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워(2)
-------------- 405/952 --------------
고작 전반전이었지만, 아이들은 뒤가 없다는 듯 격렬하게 달리고 부딪치고 넘어졌다. 특히 이번 대회 결승은 작년 추계대회 우승팀과 지난 춘계대회 우승팀의 맞대결이 되었다. 춘추 대회를 모두 석권하려는 팀과 지난 대회 디펜딩 챔피언 팀의 대결이니 불꽃이 튀었다.
명수는 공이 오지 않는 순간에도 좌우로 움직이며 수비수를 교란하였고, 미드필더 진도 그에 호응하여 중앙을 장악하기 위한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아 패스가 쉽게 이어지질 않고 있었다.
“오늘 병수가 몸이 무거워 보이는데요?”
코치가 말하지 않아도 감독 역시 느끼고 있던 바였다. 비록 명수를 주 공격수로 하여 중앙 공격에 치중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병수와 같은 윙어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병수가 못 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조금 스피드가 떨어지긴 했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공격의 맥을 끊어먹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했다.
상대도 쉽게 공격을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는 점은 똑같았다. 미드필더가 활발하게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위험한 부근에까지 공격수가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팀 모두 공통점이 있다면, 역시 강력한 한 방을 지닌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수야 지난 대회와 지난 시합을 통틀어 가장 공격력이 좋은 선수로 인정받은 사실이 있고, 상대팀의 공격수 역시 명수 다음으로 많은 골을 넣으면서 골잡이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증명한 바 있었다. 그래서 두 팀 다 쉽게 미드필더 진을 위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전반 시작과 함께 피 튀기는 승부를 벌일 것처럼 보이던 경기가 시간이 갈수록 전장이 축소되면서 센터라인 부근에서만 공이 오가는 지루한 경기가 되고 있었다.
본래 축구에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들 경기라 더 유치하다 생각하며 지루함을 참던 이사장이 교장에게 말을 건넸다.
“학부모위원회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아직까지는 별 진척이 없습니다. 회의록 공개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사실 회의록이야 문제 될 내용은 없습니다만, 또 꼬투리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힐 수 있으니까요.”
“박영선 씨라고 했던가요? 위원장이?”
“네.”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달라고 하세요. 이사회에서도 도와드리겠다고.”
“···네.”
교복선정 위원회는 9월 초 벼락치기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교복 디자인 선정 및 교복 제작 업체 선정, 그리고 교복 변경 시기까지 일사천리로 결정을 내렸다. 만약 다른 공립학교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는 사립중학교였고, 학교와 자문단, 이사회의 지원뿐만 학부모위원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학부모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박영선의 영향력이 컸다. 학부모위원회 소속 중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이들을 모아 교복선정위원회에 참가시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여 이사회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사장은 그녀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교장을 통해서 그녀에게 물적 지원과 약속을 해 주었다.
“상담실에서 한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교장이 교감에게 눈짓을 보내자, 교감이 너무 비굴하지 않게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듣고 본 이야기를 전했다.
“허허, 그분이 정치에 소질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러니까요. 적당한 타이밍에 딱 상대의 성격을 문제 삼으니까 상대도 정신을 놓고 덤비더라고요. 덕분에 이야기가 물 흐르듯 넘어가 버렸었죠.”
“요즘은 여자분들이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드센 성정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국회를 봐도 그렇고.”
교감이 손만 비비지 않았다뿐이지, 광택제를 바른 듯 번들거리는 입술로 이사장의 의견에 격한 공감을 표시했다.
“이게 다 시대의 변화 아니겠습니까?”
교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죠.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겠죠. 세상이 좋아진 탓입니다.”
“먹고살 만하니까, 이렇게 좋은 경기장도 짓고 애들 공놀이도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사장의 ‘공놀이’ 발언에 교장과 교감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그래도 ‘교육자’라는 체면을 가진 마당에 방금의 발언은 조금 지나친 면이 있다고 여긴 탓이었다.
교감이 헛기침을 하며 이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네, 뭐. 아무튼, 위원장님의 도움으로 일이 잘 마무리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사장은 교장과 교감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너무 안심하지 마시고, 그분께 도움이 되는 쪽으로 도울 수 있도록 알아봐 주세요.”
“그럼요. 학부모위원회는 학교를 지탱하는 한 축 아닙니까? 저희도 그냥 두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두 분의 협조에 이사회를 대표해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아이고, 별말씀을요, 이사장님.”
아이들의 요란한 응원 소리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이사장은 그사이 뭔가 변화가 있었나 싶어 운동장을 바라보았지만, 딱히 알아볼 만한 건 없었다. 그저 ‘공놀이’에 불과한 것이니 말이다.
비록 이사장은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경기장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양상의 경기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드디어 공이 중앙을 넘어 페널티 에어리어에 다다른 탓이었다. 비록 그 에어리어가 장계중학교의 에어리어라는 점에서 불행이었지만.
감독과 코치도 더는 편히 이야기를 나눌 형편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소리치면서 아이들의 포지션을 잡아주고, 멘탈을 잡아나갔다. 벤치에서도 1학년 후배들이 목이 터져라 ‘수비’를 외쳤다.
한순간 미드필더 진영의 집중력이 흩어진 순간이었다. 패스한 공의 궤도가 미묘하게 꺾여 받지 못한 사이 상대팀이 가로채기를 했다. 그리고 곧장 공격을 가하는 차에 수비수도 잠깐 방심을 했었던 건지 막는 것이 늦었다. 그래서 옆선을 따라 올라가는 선수의 앞을 막지 못했고, 그저 옆을 따라가며 센터링을 올리지 못하게 패스 코스를 막는데 전력을 다했다.
