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아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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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쪽 분께서 먼저 실례하신 거 같은데요?”
단유가 담담하게 종철의 말을 받았다.
“네?”
“방금 하신 말씀은 누가 들어도 비꼬는 거란 걸 알 수 있는 말이었잖아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한다고요? 정작 아무 말 없이 지나가려는 사람을 붙잡아서 말을 걸고,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으셨던 분이 자기 기분 나쁘다고 불쾌해하시는 건 적반하장이겠죠.”
종철은 혀를 찼다.
“말씀 잘하시네요.···난 뭐 그렇게 말을 잘 못 하니까 같이 대화는 못 하겠고. 뭐, 어떻게 네네 지나가십쇼, 이러면 되나?”
허리를 굽혀 굽신거리는 시늉을 하는 종철의 비틀린 미소에도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본인의 의사에 달렸으니까요.”
“뭐?”
눈썹을 치켜세우는 종철에게서 고개를 돌린 단유가 나윤에게 말했다.
“먼저 내려가세요.”
“단유야.”
“괜찮아요. 먼저 내려가요. 여기 정리하고 내려갈게요.”
“뭐, 정리?”
어이없다는 표정의 종철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어린 새끼가 입을 너무 가볍게 놀리네?”
단유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일이 너무 익숙해진(?) 탓에 이렇게 어설픈 시비 따위로는 단유를 겁먹게 할 수 없었다.
“안 싸울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내려가세요. 괜히 누나까지 여기 있다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좋지 않잖아요?”
“단유야.”
나윤은 내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단유의 눈에 서린 굳은 의지를 읽었다. 만약 여기서 내려가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한다면 그것 또한 단유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일 테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그냥 가지 말고, 꼭 얼굴 보고 가.”
“알았어요. 내려가서 연습하고 있어요. 괜히 심란하다고 놀고 있지 말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보며 종철이 중얼거렸다.
“웃기고들 있네.”
이것들이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무슨 허수아비 대하듯 있으니, 무시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윤이 내려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단유가 고개를 돌렸다. 사뭇 진지해진 단유의 눈빛에 종철은 살짝 긴장됐다.
사실 종철은 싸움을 잘하진 않았다. 아니, 싸움을 못 하는 편이었다. 몸이야 워낙에 평소 안무 연습과 헬스 등으로 만든 몸이라 다부져 보였지만, 이때까지 누구와 주먹질 한 번 해본 적 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단유가 눈을 빛냈을 때, 종철은 갑자기 주먹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한 것이다.
하지만 단유 역시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고, 할 생각도 없었다.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으시면 자리를 옮길까요? 여기 있으면 저보다 더 안 좋으실 거 같은데?”
단유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켜 보였다. 확실히 회사 내부 사람들이 이 소란을 알게 되면 아무래도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고작해야 ‘연습생’의 신분이니 더 많은 제약을 받는다.
“너랑 할 이야기 없으니까, 그냥 꺼져.”
하지만 단유에게 끌려가는 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단유와 할 이야기도 없었다. 종철은 콧방귀를 끼고 몸을 돌려 다시 지하로 돌아가려 자세를 취했다.
단유는 종철의 어깨를 잡았다. 종철이 고개를 홱 돌리며 날 선 눈으로 바라보는데, 단유가 그의 어깨를 꾸욱 눌렀다.
“이야기, 하자고요. 들어가지 마시고요.”
이렇게 종철을 아래로 내려보냈을 때, 나윤에게 어떤 위험이 가해질지 모른다. 그런 가능성을 두고만 볼 수 없던 단유는 종철에게 위력(威力)을 가했다. 단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종철이다보니 단유가 힘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놔라.”
“못 놓습니다.”
종철이 팔을 휘둘러 어깨에 놓인 손을 떨치려 했다. 단유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허공을 휘젓는 종철의 팔을 붙잡았다. 빠르게 휘두르는 팔을 붙잡아버리는 단유의 기술에 놀라고, 팔목이 하얘지도록 가해지는 힘에 또 가슴이 철렁했다.
