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의 순정(2)-수정(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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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처음의 걱정과 달리 서점에 가서도 딱히 불편하거나 지루해하지 않는 나윤을 보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관심 있는 책이 있어요?”
“관심이야 있지.”
나윤이 향한 곳은 역시나 음악, 악기와 관련된 코너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리번거리다 책 한 권을 뽑더니 씩 웃었다.
“이런 책?”
<알기 쉬운 작곡법>이라는, 직관적인 제목의 책을 집어 든 나윤은 꿈이 ‘싱어송라이터’라고.
“아이돌과 거리가 멀지 않나요?”
“아이돌 중에서도 직접 자작곡을 만들어서 발표하는 경우도 있어.”
그쪽 세계에 무지한 단유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혹시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사요. 제가 사드릴게요.”
“진짜?”
“오늘은 제가 오자고 했으니까요.”
연인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마저도 단유답다고 생각하며 나윤은 단유의 손을 잡았다.
“같이 골라줘.”
“잘 모르는데.”
“괜찮아.”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되니까.
한참 책을 고르던 와중에 나유은 옆에서 슬쩍슬쩍 책을 집어 들어 내용을 살피는 단유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너도 작곡 한 번 배워보지 않을래?”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안 되겠던데요.”
나윤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해 봤어?”
조금 부끄러운 과거였지만, 예전에 지난 음악 차트의 노래 순위를 맞추기 위해 곡의 ‘규칙성’을 찾아서 분석하는 작업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나름의 규칙을 찾고 통계적 분석을 통해 순위를 맞추는 일까지는 어느 정도 가능했었지만, 곡 자체를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일임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개념이었고, 음악적 재능이 곁들여져야 했다. 단유는 그런 창조의 문제에 있어 어려움을 느꼈고.
“음의 높낮이, 곡의 리듬, 이런 걸 조합해서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든다는 게 저한테는 너무 어렵더라고요. 애초에 아무 생각도 안 들던데요?”
나윤이 파,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웃음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니가 정말 못 하는 것도 있구나.”
“저 못하는 거 많다니까요.”
나윤은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턱을 붙잡은 자세로 끙, 궁리하더니 손뼉을 쳤다.
“같이 하자.”
“네?”
“우리 같이 작곡 배워서 곡 한 번 만들어보지 않을래?”
“네?”
“요즘 작곡가들도 팀을 이뤄서 하잖아? 물론 그 사람들은 잘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하는 거지만, 우린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뭉쳐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거지. 괜찮은 아이디어 아냐?”
“네?”
“넌 머리가 좋으니까 금방 배울 수 있을 거고, 창의적인 부분은 내가 좀 괜찮으니까 내가 도우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거야.”
눈에서 ‘광기’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열기를 내비치는 나윤의 선언에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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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에 예선 2차전이 있었지만, 단유는 나가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이 직접 감독에게 단유의 불참을 지시한 까닭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경시대회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있으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단유는 일요일에 있을 수학 경시 대회 준비에 전념할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실상은 최근의 개인연구과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우연히 단유의 노트를 본 담임이 물었을 때, 물체의 모양에 따른 ‘관성 모멘트’의 적분 값을 구분한 목록을 정리하고, 이를 통계적으로 활용하여 특정 물체의 ‘관성 모멘트’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공식이라는 단유의 설명에 머리를 저었다.
“수고해라.”
반면 승민은 직접 문제집을 구해와서 단유에게 건넸다.
“이 문제집은 작년까지의 수학 경시 대회 기출 문제들을 정리한 거다. 함 봐봐라.”
“고맙습니다.”
문제집이라면 풀어보는 재미라도 있으니, 잠시 연구에서 손을 떼고 머리도 식힐 겸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 단유였다.
“쉽진 않을기다. 모르는 문제 있으면 뒤에 답지 보고 풀어봐라. 내한테 갖고 오진 말고.”
내도 설명하기 어렵다, 라며 돌아서는 승민에게 감사를 표한 뒤 문제집을 펼친 단유는, 곧 문제에 빠져들었다. 하은의 학원 퇴근 시간이 변경되기 전에는 하은과 함께 공부했었지만, 이런 기출 문제로 공부를 해보진 않았었다.
‘어렵네.’
확실히 단순히 계산하는 것과 다르게, 문제를 읽고 해석하는 것부터가 ‘문제’가 되었다.
<이등변 삼각형이 아닌 예각 삼각형 ABC의 외심을 O, 변 AC의 중점을 M이라 하고, 점 A에서 변 BC에 내린 수선의 발을 D라 하자, 삼각형 OAM의 외접원과 직선 DM의 교점을 P(≠M)라 하자. 세 점 B, O, P는 한 직선 위에 있음을 보여라.>
기하학은 사실 단유가 취약한 부분 중의 하나였기에 단유도 쉽게 문제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우선 B, O, P가 공선점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교점 P의 위치가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구분해서 증명해야겠네.’
단유가 다른 노트를 꺼내 삼각형과 원을 그리고 그 위에 갖가지 기호들을 써넣는 모습을 흘깃 바라본 도하는 턱을 괴고 칠판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목에 핏줄을 세우며 설명을 하고 있었다.
“물병에 1.5L의 물이 들어 있다고 하면 이게 참값이가 근삿값이가?”
“근삿값이요.”
“그제? 그라믄 문어의 다리가 8개 있다, 이거는?”
“참값이요.”
“그제? 그라믄 참값이랑 근삿값이 구분이 가나?”
“네.”