상대의 윙어는 뒤에서 따라온 윙백에게 공을 넘긴 뒤, 중앙으로 달려나갔다. 순간적으로 공을 쫓던 수비수의 시선에, 윙어의 움직임이 사라졌고 그 틈을 노리고 이어진 패스에 수비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공은 페널티 에어리어를 넘어섰고, 골키퍼도 허리를 숙이고 남은 수비수들에게 마크를 명령했다. 뒤에서 쫓아온 미드필더에게 ‘태클하지 마, 태클하지 마’를 소리쳐야 했고, 반대편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오는 상대 공격수를 손가락질하며 ‘마크!’를 외쳤다.
그 사이 몇 번의 방향전환으로 수비수를 뚫어낸 상대의 윙어가 공을 살짝 띄어 올렸다. 공중전!
위치를 가늠하고 골키퍼가 뛰어올랐지만, 그 앞으로 먼저 쇄도한 상대 공격수의 머리에 공이 걸렸다. 빗맞았는지 공은 곧바로 골문을 향하지 못했고, 지켜보던 응원단에서 탄식과 함성이 섞여 나왔다.
허겁지겁 공을 향해 발길질을 한 수비수의 도움으로 공이 페널티 에어리어를 벗어나자, 그제야 한숨을 쉰 감독과 코치는 다시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긴장을 풀지 말라고 강조했다.
공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저 공을 장계중학교가 잡는다면 역습이었다. 떨어지는 공을 향해 명수가 달려갔다.
옆에서 들려오는 안도의 한숨에도 단유는 경기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특히 명수의 움직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전반 내내 공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탓인지 체력이 많이 떨어지진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반면 상대 수비수는 명수를 신경 쓰느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명수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낙하지점에 먼저 도달한 것은 명수였고, 그 명수를 밀어내고 위치를 잡으려 애를 썼지만, 명수는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가슴을 이용해 공을 트래핑한 후, 놀랍도록 빠르게 몸을 돌려 수비수를 제치는 명수였다. 이미 공은 명수의 발끝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상대가 당황할 차례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동기도 벌떡 일어나 명수의 드리블을 향해 환호를 보냈다. 주먹을 꽉 쥐고 명수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이들은 비단 동기뿐이 아니었다.
명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이었던지, 아니면 전반 내내 공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답답함을 풀어내려는 것인지 신나게 달렸다. 신나게 달리는데, 아무도 막지를 못했다. 그래서 비교적 쉽게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막지 않은 이유는 먼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존을 형성하여 명수를 막기 위함이었다는 듯, 그 이상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곧 2명의 수비수가 명수를 에워쌌다. 애초에 상대 공격 때에도 방심하지 않고 수비를 보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명수는 2명을 제쳐보려 했지만, 철저하게 몸을 돌리는 것을 막는 수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원하러 온 동료에게 공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맥없이 뺏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동료 옆에는 상대팀의 선수들도 같이 달리고 있었다.
결국 공은 다시 뒤로, 뒤로 밀려 역습은 실패했고 지공(遲攻)으로 전환하여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스피드가 좋은 선수가 받쳐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감독과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 시선을 단유는 무덤덤하게 받았다.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단유는 감독을 개인적으로 찾아왔다.
“오늘 되도록 경기에 안 나가게 해주세요.”
감독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유의 말을 들었다. 며칠 전에도 단유의 담임 선생님이 찾아와서 단유가 경기에 되도록 나가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이제 곧 전국수학경시대회에 나가야 할 아인데, 자칫 부상이라도 입으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누가 보면 아버지가 와서 청탁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보다, 담임의 말을 조금 꼬아서 듣는다면 ‘축구’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수학경시대회’는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나름 프로축구계에서도 뛰었고, 학교 감독 생활도 몇 년 지내면서 인내심을 많이 기른 탓인지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기를 앞둔 지금 단유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다칠까 봐 겁이 나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비웃는 듯 얼굴을 구기지도 않았고,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었다.
“제가 다칠 일이 뭐 있겠어요? 그보다는 오늘이 이번 대회 마지막 경기잖아요.”
“그래서?”
“처음의 이야기랑 같아요. 저 말고 진짜 축구부 선후배, 친구들에게 기회가 더 많이 가길 바라는 거요.”
감독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이번에는 단유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못된 생각을 가졌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설령 누가 부상을 당하더라도 다른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갔으면 해요. 그리고 만약 게임을 지는 상황이 오더라도 제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필드 위에서 진심을 다해 뛰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감독은 묵묵히 단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이 나고, 단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조끼를 입은 채로 벤치로 향했다.
마침 경기장에서 뛰던 한 선수가 다른 선수의 발에 걸리면서 넘어졌고, 심판의 휘슬이 불었다. 오른쪽 미드필더를 보던 선수였다. 명수를 비롯한 동료들이 달려가 상황을 확인했다. 의료진이 경기장으로 뛰어들었고, 명수는 감독을 향해 팔을 교차해 보였다. 발목 부상이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감독은 벤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동기.”
단유 옆에 있던 동기가 벌떡 일어나 조끼를 벗었다.
“잘해.”
단유가 동기의 엉덩이를 툭툭 쳐주자, 동기가 씩 웃음을 지었다. 조금 긴장한 듯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단유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응원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