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06화 (406/956)

꽃보다 아름다워(3)

-------------- 406/952 --------------

동기는 포지션을 찾아가며 주위 동료들에게 손뼉을 쳐주고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의 교체는 단지 부상당한 선수를 대신해 들어간 것일 뿐이었다는 듯, 특별히 경기에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여전히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전반전이 끝이 났다.

대기실에 모여서 땀을 닦는 선수들 틈에서 감독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힘들지?”

“아닙니다!”

선수들의 목소리에는 잔뜩 독이 올라와 있었다.

“힘들 거야.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몸보다 정신이 먼저 힘들게 마련이거든.”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설명하는 감독은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선수들을 추궁하는 모양새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시합들을 너무 쉽게 풀어왔던 탓에 이런 고비를 맞이한 것일 수도 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겠지. 나 역시 그랬고.”

감독의 자기반성은 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다. 선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독려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코치가 감독의 뒤에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감독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들도 솔직히 명수가 잘하는 거 인정하지?”

“네!”

“그럼요! 명수가 중학교에서는 원탑이죠.”

“제가 짱이죠.”

명수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니가 짱이라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저쪽 팀에도 명수 정도의 실력을 갖춘 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곧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사실 지금까지 상대의 시합도 봤었지만, 10번 선수가 저렇게 움직임이 좋은 선수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 아마 상대 팀 감독도 우리 명수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뭐 피장파장이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껏 상대했던 팀들의 감독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피식 웃음 짓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감독이 목소리를 바꿨다.

“자, 이제 전반전 동안 실컷 구경했잖아? 이제 그만 구경해도 쟤들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그만 가늠해도 되잖아? 그렇지?”

그렇다, 선수들은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상대의 실력을 판단하고, 그 허점을 공략하기 위해 준비를 한 것이다! 라는 감독의 말에 아이들이 배시시 웃었다.

“네! 맞습니다!”

“명수 너도 이제 뛰어야지. 너무 쉬면 몸이 굳는다. 알지?”

“넵!”

“이제 너희들이 할 일은 별거 없어. 그냥 내가 지정해준 전략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어렵지 않잖아? 방학 동안 계속 연습했잖아? 그렇지?”

“넵!”

“만약에 이 시합에서 이기지 못한다 해도, 그건 내 전략의 잘못이지 너희들이 못해서는 아니다.”

그 말에 아이들은 곧잘 하던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희들의 실력은, 지난 시합 동안 실컷 보여줬어. 너희는 적어도 중학교 팀들 중에서는 최고다. 만약 이 시합에서 진다면, 그건 너희 실력 때문에 지는 게 아니야. 내 전략이 상대 감독의 전략에 밀려서 진 거야.”

코치는 물론, 아이들도 감독이 하는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감독은 아이들이 경기에서 졌을 때의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해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전반전의 움직임이 나쁘진 않았지만 결승이라는 점, 그리고 춘추 대회 우승 독식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부담감에 몸이, 혹은 마인드가 굳어 있었음을 부인할 순 없었다. 바로 그 점을 감독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최고다, 라고.

“내가 보기에 저 경기장 위에서 너희보다 잘하는 선수는 없다. 적어도 비등한 수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너희보다 잘한다고는 할 수 없어. 그러니까 물러서지 마라. 피하지 말고 부딪쳐. 너희는 이길 수 있다.”

“예!”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프로 선수 시절의 선배는 저렇게 팀을 아우르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진 않았었다. 후배들에게 자상한 선배로 기억되긴 했어도,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선배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학교 감독으로 몇 년을 있었더니 어느새 저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아니면 애초에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었거나. 어쨌든, 자신 역시 지도자의 길에 한 걸음 내디딘 마당에 선배의 저런 카리스마는 본받아야 할 점이 분명했다.

“나가자. 시간 됐다.”

아이들은 환호와 함성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경기장으로 뛰어갔다.

0:0으로 끝난 전반전은 응원하던 아이들을 살짝 지치게 만들었다. 만약 슛을 쏘고 선방하는 장면이 계속 나오고, 더욱 격렬하고 치열하게 공방이 오갔다면 지켜보는 맛이라도 있었을 텐데, 중앙 싸움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지루함이 앞서고 말았다.

열심히 뛴 선수들의 입장에서야 억울하다 하겠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다.

“저 실력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대?”

“난 괜찮은 거 같은데? 뻥축구가 아니라서 훨씬 보기 좋다.”

“차라리 뻥축구가 낫겠다. 뭐냐? 저게. 가운데서 깨작깨작.”

어떤 이는 유럽의 12세 미만 유소년 축구도 이거보단 낫겠다며 깎아내리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너무 전술 위주의 축구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그런 우려도 싹 잊어버리고 다시 열렬히 응원전을 벌였다. 경기 자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결국 상대 팀을 꺾고 우리 팀이 이겨야 하는 경기니까.

“장계중 파이팅!”

“파이팅!”

비록 친한 친구가 아니고서는 선수들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지만, 적어도 장계중학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아닌가. 기든 구르든 어떻게든 이기기만 해달라, 는 게 응원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후반전의 시작은 명수의 원맨쇼로 시작되었다. 감독은 경기 시작 전에 명수에게 주문을 했다.

“전반에도 잘했다. 분명히 상대 팀은 너를 많이 경계하고 있어. 하지만 전반 동안 묶여 있었던 탓에 너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상쇄된 거 같다. 그러니까, 후반 시작하자마자 공을 잡고 뛰어라. 헤집어 놔. 골을 넣으면 좋지만 못 넣어도 좋다. 그다음부터는 너 때문에라도 공간이 날 테니까.”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공간이 나지 않더라도 괜찮다. 상대의 공세가 적극적이지 못하게만 만들면 된다. 그래야 장계중의 기세가 살아 오를 것이다, 라는 게 감독의 형세 판단이었다. 기세를 이기고 난 다음에야 전술도 살아날 것이다.