“깡패 같은 새끼가!”
이를 악문 채로 단유를 노려보지만 단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철의 눈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종철은 붙잡힌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단유를 떨쳐낼 수 없었다. 나름 힘에 자신이 있다고는 하지만, 저런 전문(?) 싸움꾼과는 붙어서 이길 재간은 없었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답답함에 분노와 억울함이 가슴을 가득 채울 때였다.
단유가 손을 놓았다. 갑작스러운 단유의 태세전환에 종철이 얼른 뒤로 몸을 빼고는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단유는 머리를 긁으며 난감해하다 말했다.
“죄송해요.”
뜬금없는 사과는 갑자기 날라온 주먹보다 더 강했다.
“뭐?”
한숨을 쉬던 단유가 다시 종철과 시선을 마주했고, 종철은 그 맑은 시선을 피하려 눈동자를 굴렸다.
“저 깡패 아니고요, 마구잡이로 힘을 쓰는 사람도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라니? 이미 충분히 당했다. 오해가 아니라 사실 아닌가?
“1층에 커피숍 있죠? 거기서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하죠.”
“할 이야기 없다고···.”
“정중하게 부탁드리죠.”
단유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뭐야 이게?
종철은 홀린 듯이 단유를 뒤따라 1층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뭐라도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사과의 의미로.”
종철은 단유를 더욱 경계했다. 아까는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할 것처럼 하더니 왜 또 온순한 양처럼 구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너 뭐야? 무슨 속셈이야?”
자리에 앉자마자 소리를 치며 따지고 싶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윽박지르듯 따졌다. 단유는 차가운 홍차로 입을 살짝 축이더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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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잘 마무리했어?”
좁은 연습실 안에 팬이 약하게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네.”
“정말? 싸운 거 아니지?”
하얀 티셔츠 위에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나윤은 단유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제가 싸울 사람처럼 보여요?”
“아니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지.”
단유는 손을 빼서 자신의 턱과 볼을 쓰다듬었다.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네요. 주변 사람들은 다들 제가 힘 좀 쓸 줄 아는 것처럼 보이던데.”
“너처럼 순둥순둥한 애들이 싸움을 언제 해 봤겠어?”
“칭찬인 거죠?”
“칭찬으로 들리니?”
나윤은 피식 웃으며 단유를 안아주었다.
“그래도 안 다쳐서 다행이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 줄 알아?”
단유도 나윤을 마주 안으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렇게 반겨주니까 너무 고마운데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래도 괜찮겠어요.”
“바보야,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이런 일 없어도 자주 안아줄게.”
단유는 말없이 나윤에게 온기를 나눠주었다. 농담으로 마음을 달랜 나윤은 그 이후에야 사정을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별말 안 했어요.”
“어? 너 수상해? 왜 갑자기 시선을 피해?”
“제가요? 제가 언제요?”
“뭐야, 뭐야? 도대체 뭔데?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아뇨, 안 될 건 없지만,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도 자주 볼 거 같은데.”
“자주 봐?”
“연습실 오가다 보면 자주 볼 거 아니에요? 그런 뜻이에요.”
과연 단유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연습실에 틀어박혀 화장실도 가지 않고 있겠다 하면 몰라도, 결국 이 지하 안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될 일이다.
“불편할 거 같은데.”
“그런 생각 안 가지셔도 돼요. 어느 정도는 해결됐으니까.”
“해결이 돼?”
문득 나윤은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를 떠올려 보았다. 분명 종철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단유에게 시비를 걸었다. 자신이 종철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고, 단유도 딱히 종철을 모욕하거나 화나게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니 아까의 상황에서 잘못은 무조건 종철이 한 거였다. 그리고 종철이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아도 종철이 벌을 받아야 하고, 자신과 단유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닿은 나윤이 물었다.
“사과받았어?”
