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5) -수정(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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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상의할 게 있는데요.”
단유가 화제를 돌려 묻자,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던 하은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단유는 학교에서 있었던 교장과의 대화를 짧게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처벌을 한다는 거지?”
“처벌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선생님은 제가 교장 선생님께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세요?”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말하기를 좋아하는 하은다운 시원한 대답이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즘은 학생들도 자기 할 말은 하고 사는 시대야. 하다못해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댓글들이 다 뭐겠니? 자기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겠다는 의지인 거잖아? 게다가 내가 너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설마 교장 선생님께 예의 없이 굴었겠니?”
“교장 선생님은 절 버릇없는 아이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건 교장 선생님이, 꼰대라서 그래.”
하은은 이런 표현 밖에서 쓰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좋게 말하면 기성세대요,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하고 편협한 이를 일컫는다.
“그들은 그들이 지낸 세월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 있지. 모름지기 사람이 얻는 지식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지식이라면 역시 ‘경험’에 의한 지식 아니겠어? 경험치가 많을수록 그 경험에 의해 얻은 지식에 대한 믿음 또한 크고 공고할 수밖에. 그들이 살아온 세상, 그들이 거쳐온 질서에 대한 믿음 또한 크지. 때문에 그들은 변화에 익숙하지 않아. 전통과 도덕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구(舊)질서를 따르고 동시에 강요하거든.”
단유는 어느 정도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오늘의 대화를 복기해봐도, 교장은 끊임없이 ‘전통’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강요했었으니까.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였지만,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남다르지. 새로운 가치관, 젊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가볍다고 여기거든. 전통이 짧으니까. 그리고 그 가벼움이 기존의 질서로 정돈된 세계를 어지럽힌다고 보지. 그래서 그들은 새 가치관을 부정하거나 멀리하게 돼. 자신의 가치관이 부정당하면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한다고 생각하거든.”
인생이 부정당한다는 말은 단유에게 와 닿지 않았다. 그게 어떤 느낌일지도 감히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건 한국에 한정해서 추측 가능한 부분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부터 우리나라는 예(禮)를 숭상했어. 유학의 잔재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없진 않지만, 나쁘게 볼 문제만은 아닐 거야. 기본적으로 예는 대인관계에 있어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니까.”
그 점은 단유도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아니 오히려 예를 높게 생각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예’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야만성을 절실하게 겪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약자로 여겨 업신여기거나 경시하던 이들의 시선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하지만 꼰대들에게 예는 단지 자기보호의 수단이기도 하고, 전통의 고수라는 사고방식의 원천이기도 해. 오랜 세월 이 나라를 지켜온 가치관이기에, 그 유구한 역사에 따라 옳은 것, 바른 것이라 생각하고 동시에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전통’이라고 분류를 하는 것 같아.”
“단지 그런 이유로 옳다고 생각하는 건 좀 비약이 심한데요?”
“적자생존의 사고방식인 거지. 그 가치관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지켜진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라는 거? 거기에 자신의 경험이 겹쳐져 일종의 신화(神話)를 만들어내는 거야. 아무튼 꼰대라고 지칭할 만한 이들이 젊었을 적에, 당시의 사회와 교육이 그런 가치관을 옹호하고 지키기를 원했고, 이를 체화(體化)한 꼰대들은 지금의 아이들이 보기에는 너무 편집(偏執)적으로 보일 수 있는 거지.”
명수는 거실 러그 위에 자는 호빵 옆에 누워 지켜보다가 잠이 들었다. 하은의 이야기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던 모양이었다.
“전통과 도덕을 강조하는 건,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변치 않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보수적 가치관도 한몫한다고 봐.”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는 하은은, 그 리듬에 맞춰 생각을 다듬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틈에 단유가 물었다.
“교장 선생님이 전통적 가치관의 옹호자란 사실은 이해하겠어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제가 말을 아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
“불편해지니까요.”
“교장 선생님과의 관계가?”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학교와의 관계가 전부 불편해지지 않을까요?”
교장 선생님의 권력 관계도에 대해서는 단유 본인이 직접 거론했다. 비록 그의 권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언급하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와 교사, 학생에게 투사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교장의 힘이라면 자신의 학교생활이 불편해질 가능성은 있었다.
하은은 싱긋 웃었다.
“설마 이제야 그 생각을 했다는 거니?”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네요. 낮에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할 때 그러지 않을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좀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달까?”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래서 높은 분들과 맞서는 게 어려운 거야.”
너 블랙리스트에 오를지도, 라고 우스갯소리를 덧붙이던 하은은 실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맞서 싸울 때도 필요한 거야. 그게 너의 양심과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말이야. 아니, 너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맞서 싸워야지.”
하은도 사실 불의를 보고 못 견디는 축이었다. 싸움은 못 해도 말싸움은 언제든 할 준비가 되어 있던 그녀였다.
“대신 그만큼 너도 희생을 각오해야겠지. 만약 지금 그런 희생이 걱정된다면, 내일 아침에 교장실에 찾아가서 공손하게 사과를 하던가. 그런데 안 그럴 거잖아?”
“네.”
전혀 없다. 늘 그렇지만, 단유는 자신의 말에 진실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때문에 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려고 한다. 단지 불편 때문에 사과를 한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야지.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반성할 부분이 있다면 과연 그 상황에서 말을 꺼냈던 것이 옳으냐는 선택의 문제지, 그 내용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하은은 단유가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 ‘상의’를 할 게 있다고 말했음을 기억했다. 무언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바가 있을 것이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했으리라.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하은은 단유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까지보다 더욱 진지한 얼굴을 했다. 하은은 성심성의껏 단유의 고민을 듣고 함께 논의해 주었다. 하은은 결코 자신이 이 아이들의 ‘선생님’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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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학교에 나간 단유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과 마주했다. 교문 앞에서 마스크를 끼고 자체 제작한 플랜카드를 든 일군의 학생들을 보게 된 것이었다.
