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02화 (402/956)

코스모스의 순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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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자가 많은 탓에 여러 강의실을 고사장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친절하게 붙여놓은 지시문 덕에 헷갈릴 염려는 없었다. 돌아보면 대부분 부모님과 함께 온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교실 문을 열고 단유가 들어갈 즈음에 학생들과 학부모의 시선이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학교 정문에서보다 더욱 노골적인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중학생 맞아?”

“요즘 아이들이 확실히 잘 먹고 잘 커.”

“그럼 우리 아이는?”

단유는 칠판에 붙은 번호를 보고 자기 응시번호에 맞게 책상을 찾아가 앉았다.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단유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더러 몇몇 아이들이 책을 보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모님이나 같이 응원 온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문제집을 꺼내 문제를 푸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라도 문제집을 풀기보다는 음악을 듣는다거나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아이들 속에서 노트를 빼곡히 채워나가는 단유의 행동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가까이 앉은 이들은 단유가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작업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슬쩍 지나가던 부모님 한 분이 노트를 봤다가 어질어질한 글들과 수식들에 눈이 핑핑 돌아가는 느낌을 받으며 돌아섰다.

“너도 이러지 말고 문제라도 풀래?”

“아, 엄마. 됐어. 정신 사나워.”

“그래? 알았어, 알았어. 방해 안 할게. 정신 집중해.”

“엄마, 그냥 가.”

“너 시작하는 거 보고 갈게. ···목마르지 않아? 물 줄까?”

“됐어.”

주변의 소음도 단유의 작업을 느리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단유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노트 정리에 집중할 수 있어 신기했다. 딱히 반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 모인 아이들은 적어도 서울 시내에서 내로라하는 두뇌를 가진 아이들임이 틀림없었고, 그런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있다는 사실이 묘한 경쟁심을 부추겼다.

어제저녁 늦게까지 읽었던 책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단유는 감독관이 들어옴과 동시에 작업을 멈췄다. 어느새 교실에는 학생들만 남아 있었고, 교실에 따라왔던 학부모들은 소위 ‘학부모 대기실’이란 곳으로 이동하고 없었다.

“책상 위에 있는 거 다 집어넣으세요.”

책상 정리마저 끝낸 뒤, 절차에 따라 시험 준비가 이뤄졌고, 곧 감독관의 시험지 배부와 함께 시험이 시작되었다.

단유는 자신이 가장 어려워하는 기하학은 뒤에 풀기로 전략을 짰는데, 첫 문제가 바로 기하학이었다. 첫 문제부터 패스하려고 하니 여간 찜찜한 게 아니어서 그냥 풀기로 했다. 원과 삼각형이라는 소재로 방접원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였는데, 피타고라스의 정리만 잘 이용하면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은 실수해(解)를 구하는 문제였는데, 중등과정상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때 사용하는 방법, 집합과 소거법으로 답을 확정하는 방법이 아닌, 주어진 식을 함수화시켜 교차 검증하는 방식으로 풀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함수화시키는 게 어려울 뿐이지, 계산은 좀 더 정확하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단유의 수학 실력이야 애초에 선행학습을 통해 단련된 부분도 있지만, 최근 ‘관성 모멘트’와 회전 역학에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응용 부분에서 진보한 측면이 있었다. 이를테면 밀도함수를 통해 질량 중심을 구하거나 특정 영역의 부피를 구하기 위해 벡터미적분을 이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적합한 공식을 찾고 이를 문제에 맞게 적용하는 게 어려운 일이지, 공식을 풀이하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중등부 수준의 문제 정도는, ‘껌’까지는 아니어도, 펜 몇 번 손 위에서 돌리다 보면 대략적인 풀이 과정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를 정도는 되었다.

단유가 문제를 다 풀고, 검산까지 마친 직후, 고개를 들었을 때 감독관과 눈이 마주쳤다. 곁눈으로 살피니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문제를 풀고 있었고, 시선을 들어 강의실 중간에 위치한 시계를 보니 시험이 시작된 지 40여 분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감독관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요? 학생?”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계속 문제 푸세요.”

