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19화 (419/956)

주홍글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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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을 나와 대학교를 빠져나오던 중,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마치 공원처럼 조성된 대학 입구 근처에서 단유는 유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유진은 근처 벤치에 앉아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먼저 단유를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단유야!”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랜 시간 함께 보낸 친구인 양 구는 유진의 태도가 조금 꺼림칙하게 느낄 법도 한데, 워낙에 표정이 밝고 주저함이 없어서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 오늘 대단하더라!”

진심으로 감탄하는 유진의 시선에 단유가 머쓱해 할 때, 옆에서 말없이 걷던 선생님이 단유에게 물었다.

“너 혼자 집에 갈 수 있지?”

“네. 선생님 먼저 가시겠어요?”

“그래. 너무 오래 밖에서···아니다, 알아서 잘 들어가도록 해라.”

단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단유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선생님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유진도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곧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거기서 그런 말을 할 생각을 다 했어? 설마 준비 없이 그냥 말한 건 아니지? 평소에도 그런 생각 많이 해? 뉴스나 신문 같은 거 자주 보는 편이야?”

단유는 어쩐지 익숙한 대화 진행에 서둘러 손을 들었다.

“거기까지.”

“응?”

“만약 묻고 싶은 게 있으면 하나씩 물어봐. 그렇게 물으면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잖아?”

“그럼 전화번호 뭐야?”

“응?”

“핸드폰 번호 알려줘.”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번호를 알려주었다. 핸드폰에 단유가 불러준 번호를 입력한 유진이 단유의 이름을 저장하다가 물었다.

“이렇게 쉽게 알려줘도 돼?”

“···그럼 애초에 물어보질 말았어야지.”

“혹시나 했지.”

키득거리며 저장을 끝낸 유진이 다시 물었다.

“아까는 왜 그랬어?”

“뭘 알고 싶은 건데?”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야,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거.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하면 홍보대사 못 할걸? 원래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일부러 난장판 만들려고 그런 거야?”

“마치 내가 고약한 심보를 가지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처럼 보였어?”

“아니, 그렇진 않았지만 솔직히 잘 이해는 안 돼. 교육제도니 뭐니, 하는 거. 게다가 넌 전교 1등이라며? 그런 애가 왜 교육제도를 비판하고 나서? 그리고 교육부의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 앞에서?”

“그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있건 낮은 자리에 있건 나랑은 상관없지. 딱히 그분들을 모욕하려던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단지 현재의 교육제도에 대한 내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을 뿐이야.”

“원래 하고 싶은 말은 못 참고 다 뱉는 성격이야?”

“표현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진 않아. 보통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편이고.”

“그런데 왜 그랬어?”

“할 말은 해야 하니까. 그리고 내가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 속에 없는 말을 하더라도 거짓이 섞이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한치의 사심도 없이 정면으로 부딪친 거네? 멋지다, 너!”

뭐가 멋지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단유는 유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부모님들한테 가봐야 하지 않니?”

날씨도 쌀쌀한데 벤치에 멀뚱히 앉아 딸을 기다리는 유진의 부모님이 보여 물었다. 유진은 뒤로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 친구랑 이야기하는 건데.”

“그런 뜻이 아니고, 부모님이 기다리시니까 가보란 뜻이야. 나도 이만 집에 갈 거니까.”

“아, 그래? 많이 피곤해?”

“그래. 어쩐지 지금 많이 피곤하네.”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

“연락?”

“전화번호 알려줬잖아? 연락해도 된다는 뜻 아냐?”

“굳이 연락할 이유가 있을까?”

“친하게 지내자고. 너 같은 친구 있으면 어쩐지 나중에라도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으니까. 아, 너 여자친구 있어?”

아까도 물었던 내용이었는데, 이번에는 대답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있어.”

“아, 진짜? 아쉽네.”

단유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작별을 고했다.

“갈게.”

“응. 오늘 수고 많았어.”

“너도.”

유진이 먼저 손을 들어 보인 뒤, 곧 부모님께로 뛰어갔다. 단유는 가볍게 유진의 부모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정문을 빠져나갔다.

부모님은 다가오는 유진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자랑스레 ‘번호 받았다’며 이야기하는 딸의 등을 찰지게 때렸다.

“넌 어떻게 된 애가 그렇게 가볍게 굴어? 엄마가 밖에서 조신하게 굴라고 했지? 아까 교실에서도 엄마가 너 그럴까 봐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도 쪼르르 달려와서 말이야, 어른들 보는 앞에서 교양 없이 굴고 말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엄마가 뭐라고 그랬어? 친구는 가려 사귀랬지?”

“뭐 어때서? 전교 1등이나 할 정도면 머리도 좋고···괜찮은 거 아냐?”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말도 잘하는’ 이란 속내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딸을 나무랐다.

“니가 그러니까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 아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그런 소리나 하고 앉았어? 솔직히 엄마는 아까 핸드폰으로 보다가 식겁했어. 그런 애는 나중에라도 사고 칠 애니까 행여라도 가까이 지낼 생각 마.”

“그런 애 아냐.”

“아니긴? 니가 뭘 안다고 아네 마네 하니?”

오늘 처음 본 주제에, 라며 딸을 타박한 어머니는 날씨가 차갑다며 유진의 손목을 붙잡고 정문을 빠져나갔다. 정문 근처에서 기다리던 아버지의 코끝이 붉어진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간 단유는 명수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역시 단유 넌 기대를 버리지 않아!”

도대체 무슨 기대를 했길래?

“또 발칵 뒤집었다며?”

“또, 라니?”

“됐어, 그런 사소한 문제는 접어두고. 아무튼 듣는데 통쾌한 기분이 들더라.”

“진짜?”