「장계 중학교는 각성하라.」
「논의 없는 교복 변경 철회하라.」
「교육 개혁, 우리가 먼저다.」
언제 이런 모의를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수의 학생들이 시위판을 들고 학교 정문에 이르는 길에 늘어서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교가 주택가 근처에 있어 근방의 사람들이 출근하던 중에 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운동장은 더 심했다. 운동장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모여서 교무실을 향해 소리를 치고 있었다.
“학생들도 학교의 주인이다!”
“주인을 무시하는 졸속 행정 철회하라!”
“교육 개혁 우리가 시작한다!”
“비리 재단 물러가라!”
물론 그 목소리도 교문 밖에까지 들렸다. 안과 밖에서 호응하여 구호를 외치니 그들의 모습이 사뭇 비장하게 보이는 건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개인은 약하지만 군중은 강하다던가? 다소 지나치게 비장한 얼굴을 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그들은 용감했다. 비록 머리에 머리띠를 두르지도 않았고, 깃발을 흔들지도 않았지만, 조악하게 쓴 스케치북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단유는 교장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에게 영향이 갈 겁니다.”
이런 것일까? 정말 자신의 말이,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게 한 것일까?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이런 모습을 예상했던 것일까?
단유는 중앙현관을 통해 달려오는 선생님들을 보며 발걸음을 돌렸다.
“왜?”
곁에 있던 명수가 단유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조금 불편해서.”
명수는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로 고민이 많다는 것을 엊저녁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명수였기에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았다.
“김 단유!”
누군가가 단유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단유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최초 시위를 벌였던 우병석이란 선배였다.
“너도 이리 와라! 같이 하자!”
단유를 보고 밝은 표정을 짓던 그는 당연히 단유가 와서 같이 목소리를 함께 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단유가 함께 한다면 더욱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씁쓸함을 삼키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려 교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의 아이들이 수군거렸지만, 단유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학생들을 교실로 돌려보내세요.”
교감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엿보였다.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일단 수가 많아졌다는 점도 있었지만, 감사가 나와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돌발행동은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감의 다급함과 달리, 아이들도 평소의 모습과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자신감이 있었고, 자신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견고한 믿음이 있었다. 단지 단유의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유의 일에 대한 네티즌들의 지지와 언론의 기사들이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탓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단순히 교복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행하는 학교라는 제도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단유의 ‘교육 개혁’과 그가 교육부의 높은 분들 앞에서 당당하게 소리치던 모습이 저항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의 저항에 공감하며 뜻을 세웠다.
단톡방과 학교 커뮤니티 안에서 철저히 토론을 거쳐 방법을 강구하였기에 이들의 행동은 돌발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사명감에 넘쳤다. 그들의 주장은 순수하게 정의를 향한 소리였고, 숨겨진 의도가 없었기에 당당했다.
“빨리 교실로 돌아가지 않을래!”
“너! 지금 안 들어가면 부모님 부를 거다!”
‘부모님’을 언급하면 다수의 아이들이 움츠러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오히려 아이들은 더 당당하게 소리쳤다.
“부모님이 저희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더 좋은 교육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선생님들이 강제력을 행사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게다가 조금 있으면 교육청 사람들이 올 것이다. 아무리 사전에 이야기를 맞춘 이들이라 해도 이런 광경을 보고 눈감아줄 이들은 아니었다. 교장은 교장실 창 너머로 운동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망할 놈들.’
그리고 9시가 다 되어가지만 아이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학교 정문을 통해 차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교무실로 들어온 이들은 교육청에서 온 감사관들이었다.
“운동장의 학생들은 무슨 일입니까?”
“네? 아, 저기···.”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하지만 교감은 그보다 먼저 물어볼 게 있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오셨던 분들은···.”
감사관이 바뀌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나요?”
감사관의 날카로운 눈빛이 교감을 훑자, 교감을 찔끔 놀라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
“···그럼 대답 드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아마 지금쯤 어디 사무실에서 상위 감사기관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꼬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존의 감사관들도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고 소정의 대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에서 누군가의 연락이 오고, 얼마후 기존에 파견된 감사위원에게 의혹이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교육위원회에서 사람이 파견되면서 현재 감사담당관실이 혼란에 빠졌다.
비록 지금 감사관들은 그 일에 관여한 바가 없지만, 동료를 곤란에 빠뜨리게 한 이 재단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저희는 처음부터 새로 감사를 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기존에 검수 되었던 서류들도 다시 제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관 책상 위에 불필요한 자료는 모두 치워주시고요. 여기 이런 책상보 따위가 필요합니까?”
교감은 아찔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넌 왜 저기 안 나가냐?”
도하가 물었다.
“내가 왜?”
단유가 되묻자 도하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너도 교육개혁인가 하는 거 하자고 했던 거 아냐?”
도하가 시비를 거는 게 아니란 것은 단유도 알고 있었다. 순수하게 호기심에 물어보는 것임을 안다. 알지만 불편했다. 게다가 도하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당연히 저 밖에 있는 이들, 학교에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나가면 마치 내가 저 일을 주도한 것처럼 보이잖아.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저런 방식도 아니고.”
“그럼 어떤 방식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