“다 푼 사람은 나가도 되나요?”

“다 풀었다고요?”

“네.”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의 특성을 잠시 떠올려보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문제가 풀릴 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펜을 놓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포기하기보다는 되는 데까지 풀어보려는 끈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험을 포기하는 학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가끔은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이나 이상 증상을 호소하며 고사장을 나가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독관은 단유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어디 아픈 곳 있나요?”

만약 아프다면 대학교 의무실에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아니요.”

보기에도 단유는 튼튼해 보였다. 얼굴색도 좋아 보였고. 그러고 보니, 꽤 잘생겼다, 는 생각을 하며 감독관이 단유의 시험지와 답안지를 슬쩍 보았다. 시험지에 빼곡한 수학식과 빈틈없이 체크 된 답안지는 단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이렇게나 빨리 문제를 다 풀었다고?’

라는 의문은 뒤로하고, 감독관은 절차대로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다 풀었어도 시험시간이 끝나기 전엔 퇴실이 안 돼요.”

감독관의 말에 주변 아이들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이제 5지 선다형 문제 중 14문제 정도를 풀었는데, 벌써 주관식까지 다 풀었다고?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곧 합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문제가 어려우니까 다 찍었구나. 하긴 이번에 문제가 쉽진 않네. ···다항식과 미지수가 일치하지 않는데, 이건 어디서 식을 만들어내지?’

단유는 감독관의 지시에 수긍하며 다른 사항을 물어보았다.

“문제지는 제출해야 하죠? 여기 낙서, 같은 거 해도 상관없나요?”

“상관은 없지만, 되도록 풀이 과정은 남겨두도록 하세요.”

“네.”

감독관은 다시 강의실 앞으로 향했고, 단유는 시험지를 뒤적거리다, 적당한 공백을 찾아내서 거기에 조그맣게 낙서(?)를 시작했다. 경시대회 문제를 풀다 얻은 아이디어를 풀어내 보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하고 뭔가 떠오를 듯, 하는 게 마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

“네, 고맙습니다. 덕분에 시험 잘 본 거 같아요. 네. 지선이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시험을 마치자마자 명수와 하은, 수학 선생님에게 각각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무사히 시험을 마쳤음을 이야기한 직후, 단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남들만큼(?) 대학 진학의 필요성―대학 진학을 의무처럼 여기지 않는다는 이야기―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 단유였지만, 교육 시스템상 고등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토요일이라 사람도 없고, 그저 보이는 거라곤 위용이 느껴지는 커다란 동상과 커다란 건물, 넓은 잔디밭과 잘 가꿔진 조경수(造景樹)들이 눈에 띌 뿐이었다. 이래서야 대학교라는 곳이 그저 넓기만 한 곳이라는 인상만 받을 뿐이었다.

‘별거 없네.’

결국, 대학이란 공간도 그 공간 자체의 의미는 일반 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예를 들어 실제 이루어지는 수업이라든가 구성원들 간의 관계 같은 것이 중요한 거지, 겉으로 보이는 면만으로는 대학이란 곳을 알기 어려웠다.

다만 화창한 토요일 오후, 시험을 치기 위해 왔던 아이들도 빠지고 난 뒤라 ‘대학’이라는 이름만 뺀다면 돌아다니면서 한적하고 넓은 공간 덕에 산책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단유는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2명의 여자가 서서 단유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전에 뮤직비디오 나오지 않았어요? 가디스R 꺼?”

여기서 들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한 터라 단유는 아주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네, 맞는데요.”

“와아.”

조금 떨어져 있던 두 여자는 한 걸음 내로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저 그 뮤직비디오 엄청 많이 봤었거든요?”

“뒤에 노래도 냈었죠?”

“그런데 왜 음악방송에는 안 나와요?”

