떤 역법(曆法)으로 날짜를 세는지 궁금해졌다.

“15살인데요.”

“네?”

제토가 놀라서 국자를 놓쳤고, 하마터면 냄비 속으로 기어들어갈 뻔한 국자를 아버지가 빠른 손놀림으로 잡아챘다. 아버지는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15살인데?”

같은 나이라서 억울하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는 제토였다. 정확히는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단유의 팔과 다리를 훑는 제토의 얼굴이 화로의 불빛 때문에 노란색으로 울렁거렸다.

이미 방 안에서 해가 저물었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지구식으로 계산하면 대략 6시에서 7시 정도일 거로 추측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식사를 하면서 이를 물어본 단유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까와는 달리 시무룩한 얼굴을 한 제토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내려올 때였으니까 얼마 안 됐어···.”

어색한 맺음말이었다. 여전히 제토는 단유를 ‘형’과 ‘동갑’의 경계선에 두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이었으니까.”

예전에도 느꼈지만, 이곳 사람들은 시간을 지구 식으로 구별하지 않았다. 해뜨기 전, 해 뜬 후, 해가 높이 떴을 때, 해가 지기 전, 해가 진 후, 정도가 그들이 시간을 감지하는 기본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녹스에서는 특별히 종탑의 종을 쳐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었다. 처음 한 번의 종소리가 나면 하루의 시작이었고, 10번째 종소리가 나면 하루의 끝이었다. 밤에는 종을 치지 않았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란 개념을 이용하는 무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사람이 그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일과를 정한다면, 특정 세력은 시간의 흐름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이용한다. 그리고 그 세력은 아마도 귀족들이나 관청에서 일하는 이들과 같은 상위 계층일 것이다.

단유는 불필요한 잡생각들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는 위치를 물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죠?”

제토가 눈을 좁히며 되물었다.

“세리산이라니까? 그럼 넌 어떻게 여길 온 건데?”

단유는 할 말이 없었다. 모르겠다는 말 밖에는. 제토는 도리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단유를 보며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아까도 그렇지만 제토의 속삭임은 너무나 잘 들렸다.

“아빠, 얘 뭔가 위험한 사람 같은데?”

사내는 아무 표정 없이 손에 든 고기 수프를 후루룩 마시기만 했다. 그러다 단유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물었다.

“맛이 없나?”

단유는 손에 든 고기 수프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구경하라고 준 거 아니다.”

단유는 서둘러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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