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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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가 공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옆에서 같이 뛰는 상대 미드필더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후반 시작 후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살짝 고개만 들어 올리면 전광판 시계를 볼 수 있는데도, 시선을 떼기가 두려웠던 탓이었다. 그만큼 경기에 집중하고 있던 동기였기에 길게 이어진 롱패스를 놓치지 않고 받을 수 있었고, 또 옆에 있던 상대 선수 외에 달리 자신을 막을 만한 선수가 없다는 점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패스해, 패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동기는 패스를 할 수가 없었다. 달리기 시작한 뒤로 옆에서 같이 달리는 상대를 가볍게 제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도 자신만큼 지친 거 같은데, 몸의 움직임은 자기보다 훨씬 좋았다. 자신이 어디로 공을 차든, 금방 코스를 읽어낸 후 뺏을 것만 같았다. 또 공을 지켜내느라 아래로 떨어진 시선 탓에 주변에 있을 동료의 위치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동기야!”
하지만 이번의 목소리는 달랐다. 친한 친구의 목소리였고, 가까운 곳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마자 보인 명수의 얼굴에, 머리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반 박자 빠른 패스에 상대 수비수가 뻗은 발에 걸리지 않고 패스는 성공했다.
명수는 공을 받자마자 몸을 한 번 흔들었다. 페인트 동작이었다. 그리고 곧 오른쪽으로 몸을 낮추며 몸을 돌려 공을 빼는 동작에 명수 뒤에 붙어 있던 수비수가 발을 뻗다 넘어졌다.
후반전에는 계속된 슈팅 속에 응원단의 함성도 커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더 큰 함성과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상대 골키퍼가 지르는 비명 같은 외침에 수비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명수를 막아나갔다. 하지만 명수의 선택은 그들의 예상과 달랐다.
명수는 금방이라도 치고 달릴 것처럼 굴더니, 시선과 다른 방향으로 공을 툭 밀어 넣었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공은 사선으로 굴러가더니 명수의 반대편에서 쇄도하던 3학년 선수의 발에 걸렸다.
감독은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후반 시작부터 바로 저 패스를 기다렸다. 상대의 시선이 모두 명수에게로 쏠리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시선으로 페인팅한 탓에 상대는 반대편에서 쇄도하던 3학년 선수를 보지 못했다. 오직 명수만이 그 선수를 봤고, 그 선수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영환아.”
누구 표현대로 마지막 시합이다. 물론 축구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장계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뛰는 마지막 경기일 것이다. 그러니 누군들 그 마지막 경기를 멋있게 장식하고 싶지 않을까? 영환이라는 3학년 선수도 그랬다.
앙다문 턱에 근육이 불룩 나올 정도로 힘을 준 영환은 거침없이 발을 휘둘렀고,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발등으로 공의 중앙을 때렸다.
그리고 후반 37분,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장계중학교 학생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오래 기다린 만큼 그 기쁨도 더했다. 벤치의 선수들이라고 다를까.
경기장을 가로질러 벤치에까지 달려든 선수들과 함께 껴안고 환호를 지르며 골을 축하했다. 감독 역시 있는 힘껏 공중을 향해 팔을 휘저으며 첫 골의 기쁨을 같이했다.
단유도 일어나서 손뼉을 쳐 축하해주었다. 비록 다른 아이들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온몸으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기쁜 마음은 다를 바가 없었다. 얼마나 기뻤냐면, 수학경시대회에서 금상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뻤다. 자신이 골을 넣은 것이 아님에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 동료들과 함께 느끼는 희열과 환희의 순간이 개인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단유는 느꼈다.
솔직히 이들과 그렇게 친하냐고 묻는다면, 단유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감정을 나누며 함께 껴안고 좋아하는 이 경험이 단유에겐 신비롭고 흥분되게 느껴졌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던 것처럼, 마치 언제나 늘 함께일 것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시합의 진행을 위해 다시 선수들은 경기장으로 향했고,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들이 벤치로 돌아왔다. 옆 사람과 방금 전의 ‘환상적인’ 슛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순간의 감정을 공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잘 막기만 하면 우리가 우승하는 거네?”
승리에 한 발짝 다가간 여유가 벤치에 흘렀다.
