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아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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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종철을 향해 손을 뻗어 제지한 단유가 끝까지 들어보란 식으로 종철을 앉혔다.
“고민이 많은 사람은 비판적인 사람이래요. 주변 사람들의 잘못을 평가하고 비판하기 일쑤라고 하네요. 형은 어때요? 주변 사람들에게 비판적인가요?”
안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되묻고 싶었던 종철은, 하지만 대답 대신 단유를 노려볼 뿐이었다.
“힘들다, 괴롭다고 외치는 사람은 자신의 변화가 힘들고 괴롭다고 외치는 거래요. 환경에 자연스럽게 맞춰가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과 기준에 따라 자신을 맞춰가다 보니 힘들고 괴로운 거죠. 고통스럽고요, 두려운 거죠.”
단유를 노려보는 눈에 조금씩 힘이 빠졌다. 대신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반면 단유는 홍차 잔 위의 잔물결을 바라볼 뿐이었다.
“형이 지금 나윤 누나에게 혹은 저에게 느끼는 분노가 저는 그런 비판과 고민에서 나온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형이 고민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고통이라고요.”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힘든가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솔직히 눈앞의 소년을 곁눈질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자리해서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 아니던가. 낯선 이와 마주하여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생소한 경험이지만, 전혀 낯선 느낌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처음 접한 노래를 듣고, 마치 그 노래 속 가사 말이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울컥하던 느낌처럼.
비록 단유가 음률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지만, 카페 안의 여러 가지 소음들, 잔과 찻잔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마주 앉은 사람과 속삭이는 사람들의 소리, 실내에 들릴 듯 말 듯 흐르는 클래식 음악들이 섞여 마치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공간에 앉아 노래를 듣는 기분이었다.
종철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도 아니었고, 그의 마음을 달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종철은 단유의 그 한마디에 오랜 시간 앓고 있었던 병의 정체를 알아낸 것만 같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힘들어.”
힘들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인 세상에서 홀로 맹목적으로 달리기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 뜻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 섞이기 위해 그토록 분전했건만, 여전히 제자리인 것만 같아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시선에 홀로 위축되어 발악도 못 하고 그저 질질 끌려가고만 있었던 게 아닐까.’
연습실의 거울을 보면 훌쩍 자란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져서 힘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마치 나에게만 가혹한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행운의 여신이라도 강림한 것인지 다들 잘만 살아간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세상을 활보한다. 자신은 지하실 연습실에 틀어박혀 햇빛을 보기가 두려운데.
“분노, 증오, 공포심은 단순히 억압된 세상에 대한 표출이 아니라고 해요. 자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그 고민이 해결되지 못할 종류의 것이라고 믿을수록 감정이 거세진다고 해요.”
단유도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홀로 남은 세상에 분노했었고, 악의를 드러내며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을 증오했으며, 언제 또 자신에게 해를 가할지 모르는 세상에 공포를 느꼈었다.
“자존감이 약해질수록 고민은 끝이 없고, 감정은 그 세를 불려가죠. 그래서 그 정신분석학자가 말하길, 자신을 알고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해요.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죠.”
단유는 시선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철의 떨리는 손가락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학자의 말처럼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고 그 모습을 자신의 의지대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것도 정답일 순 있겠죠. 혹은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때로 친구는 나보다 더 나를 정확하게 바라봐주는 존재이니까요.”
단유는 일어나서 카페 한쪽에 비치된 티슈를 집어 왔다. 그리고 종철의 손에 쥐여 주었다. 종철이 영문을 몰라 바라보자, 단유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리켰다.
그제야 종철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몇 마디 말에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자신을 의심하는 고민은 하지 마세요. 그 시간에 자신을 더욱 믿으려고 노력하세요. 그럼 조금은 덜 힘들지도 몰라요.”
제가 그랬어요, 라며 살짝 웃음기를 더한 단유의 목소리에 종철은 눈을 닦다 말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해주는 거냐?”
“글쎄요.”
단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다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누나 때문이죠.”
“나윤씨?”
“누나랑 같은 회사의 같은 공간에서 연습하시는 분이신데, 누나와 자주 마주칠 거 아닌가요? 그런 분이 평소에 껄끄럽게 대한다면 누나도 불편할 테니까, 애초에 껄끄러운 점이 없도록 만들면 좋지 않을까 판단했어요.”
만약 단유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때는 또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단유네 반의 우성이처럼. 단유는 지금처럼 인도적인 방법 대신 다소 강한 힘을 써서 우성을 눌렀다. 확실히 강한 힘은 효과가 즉각적이고 효율적이다. 때문에 우성은 단유와 떨어져 있을 때도 교실 안에서만큼은 쥐죽은 듯 지내고 있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시쳇말로 ‘동공지진’도 일으킬 정도다.
반면 종철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첫째는 그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에 호기심을 느낀 탓이지만, 둘째는 단유가 늘 나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좀 덜 위압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지금 당장은 종철이 단유의 말에 동조, 혹은 감화를 받은 것처럼 굴지만, 그 지속성에 대해서는 장담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때의 위험성에 비하면 낫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복수’를 꿈꿀지 모른다. 복수의 방향이 단유라면 다행이지만, 나윤에게로 향한다면 낭패다.
“나윤씨에게 악감정 없다.”
종철의 말에 단유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 아니 회사에 있는 모든 연습생이 다 같은 ‘동료’들이잖아요.”