“사과요? 음, 비슷하게 한 거 같아요.”
모호하게 답변하는 단유의 말에 나윤은 토라진 척 시늉했다.
“뭐야, 그게. 확실하게 말을 해봐. 사과를 받았다는 거야, 안 받았다는 거야?”
단유는 종철의 눈에서 분노와 함께 두려움을 읽었다. 내가 두렵다고? 단유는 자신의 어떤 행동과 어떤 말이 종철에게 두려움을 줬던가 되짚어보았다. 지금의 위력 과시는 그저 억제용으로, 종철의 돌발적인 행동을 막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게 두려웠을까?
아니다. 종철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두려운 것이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두려운 것이고, 단유가 어떤 행동을 할지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되자 종철의 분노도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분노가 세 가지 방향으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첫째는 몸의 이상으로 나타나는데, 심한 두통이나 소화 불량 등이 그렇다. 둘째는 폭력적 성향이다.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라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셋째는 불행을 과시하는 형태다. ‘나 괴로워’, 혹은 ‘나 힘들어’ 라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고통은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이며, 피해의식은 분노의 밑바닥에서 올라온다.
종철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단유가 느꼈던 순간의 악의는 방향성을 상실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가 상대를 만나 터져 나온 것이다. 다만 상대를 잘못 만난 탓에 억제되고 말았지만.
그러자 분노는 다른 가면을 쓰고 표출되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단유에 대한 두려움, 주위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지만, 결국 분노라는 감정이 위장하여 드러난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종철은 왜 분노를 느꼈는가? 그 점이 단유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적어도 두려움을 드러내는 이라면 ‘대화’를 시도해 볼만 하다고 여겼다. 단유의 경험에도 비추어도 그렇지만,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보통 두려움이란 감정을 모르거나 억누르는 사람들이다. 그 반대라면 충분히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이견(異見)을 조율할 수 있을 것이다.
“고민, 많으세요?”
“···응?”
종철에게 다행이라면, 단유는 종철이 걱정하는 것처럼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과, 어떤 문제를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을 즐긴다는 점, 또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에 상대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불행이라면 단유는 생각의 속도가 일반에 비해 지나치게 빠르다 보니, 가끔 정상적인 대화의 흐름을 종종 건너뛸 때가 있다는 점이었다.
본래라면, ‘조금 전의 일에서 이러저러한 오해가 있었다’ 혹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렇게 행동을 했고, 그렇지만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행동을 했다’고 상황을 이해시키거나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말이 먼저 앞서야 했다. 하지만 이미 그와 관련된 내용들이 단유 머릿속에서 단계를 지나가 버려 그다음 단계, 요컨대 종철의 행동에 대한 단유의 가정을 검증하는 단계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물론 단유는 멍청하지 않았고, 상대의 반응과 리액션에 따라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 좋은 대화 상대였기에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제가 그··· 아, 그런데 실례지만 이름이···?”
이제야 상대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단유였다.
“내 이름 알아서 뭐하게?”
상대의 경계에 단유는 적당히 건조하게 반응했다. 상대가 지키려는 거리감을 지금 당장 깰 필요는 없었으니까.
“저희는 대화를 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상대의 이름도 모르는 채로 대화를 할 순 없잖아요? 제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함부로 야야 거릴 수도 없고요. 그렇다고 계속 ‘그 쪽분’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그리고 전 김단유라고 합니다.”
“···신종철.”
내키지 않았지만, 어린놈에게 ‘그쪽’이라고 불리는 것도 기분은 나빴다.
“네. 음, 뭐 일단은 종철 형이라고 부를게요. ‘종철 씨’보단 낫죠?”
단유 나름의 농담이었는데, 썩 효과가 좋지는 않았다.
“아까 물었던 말, 다시 물어볼게요. 요즘 고민 많으세요?”
단유는 찻잔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곧 차가운 홍차가 입술을 적시며 혀끝에 살짝 떫은맛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