“방심하면 안 되는데.”
“우리가 방심을 왜 해?”
이제껏 얼마나 잘 막았는데.
응원단에서도 승리를 코앞에 두었다는 생각에 힘찬 함성과 응원이 터져 나왔다. 장계중을 연호하는 소리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상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한 골을 넣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한 그들은, 수비 라인까지 끌어올리며 공격을 향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다 격한 어깨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쉽게 슈팅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시간이 점점 흘러 후반도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단유야.”
단유는 옆에서 툭툭 건드리는 선배의 얼굴을 봤다가, 선배가 눈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코치가 손짓하고 있었다. 시합에 집중하느라 감독의 부름을 듣지 못했던 단유였다.
“네.”
팔짱을 끼고 경기장을 지켜보던 감독이 말했다.
“어쩌다 보니 또 카드 한 장이 남았네.”
오늘은 정말 카드 한 장을 필사적으로 쓰지 않으려 애를 썼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그리고 부디 이 한 장의 카드가 쓰이질 않길 바란 감독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경기가 끝나는데, 어때 생각 있어?”
“···.”
단유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그 순간의 희열을 떠올리니, ‘없다’고 대답하면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긴 탓이었다.
“전반 끝나고 대기실에 있을 때, 너가 빠졌을 때 애들한테 물어봤다.”
무슨?
“만약 한 장의 카드가 남았을 때, 단유 너에게 카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만약 진짜로 그렇게 물어봤다면, 아이들 입장에서는 싫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감독이 교체 의사를 밝혔는데 이에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 물론 단유는 제외하고.
“아이들은 당연하다고 하더구나.”
“당연하다고요?”
“경기장에 뛰고 싶지 않은 선수가 어디 있겠어. 시합에서 골을 넣고 싶지 않아 하는 선수가 어디 있겠어. 하지만 축구는 말이다. 그런 욕심만 갖고 하는 경기가 아니야. 어떤 선수는 골을 넣고 싶은 욕심도 누르고 오로지 자신의 골대를 지키겠다는 의무감에 경기 내내 저 자리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며 긴장을 한다.”
감독이 손가락만 들어 가리킨 방향에는 골키퍼가 허리를 조금 숙이고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상대의 방향에 맞춰, 언제라도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선수는 상대 수비진을 헤집으며 공을 드리블하고 싶은 욕심을 누르고 더욱 견고하게 수비를 하기 위해 옆의 동료들과 대화를 하고 시선을 맞추며 움직여야 한다.”
다시 손가락이 움직이며 여기저기를 가리킨다.
“어떤 선수는 우리 팀이 위험한 상황에도 역습이란 전술을 수행하기 위해, 또 상대 수비진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공격 라인에 서서 팀의 위기를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한다.”
언제라도 뛸 준비를 하는 명수.
“그 선수들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팀의 승리다. 팀이 승리가 곧 자신의 승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 너도 우리 팀이라고.”
팀. 이 한 마디가 단유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던졌다.
“단순히 니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니가 우리 팀을 생각해주는 마음을 저 아이들도 알기 때문이야. 단순히 명수 친구라서가 아니라, 바쁜 때에도 시간을 내서 연습을 지켜봐 주고, 같이 흙먼지 마시며 달려 본 친구라서 그런 것이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전 연습도 잘 참여하지 않았는걸요.”
감독이 싱긋 웃었다.
“그렇지. 만약 진짜 축구부였다면 선배들에게 농땡이 깐다고 한 소리 들었을 게다. 하지만 축구부가 아님에도 와서 도와줬고, 운동장에서도 적극적으로 달리지 않았더냐? 저 아이들이 순진한 건지 몰라도, 같이 뛰고 땀 흘리면 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만큼 축구를 순수하게 즐기고 좋아하기 때문일 테다.
“어차피 지금 들어가도 니가 뛸 수 있는 시간은 2분 정도겠지. 그런데 말이야. 아마 이 시합이 너에게도 마지막 시합 아닐까?”
마지막. 그럴 것이다. 3학년이 되면, 더더욱 시합에 나올 일이 없다. 단순히 3학년이라 학업에 바빠서란 이유가 아니다. 1학년, 2학년 후배들이 누려야 할 기회를 정규 축구부도 아닌 주제에 뺏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다녀와. 마지막 시합.”