“옙.”

맡겨만 달라는 듯, 명수가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가슴을 쿵 한 번 쳐 보였다. 어린 명수지만 믿음직스러운 축구 선수이기도 했다. 감독은 명수의 등을 툭 쳐서 경기장으로 내보냈다.

장계중의 공격으로 시작된 후반전은 명수가 공을 툭 밀어 차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명수의 발끝을 떠난 공이 동료에게 갔고, 그 동료가 제2선에 배치된 미드필더에게 줄 때쯤, 명수는 적진 가운데로 가는 중이었다. 상대 미드필더들이 밀고 지나갈 때쯤, 그리하여 약간의 틈이 생겼을 때, 명수가 손을 들어 보였고 그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공이 위로 떠올랐다. 곧 주변의 수비수들이 명수와 공을 마크하기 위해 달라붙었다. 명수는 머리 가슴 무릎으로 이어지는 트래핑으로 공을 지켜낸 후, 개인기로 수비수를 제쳤다. 다음 수비수가 바로 옆에서 진로를 막으려 했지만, 현란한 발재간으로 또 한 번 수비수를 제치고 지나가자 확 트인 공간이 명수 앞에 펼쳐졌다.

“와아!”

후반 시작과 함께 시작된 명수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장계중 응원단을 들썩이게 하였다. 그 함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수는 오로지 혼자 공을 치고 달렸다.

“뭐야? 메시야? 호나우도야?”

몇몇의 환호, 몇몇의 경악 속에서 명수의 드리블은 곧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더 깊은 곳까지 가기에는 이미 최후방으로 물러난 상대의 수비수들 때문에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감독님은 말씀하셨지.’

골을 넣든 넣지 않든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난 중요하다고!’

명수의 시선이 살짝 홉뜬 사이, 그 시야에 잠깐의 틈이 보였다. 그 틈이 사라지기 전에 명수의 발끝에 힘이 실렸고, 명수는 이 시합 처음으로 슈팅을 날렸다.

호쾌한 슈팅은 아쉽게도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갔지만,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명수의 이름값을 톡톡히 보인 퍼포먼스와 슈팅에 상대의 수비수는 페널티 에어리어 위로 올라가기가 두려웠다. 특히 오프사이드 전략을 구사하는 중인 수비수들이라 함부로 라인을 끌어올릴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

“아쉽네요.”

코치는 손뼉을 맞부딪치며 아쉬움을 몸으로 표현했다.

“기회는 또 올 거다.”

명수는 감독의 지시를 99% 수행해 냈다. 다른 선수들도 전술 수행도가 대략 90%는 넘는다고 판단한 감독은, 빈말이 아니라 진짜 이 경기를 지게 되면 그것은 순전히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경기를 질 수 없었고 지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들에게만 영광이 아니라, 본인에게도 영광이고 기록이니까.

다만 그런 욕심 때문인지 계속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감독은 지금이라도 고개를 돌려 벤치에 앉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니가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당연히 학교의 이름이 걸린 이 시합에서 이기고 싶지 않겠냐?’

고 애교심(愛校心)을 자극해볼까도 생각해봤고,

‘너의 친구들과 선배들이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 가치가 퇴색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고 우정과 동기애(同期愛)를 건드려볼까도 생각해봤다. 그렇지만 애초에 저 소년이 내세운 ‘마지막 시합’이라는 핑계가 너무 그럴듯하고, 본인도 그 핑계가 단순히 핑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못내 아쉬움을 참는 중이 아니던가.

저도 모르게 들썩이던 어깨를 심호흡으로 가라앉힌 감독은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전반전이 중앙을 선점하기 위한 지루한 공방전이었다면, 후반전은 명수의 도발로 시작된 맞불과 혼전이었다. 두 팀 다 뒤가 없다는 식으로 뛰어다니며 슈팅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남발’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턱없이 모자란 유효슈팅 수와 비교해 두 팀이 후반 20여 분까지 슛을 한 횟수는 18회에 달했다. 골키퍼를 당황하게 할 만큼 먼 거리에서의 위력적인 중거리 슈팅부터 시작해, 저게 슛인가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XXX대폭발 슛이 여러 차례 나왔다.

“저 팀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주문한 것 같군요.”

“음.”

보는 사람이야 답답하겠지만, 중학생이라는 선수들의 한계를 고려해본다면, 기술과 힘에서 성인에 못 미치는 학생들이라 저런 어이없는 슛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슛의 성공률을 떠나 시도 자체에 의미를 두자면 두 팀이 내건 전략은 비슷했다.

“감독님.”

“응?”

“저기, 아직 교체 카드가 남았는데 말입니다.”

감독은 코치의 말을 이해했다. 말없이 경기장을 바라보던 감독은 곧 코치에게 지시했다.

“재훈이 들어오라고 하고, 경주 내보내.”

“네? 아니, 저기.”

“재훈이 체력 많이 떨어졌다. 빨리해. 안 그러면 수비에서 일 나겠다.”

“···네.”

코치의 마음이야, 자기랑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그나마 자신은 체면도 있고 해서 돌아보지 않았지만,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단유를 흘깃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마당인데.

문득 감독은 웃음이 나왔다

“고작 후보 놈한테 끌려다니는 꼴이라니.”

워낙에 후보 같지 않은 후보라 이런 민망한 꼴을 연출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야 민망한 줄 모르겠지만, 감독의 속내는 첫 시집살이에 속내를 들킨 며느리 꼴이다.

감독의 표정에 급격한 변화가 생긴 것은 후반 종료 10분 전의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