단유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자, 명수가 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 사실은 댓글에 그런 내용이 많더라. 솔직히 네가 하는 말은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

“댓글?”

문득 지난 일들이 생각나 단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네 신상 다 떴어.”

각오했던 바였다. 작년에 이미 겪은 바 있지 않던가.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각종 데이터가 퇴적층(堆積層)을 이룬 채 그 위를 활보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겹겹이 쌓이기만 할 뿐 사라지지 않으니, 언제라도 드러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니 이번 사건으로 단유의 신상명세가 다시 떠오를 것이란 것은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혹시라도 용돈 벌이가 될까 살펴봤는데, 별로 악성 댓글은 없더라.”

“용돈 벌이?”

“악성 댓글 다는 사람 고소해서 합의금 받는 거.”

단유는 그런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며 명수를 다독이곤 방으로 들어갔다. 명수는 그런 단유의 뒤를 졸졸 쫓아와 물었다.

“그런데 너, 뒤탈은 없는 거지?”

단유는 교복을 벗으며 물었다.

“뒤탈?”

“댓글 보니까 마티즈 올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그게 무슨 뜻이야?”

인터넷과 친하지 않은 단유는 ‘용돈 벌이’니 ‘마티즈’니 하는, 명수의 비유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명수의 설명을 들은 뒤,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나한테는 안 오겠지.”

“그럼?”

단유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학교에는 올지도’라고 대답했다.

****

월요일이 되어 단유가 학교에 갔을 때, 단유는 예상치 못한 환대에 어리둥절했다. 같은 반이 아닌 애들도 단유를 보며 아는 체를 했고, 어떤 선배는 속이 시원했다며 단유의 등을 툭툭 치기도 했다. 교실에 들어갔을 때는 더 했다.

아이들은 단유의 얼굴을 보자 환호를 보내고 손뼉을 쳤다. 3반의 소란에 옆 반 아이들이 창가로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단유보다 늦게 온 아이들도 가방을 자리에 던져놓고 단유에게 와서 무용담을 청했다. 하지만 무용담이랄 것도 없는 것이, 이미 영상으로 모두 공개된 데다가 단유네 반의 3분의 1은 실시간으로 영상을 시청했었기 때문이다.

“그때 면접관들 표정이 정말 궁금하다.”

“옆에 앉은 애 얼굴 봤냐? 완전 당황해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거?”

“얘는 못 봤겠지. 계속 정면만 보더만.”

“근데 옆에 앉은 애는 되게 예쁘던데.”

“연예인 같더라.”

“혹시 인사했냐? 손 한 번 잡아봤어?”

“손만 잡았겠냐? 으흐흐.”

“으흐흐.”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는 이러쿵저러쿵 떠드니 정신이 사나웠다.

“할 말 없으니까, 다들 자리로 가지, 응?”

“야, 그것만 얘기해줘. 옆에 애랑 인사했어? 이야기해 봤어?”

“인사했지? 했네, 했어.”

“했구나. 했어.”

어쩐 일인지 평소라면 인상을 쓰며 아이들을 째려봤을 도하도 얌전히 책상에 앉아 아이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슬쩍 보니 즐기는 얼굴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단유 본인이 이 소란을 견디기 힘들었다.

“제발, 그냥 좀 가라. 니들이 본 거 이상도 이하도 없으니까. 응?”

“어제 댓글 봤냐? 완전 단유 찬양 글!”

“혁명가라던데?”

혁명은 무슨.

만약 선생님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교실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진심으로 단유가 화내는 모습을 구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단유 대신 선생님이 화내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누가 봐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여서 아이들은 얼른 입을 다물고 신속히 자리로 복귀했다. 선생님의 좁혀진 미간이 펴질 줄 모르는 가운데, 선생님과 단유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선생님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선생님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상태였다. 단유를 비롯해 아이들 보기가 부끄럽다는 마음도 있지만, 토요일에 교장에게 힐난을 받고, 월요일 아침 회의 때 교감으로부터 온갖 눈치는 다 받은 상태라 짜증이 잔뜩 올랐다. 그뿐인가. 출근하는 순간부터 교무실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동료들과 말 한마디 속 시원히 하지 못했다. 혼자 죄인이 된 것마냥, 그렇게 자리를 지키며 교무 수첩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그 때문에 선생님은 미처 보고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선생님은 단유의 변함없는 표정과 그 표정으로 물었던 질문들이 다시 상기되자, 짜증 대신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누군가 말했다. 요즘 교사는 편하지 않냐고.

‘편하긴 개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교사로서의 자격이 있나 하는 회의감과 동료로부터 질책에 가까운 시선을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괴로움 때문이었다.

“이제 진짜 기말고사까지 한 달 남았다. 그러니까.”

기말고사 따위가 문제일까.

“수업시간에 다들 집중하고 별말 나오지 않게 행동 조심하고 공부에 집중해라.”

아침 전달 사항에는 ‘기말고사 기간 고지, 바른 수업 태도 견지토록’ 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대체 학교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경고하고,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제는 이런 글을 봐도 무슨 의미인지, 어떤 의도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학교에 교육청 감사 나온 거 알지? 복도에서 떠들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거기까지 말한 담임은 한숨을 짧게 뱉으며 수첩을 덮었다. 마지막 전달 사항은 말하기 거북했다.

“그리고···지난 토요일의 일은, 되도록 언급하지 않으마. 하지만 너희들도 잘 알아둬.”

담임은 수첩을 세게 쥐며 말했다.

“단유는 너희들을 위해 이야기를 한 거다. 너희도 조금은 진지하게 단유가 했던 말을 숙고할 수 있도록 해라.”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선생님과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잠시 단유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인사도 받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은 다른 반에서는 ‘토요일에 있었던 인터넷 사고를 주제로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시 한 번 주지시켜라’는 전달 사항을 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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