에이바운스라는 회사 안에서 하나의 목표, ‘성공’이라는 깃발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그들은 때로는 경쟁자가 되기도 하겠지만, 크게 보면 그들은 동료였다. 때로는 서로를 위로해주고, 때로는 서로를 격려해주고, 때로는 상대의 성공을 축하해줄 수 있는 동료.
종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니가 이곳에 있어 보질 않아서 그래. 얼마나 시기, 질투가 많은 곳인지.”
“모르죠. 하지만 시기, 질투와 같은 것이 모두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증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자신을 믿으라고. 자신이 바로 서면 타인의 모습에 시기나 질투를 하지 않게 돼요. 할 필요가 없죠.”
단유가 잠시 말을 끊고 가만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맹자는 서로 상생하는 공동체의 구성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선(善)’이라고 했죠. ‘선’은 ‘인(仁)’이라고 했으니 정직하고 바른 마음이 선을 이끈다고 할 수 있어요.”
종철이 조금 전과 다르게 눈을 동글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되게 똑똑하구나? 그런 건 외우고 다니냐?”
“아뇨, 그냥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럴 거예요. 제가 책 읽는 걸 좋아하거든요. 형이 노래를 많이 외우듯이, 저도 책을 많이 읽다 보니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혹시 대순진리교, 뭐 그런 건 아니지? 도를 아십니까, 이러는 거.”
“그게 뭐예요?”
정말 모른다는 눈치의 단유를 보며 종철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아, 정말. 울다 웃으면 안 좋은데.”
종철은 눈꼬리를 티슈로 꾹꾹 눌러 마저 물기를 지워낸 뒤, 단유에게 툴툴대듯 말했다.
“너 참 별난 놈이구나.”
“···그런 말, 종종 들었네요.”
웃음을 지었을 때, 아니 그 전부터 종철의 경계심은 꺾인 상태였다. 종철은 그제야 앞에 놓인 냉커피에 손을 가져갔다.
“난 좀 단 게 좋던데.”
시럽을 넣어야겠다며 일어나던 종철을 바라보며 단유는 다시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여전히 떫은맛이지만, 개운한 맛이었다.
이후, 종철은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눈물을 보인 것에 대한 변명이라며 꺼낸 이야기였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란 하소연 같은 것이었다. 나윤보다 더 어린 나이에 회사에 들어와 데뷔의 꿈을 키워갔던 이야기는 사실 다른 이들과 비교해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다르지 않다고 해서 본인이 느끼는 심적 괴로움과 외로움을 폄하할 순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이 가장 아픈 법이니까.
“···아마 그래서 나윤씨에게 질투가 났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난 나윤씨 팬이기도 하니까, 니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종철은 들어올 때와 다른 얼굴로 카페를 나왔다.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갈게.”
이것도 빨리 끊어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종철을 바라보다 단유도 돌아섰다. 그리고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한 나윤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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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야, 너 편지 왔는데?”
“네?”
하은이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며 우편물 여러 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한국번역가협회, 라고 되어 있는데? 너 시험 쳤던 거 결과 나온 거 아니니?”
그러고 보니 이미 결과가 나왔을 시점인데, 컴퓨터로 확인하지 않고 있었기에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편지를 열어보는 단유의 어깨너머로 내용을 훔쳐보던 하은이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우와, 김단유! 너 대박이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번역일도 하겠네?”
번역능력인정시험(TCT)에 합격했다고 해서 취업알선이나 번역 일거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다만 취업 시에나 번역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이력서에 넣을 한 줄 정도는 될 것이다.
“그건 뭐 천천히 생각해봐야죠.”
번역아르바이트라는 일거리가 있다는 것을 이전에 알아본 바가 있었으니, 아마 단순히 중학생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재택근무가 가능하니 시간을 뺏길 일도 적고.
하지만 지금도 꽤 빡빡하게 하루를 사용하는 단유였기에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단유는 다시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는 하은을 바라보며 웃었다.
“번역 알바하면 돈 좀 되겠죠?”
“글쎄다. 내가 그쪽으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 진짜 해 보려고?”
“여유가 되면요.”
단유는 방으로 돌아가 책상 서랍에 봉투를 넣고 다시 펼쳐놓았던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쉽게 생각했던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으니, 조금 답답한 마음이었다. 가을도 이제 다 지나가고, 어느새 겨울의 초입을 눈앞에 둔 시점인데도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학이란 게 꽤 어렵구나.”
단순히 회전에 관한 문제에 천착해서 공부를 시작한 단유는 곧 물체의 운동과 관련된 ‘동역학(動力學)’에까지 손을 뻗게 되었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더 많은 분야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고, 역학 일반에까지 범위가 넓어진 상황이었다.
역학이란 학문의 범용성과 다양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혼자서 해결하려다 보니 부딪히는 한계이기도 했다. 하긴 대학에서 4년을 공부하고도 모자란다는 이야기를 듣는 학문이기도 하니, 어찌 단유 혼자 할 수 있을까.
“이래서 대학을 가는 거구나.”
고등학문을 배우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 그곳에서 우수한 지도자의 가르침 아래 체계적으로 학문을 공부해야 이 연구가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단유의 머리를 지배했다.
‘어떻게 하면 대학에 빨리 들어갈 수 있을까?’
대학 조기 입학. 단유는 다시 책상을 벗어나 하은에게로 향했다. 대학 조기 입학자가 집에 있는데, 혼자 궁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