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계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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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당당한 걸음만큼이나 다부지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모중학교 2학년 정유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공모제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꿈과 끼를 찾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한 손 거들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살짝 미소마저 베어 물며 여유를 보이는 유진은 화면에서도 그 당당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기운찬 학생이네. 보기 좋아요. 그럼 몇 가지 물어보죠. 학생은 취미가 뭔가요?”
“네. 제 취미는 연극 감상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예전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으셔서 저를 데리고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 등에 많이 데리고 다니셨는데, 배우들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배우들의 연기에 전율을 느끼곤 했습니다. 배우들의 땀과 열정이 오롯이 느껴지는 연극에 관심이 생기면서 공부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설명하실 때 눈에서 빛이 나는 걸 보니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주 좋아합니다.”
어물거리는 말 없이 똑 떨어지는 발음은 듣기에도 좋았고, 내용도 명확해서 심사위원들은 유진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 그렇다면 자유학기제에 관해서 1분 스피치, 해볼까요?”
“네.”
자신 있게 대답한 유진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시작했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취미가 연극 감상이고 꿈도 연극인일 만큼 연극이라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연극배우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연극배우라는 것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고, 깊게 생각해볼 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 학교가 지난해부터 시행한 자유학기제 때 저는 제가 관심을 가졌던 연극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연극을 직접 체험하는 활동을 하게 되면서 제 꿈을 구체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 역시 자유학기제 기간 동안 자신의 진로를 탐색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음을 좋아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진학과 시험이라는 것에 갇혀 스스로의 꿈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얼마나 부족했는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전 제 꿈을 찾아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다른 친구들도 다 같이 느낄 수 있도록, 자유학기제를 통해 자신의 적성을 빨리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깔끔한 유진의 설명은 귀에 잘 들어왔다. 일부 학생들이 하듯이 괜히 어려운 단어를 써서 멋있는 척도 하지 않았고, 앞서의 취미와 관련된 질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 스피치 전략도 꽤 좋았다. 면접관들도 화면을 통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하게 설명하는 유진의 스피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었습니다. 정유진 학생,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여 마무리 인사를 하는 것까지 깔끔했다. 스스로도 무사히 잘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드는 유진의 얼굴에 더욱 여유로운 미소가 배어 있었다.
“자, 다음은···. 김단유 학생?”
“네.”
단유의 차례가 되었다.
“엄마, 얘가 아까 걔야.”
담임 선생님은 이어폰을 고쳐 끼는 척하면서 주변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괜찮아. 지금 화면으로 보니까 키는 별로 안 중요한 것 같아.”
“정말?”
“그래, 보니까 얼굴도 많이 굳었네.”
실제로는 그저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라 긴장했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애써 어머니는 아들의 기를 살려주려는 의도로 말했다.
“진짜? 나도 봐봐.”
어머니는 혼자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중계를 해주고 있었다.
“아냐, 넌 보지 마. 괜히 긴장할라.”
아들을 다독이며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 어머니를 훔쳐보다 선생님도 얼른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김단유 학생의 이력서를 보니 꽤나 화려한데요, 일단 중학 2년 동안 줄곧 전교 1등을 했다고요?”
면접관의 말에 단유 옆에 앉았던 두 소년 소녀가 고개를 돌려 단유를 쳐다보았다.
“아뇨. 줄곧은 아니고 한 번 3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 한 번을 제외하고는 계속 1등이네요?”
“네.”
선생님은 어쩐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학부모와 선생님들에게 ‘어때, 우리 애가 이 정도야!’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얼굴, 외모도 꿀리지 않지만 말이야.’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간다.
‘어서, 그다음도 말해줘요, 면접관님.’
“그리고···여기 보니까, 서울교육청주관 수학경시대회에서도 금상을 받았고요?”
“네.”
“혹시 얼마 전 있었던 전국 수학경시대회에도 나갔었나요?”
“네.”
단유의 단답형 대답이 조금 답답하게도 느껴졌지만, 면접관은 그저 쑥스러워 그러는 거겠거니 생각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때도 상을 받았나요? 무슨 상을 받았죠?”
“금상을 받았습니다.”
세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얼굴만 잘생긴 모델을 뽑는 것보다는 타의 모범이 될만한, 우수한 모범학생을 뽑는 게 아무래도 좋지 않겠냐는 이유에서였다.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군요. 평소 수학에 관심이 많았나요?”
“네.”
“그렇군요.”
면접관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혹시 미래 진로도 정했나요?”
“아뇨,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면접관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요?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갈 길을 정했을 거 같은데?”
이를테면 수학자나 물리학자, 혹은 의사나 법관과 같은 엘리트 코스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했는데 말이다.
“구체적으로 진로를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어 천천히 생각해보겠다는 이유도 있고, 현재의 공부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화면에는 면접관의 모습이 비치지 않아 모르겠지만, 실제 단유 앞에 앉은 면접관들은 좀 더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고개를 앞으로 빼서 단유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1등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느라 진로를 탐색할 여유가 없었나 보군요.”