“솔로로 활동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팀으로 나와요?”

“노래 또 안 내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단유는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당황했다.

“아뇨, 저기 전 활동 안 하고요, 전 연예인도 아닌데요.”

연예인이 아니란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에게 단유는 그저 친분 때문에 도움을 준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사인 좀 해주실래요?”

“사인이요?”

단유는 난감해하며 사인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럼 사진이라도.”

이미 손에 핸드폰을 치켜들고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킨 상태였다.

“저기 좀 웃어주면 안 돼요?”

“네?”

“너무 표정이 딱딱해서요.”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죄송한데,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엔 두 여자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그냥 좀 웃어주면 안 돼요?”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막무가내식으로 말씀해주신들 제가 그 부탁을 들어드릴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생기지 않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그냥 일반인이거든요. 그리고 만약 연예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찾아와서 핸드폰을 들이밀면 실례라고 생각되네요.”

두 여자의 얼굴이 붉어진 가운데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지만, 단유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반가워하는 마음도 알겠고, 사인을 받거나 함께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기고 소중히 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은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그런 마음이라도 상대에게 존중받지 않은 상태라면 그저 무례하게만 느껴질 따름이라고 여겨지네요.”

야 얘 뭐래니, 라는 말이 여자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냥 사진 한 번 찍어달라는 거 가지고 너무 유세 떠는 거 아니니?”

“예를 들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펜을 빌린다고 해도, 먼저 사정을 이야기하고 공손하게 예를 갖추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짜고짜 찾아가서 펜 좀 주세요, 라고 말하는 법은 없죠. 그리고 상대가 꼭 펜을 빌려줘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상대는 펜을 빌려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어요. 모욕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그걸 가지고 상대를 모욕할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네요. 유세 떠는 행동이 아니라, 상식적인 수준에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을 따름입니다.”

여자들은 더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투로 투덜대면서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동안에도 흘깃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세상에 있는 욕, 없는 욕 다 먹고 돌아간다는 듯한 ‘분노’와 ‘경시’가 담겨 있었다.

‘연예인도 쉬운 직업은 아니겠구나.’

특히나 인간관계가 그렇게 원만하지 않은, 원만해지고 싶지도 않은 단유로선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느긋한 오후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단유는 걸음을 빨리했다.

****

“그런 일이 있었어?”

“네.”

“그래서 기분이 별로야?”

“별로 좋지는 않네요. 그런데 누나는 이런 일들, 많이 겪어봤죠?”

“많이는 아니고, 조금.”

나윤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하기야 나윤의 활동 기간은 너무 짧았었다.

“그래도 돌아다니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 많지 않아요?”

“예전에는 많았어. 그래서 모자를 계속 쓰고 다녔고.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 하는 사람이 많아서 마스크를 써도 이상하게 보지 않으니까 얼굴 가리기 좋더라고.”

요즘은 마스크를 하지 않아도 알아보는 사람이 적어졌지만.

“아무튼 전 연예인 체질은 아닌 거 같아요.”

“글쎄다.”

나윤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단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요?”

“네 얼굴은 어떻게 봐도 연예인 얼굴이라고 생각했거든. 점점 잘생겨지는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럽게 왜 그래요?”

“오구구, 우리 남친 부끄러워하는 거 봐?”

나윤은 키득거리면서 붙잡은 단유의 손을 흔들었다.

“유명한 남친 때문에 나가서 밥 먹기도 힘들겠어?”

“됐어요. 얼른 일어나요. 이러다 저녁 시간도 놓치겠네요.”

“그럴까?”

“빨리 갔다 와야 레슨 시간 안 놓칠 거 아니에요?”

“이젠 매니저 역할도 하는 거야?”

단유는 더 이상의 대화로 시간을 끌기 싫다는 듯, 나윤의 손을 잡고 끌었다. 늘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식사를 하지만, 그래도 나윤은 좋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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