말인즉슨, 감독도 내년에는 단유를 부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단유의 의지를, 그 속내를 알기 때문이다.
“···네.”
단유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조끼를 벗었다. 벤치에서 아이들이 달려와 단유의 등과 머리를 때렸다. 격한 격려와 응원에 단유는 미소를 지었다.
후반 43분, 단유가 운동장에 들어설 준비를 하는 걸 보고, 센터 라인 부근에 서 있던 명수가 씩 웃음을 짓고는 엄지를 척 보였다.
“인마, 웃지만 말고 나와 인마!”
코치가 손을 모아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교체 번호가 자신의 것임을 깨달은 명수가 히죽 웃으며 뛰어나왔다.
“수고했다.”
“수고해라.”
명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들어간 단유는 지친 얼굴의 선수들과 눈을 마주쳤다. 다들 눈에서 빛을 보이며 단유를 환영했다.
‘잘 부탁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없이 눈으로 인사를 나눈 단유가 센터 라인 부근에 섰다. 곧 온몸이 땀으로 젖은 상대 수비수가 슬금슬금 다가와 마크했다.
상대는 단유의 등장에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갑자기 잘 뛰던 명수를 넣고 나온 선수였기에 경계하는 면도 있었고, 단유의 큰 키와 다부진 체격에 기가 눌린 면도 있었다.
공격은 상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드로우 인으로 시작된 상대의 공격은 여전히 파상 공세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지금은 역습보다 수비가 중요한 순간이니, 굳이 자신이 센터라인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체력도 좋으니 더 많이, 더 빨리 뛰어다닐 필요가 있었다.
단유는 뛰어난 눈썰미로 진영의 전개를 파악해냈다. 그리고 공의 위치를 가늠한 뒤, 빠르게 달렸다.
다른 시합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축구에서의 체력은 여러 가지가 포함된 스탯이었다. 단순히 지구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력에도 영향을 주는 스탯이 체력이었다. 갓 들어온 단유의 체력이 좋다는 건, 반대로 이전 시간까지 줄곧 명수를 마크해온 수비수의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수비수는 단유를 쫓지 못했다. 포지션을 지켜야 하기에 달리지 않은 것도 있지만, 지쳐서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윙백에서 중앙으로 향하던 자기 팀의 공격이 단유에 의해 차단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단유는 공을 잡아 세운 뒤, 발바닥으로 공을 뒤로 밀면서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방향 그대로 공을 쭉 밀어 찬 뒤, 뛰었다. 또래에 비해 큰 체격을 가진 단유가 경기장을 달리기 시작하니, 선수는 물론 관중들의 시선까지 몰리기 시작했다.
단유는 자기 앞에 있는 선수들의 수를 세었다. 총 5명. 그중 골키퍼와 수비수 3명을 제외하면 수비형 미드필더로 센터라인 부근에 있던 선수가 가장 가까웠다. 하지만 그 선수는 포함 시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미 공은 그 선수를 지나갔고, 그 선수 역시 공을 뺏기 위해 달리고 있지만, 단유가 더 빠르다.
단유는 공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앞으로 밀어 찼다. 중앙 수비를 서던 선수가 단유와 공을 향해 달렸고, 양쪽 사이드에 있던 수비수 중 한 명은 단유에게로, 한 명은 중앙을 보강하기 위해 골키퍼 쪽으로 향했다. 단유는 차고 달리는 것임에도 중앙수비수보다 먼저 공에 도달했다. 경이적인 스피드에 놀란 것은 관중들의 몫이었다. 함성이 터져나왔고, 수비수는 당황한 얼굴을 들이밀며 단유를 손으로 붙잡으려 했다. 단유는 무릎을 살짝 굽힌 채로 어깨를 틀어 상대를 방어했고, 상대는 단유의 힘에 밀렸다. 비틀거리는 사이에 단유는 공을 밀고 나갔다. 수비수 두 명, 그리고 골키퍼 한 명.
빈공간도 보이고, 막을 사람도 적고, 시간도 별로 없으니 그냥 또 한 번 시원하게 냅다 갈겨보기로 했다. 어차피 단유가 가진 기술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