면접관 나름의 설명은 중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전교 1등 하는 학생이라도 시험과 공부에 치여서 제대로 진로를 탐색할 여유가 없다지 않은가? 그러니 한 학기만이라도 시험에서 자유로운 ‘자유학기제’를 시행한다면, 이런 학생이 차분하게 자신의 진로를 찾을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면접관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정유진이란 학생도 좋지만, 이 학생도 나름 전략을 잘 짰어.’
특히 전교 1등이라는 배경이 좋으니, 더욱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에 집중한다는 것은 맞지만, 전교 1등이란 순위에는 별로 연연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순된 발언이지만, 겸양의 표현이라 생각하며 면접관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래, 혹시 학생은 평소 취미 생활이 어떻게 되나요?”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말을 골랐다. 당당한 모습을 보이던 유진도 무릎 위에 올려났던 손을 감히(?) 움직여 제스처를 취하는 데 소극적이었는데 단유는 평소랑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물론 평소의 모습을 잘 아는 담임 선생님이기에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독서입니다.”
“어떤 책을 읽죠? 최근에 읽은 책은?”
“최근에는 Stephen T. Thornton 의 <일반역학>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역학이요?”
추가 설명을 요구하는 면접관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목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역학에 관한 기초적인 학문으로 행렬과 벡터, 벡터 계산, 뉴턴 역학, 해밀턴 원리, 중심력에 의한 운동 등을 쉽게 풀이해서 이해를 돕는 책입니다.”
면접관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 그러니까 물리학에도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군요.”
“네. 특히 역학에 관심이 많아서 최근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면접관은 머리를 긁으며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까 전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보자면, 학과 공부가 아닌 개인적인 취미(?)에 몰두하느라 전교 1등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자칫 다른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거나 자격지심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겸손한 줄 알았더니, 어쩌면 거만한 것일지도.’
엘리트 특유의 오만함인 걸까? 게슴츠레 뜬 눈으로 단유를 살피는 면접관들이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1분 스피치 들어볼까요? 무척 기대되네요.”
단유는 짧은 숨을 뱉어낸 뒤, 입을 열었다.
“얘, 뭐야?”
“물리 역학? 얘 혹시 영재학교 다니는 애 아냐?”
“다 가졌네, 다 가졌어. 머리 좋고, 얼굴 좋고.”
“이런 애들 모아놓으니까 저런 애도 나오는구나.”
“1%의 학생들 중의 1%? 뭐 그런 의미인가?”
“그런데 굳이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해야 돼?”
“면접관이 먼저 물었잖아?”
“그래도 저렇게 대답하면 괜히 거리감이 느껴지잖아? 만약 진짜 취미가 저런 책을 읽는 거라고 해도 적당히 평범한 취미로 바꿔서 말하면 안 되나? 내가 보기엔 일부러 지 자랑하려고 말한 거 같은데?”
선생님은 듣다가 화가 나서 대신 항변할 뻔했다.
‘자랑은 무슨 자랑! 그럼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다는 거야, 뭐야! 승마가 취미라고 말이라도 했어야 속이 시원할까? 어떻게 사람들이 다 저렇게 속이 꼬였대?’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면서도 단유의 인터뷰를 계속 지켜보았다.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곧 1분 스피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자유학기제는 분명 학생들의 진로 탐색과 학업 부담을 덜어주는 좋은 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
선생님은 이곳에 오기 전에도 단유가 쓴 1분 스피치 내용을 몇 번이고 살펴본 바가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첨삭지도를 도와준 덕분인지, 자신이 보기에도 꽤 좋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이 정도라면 분명 면접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할 정도였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이 기억하는 스피치의 첫 문장은 저런 문장이 아니었고, 더구나 저런 뉘앙스도 아니었다. 저건 마치.
“하지만 자유학기제가 성공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 조건들이 달성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지원자들과 다른 내용이긴 했다. 다만 면접관들이 저 내용을 좋게 봐줄지 의문이다.
“우선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학생들 스스로가 자유학기제라는 제도를 선용(善用)하여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해야 할 텐데, 그저 학교에서 자유학기제를 실시하자고 해서 따라가는 정도에 그친다면 자유학기제의 본의(本意)는 곡해될 것입니다.”
과연 지금 면접관들은 어떤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것이 선생님은 가장 궁금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홍보대사를 이용한 교육부의 홍보 방책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유학기제의 장점과 활용법을 찾아보게 하고, 이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끔 선택의 여지를 부과한다는 것이 말이죠.”
저건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는 멘트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지금까지 단유가 뱉은 내용이 모두 원래의 원고에는 없는 내용이라는 점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까먹은 걸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표정만 보면 너무 침착해 보여서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두 번째는 교육 시스템입니다.”
“응?”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은 대학 진학에 초점을 맞춘 진학 위주의 교육입니다. 고작 단 한 학기의 자유학기제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 줄 거라고 믿기보다는 오히려 학습의 연속성을 해치는 결과를 부르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지경입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중학교 교육 과정에서 자유학기제가 제대로 그 가치를 발휘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학기제를 도입하기에 앞서 교육 시스템의 교정(矯正)이 우선 되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면접관들은 아까와 다른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대기실의 사람들 또한 비슷한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는데,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소릴 질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얼굴이 붉어진 담임 선생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