“그라믄 이거 함 보자, 2/3를 반올림해서 0.7로 나타낼 때, 오차를 구하라고 되어 있제? 오차가 뭐랬노?”
“근삿값에서 참값을 뺀 값이요.”
도하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단유가 없다고 축구부에 어려움이 있을 리 없었다. 골키퍼를 맡았던 선배는 다행히도 큰 부상이 아니었기에 계속 골키퍼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약간의 통증은 있을지언정 날아오는 공을 펀칭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몸이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라는 점에 경각심을 가졌던지 더 많은 슈퍼세이브를 기록했고, 선수들은 그런 선배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움직이고 공격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래도 5:0은 너무 했네.”
지태가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면서 대답했다.
“내가 뛰는 데 그 정도는 해야지.”
명수의 자화자찬에 채윤이 마치 마이크를 건네듯 아이스크림을 내밀며 물었다.
“이번 대회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얌, 입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그냥 넘겨줄 생각은 없었는지 명수가 입을 크게 벌리고 한가득 베어 물었다. 다 먹으라며 아예 명수 입에 물려준 채윤은 운동장 스탠드 계단참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보고 있는 단유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 저 구름의 질량 값을 구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
“야, 냅둬. 쟤는 아예 우리랑 다른 종족이라니까? 작년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만했는데, 점점 넘사벽이 돼가는 거 같아.”
‘아이어’로 돌아가 버려, 라는 지태의 농담을 들은 척 만 척하며 단유는 하늘 위의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번 주 일요일에 경시대회 나가지?”
“응.”
“그다음은 전국 경시대회인가? 언제야?”
“몰라. 이번에 통과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야, 니가 안 하면 누가 하냐?”
지태가 막대에 붙은 아이스크림의 잔여물까지 쪽쪽 빨아먹을 기세로 붙들고 있다가 핀잔을 던졌다.
“나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라고.”
“아칸 10마리로 저글링 한 부대를 못 막겠다고 하는 거랑 같은 소리야, 그거.”
무슨 소리냐고 채윤에게 물으니, 게임 이야기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눈을 찡긋한다.
“생각난 김에 오늘 피시방이나 갈까?”
“난 안 돼. 오늘 오후에도 연습 있어.”
모레가 3차전이라서 가볍게 전술 연습을 한다는 명수였다.
“오늘은 좀 건너뛰자. 너 때문에 호주머니가 말라간다고. 그리고 오늘 집에 가서 인강도 봐야 돼.”
채윤의 투정에 지태가 김빠졌다는 얼굴로 단유를 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말아라. 나 혼자 갈란다.”
하면 얼마나 한다고, 중얼대는 지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일어난 단유에게 명수가 물었다.
“집에 가?”
“응.”
“그럼 내 가방 좀 갖다 놔줘라.”
“그래.”
“오오, 가방 셔틀!”
“이 자식이!”
명수가 지태의 머리에 헤드락을 걸고 장난치는 사이, 단유는 세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자리를 떴다.
토요일이었지만 단유네 집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장계중의 예선 3차전이 오전에 있었고, 오후에 단유는 서울 소재의 대학교에서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경시대회는 2시부터90분간 치뤄지는데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단유는 경기장에 가지 않기로 했다.
“명수야, 유니폼 다 챙겼지?”
“네.”
이미 가방을 둘러맨 명수가 하은이 건네준 건강 음료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 모습을 보던 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혹시 키 컸니?”
“키야 계속 크고 있겠죠?”
하은이 단유를 바라보자, 단유도 새삼스럽다는 듯 명수를 보았다.
“매일 보는 처지라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면 난 매일 안 보는 사람 같잖아?”
“선생님이 워낙 ‘섬세’하셔서 알아보신 거겠죠?”
“오오, 김단유? 요즘 여자친구 사귀면서 말발이 되게 좋아졌는데? 그런 립서비스도 할 줄 알고?”
하은이 자못 감탄한 척을 하며 단유의 머리를 매만졌다. 단유는 그 손길을 애써 피하지 않고 대신 미소를 지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생각보다 부쩍 진보한 것을 이르는 말)라잖아요?”
단유의 대답에 하은 역시 미소를 지었다.
“괄구마광(刮垢磨光, 사람의 결점을 고치고 장점을 발휘하게 함)하는 거야?”
“입이저심(入耳著心, 들은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음)하는 거죠.”
“호학불권(好學不倦, 학문을 좋아하여 책읽기에 게으름이 없음)하더니 곧 청출어람(靑出於藍,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비유) 하겠어?”
“학여역수(學如逆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뜻)라잖아요. 더 노력해야죠.”
가방을 둘러맨 명수가 두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요. 아침부터 그러고 싶어요? 나 현관문 나서기도 전에 현기증 나서 쓰러지는 꼴 보고 싶어요?”
이번엔 명수의 머리를 매만지며 웃음을 터뜨리는 하은이었다.
“우리 명수, 머리 아팠져여? 호, 해줄까여?”
“하지 마요. 닭살 돋게.”
후다닥 물러선 명수가 먼저 간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명수를 배웅한 하은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여유롭게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있는 단유에게 물었다.
“준비는?”
“대충이요. 수학선생님이 준 기출 문제집도 다 풀어봤고요.”
“어렵진 않고?”
“어렵던데요?”
“그래? 그래도 잘할 거야.”
하은의 확신에 찬 응원에 단유는 손바닥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선생님도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별로 멀지도 않은 곳이라 혼자 가도 충분해요.”
“그래, 이제 혼자서 연애도 하는데, 그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다 컸다는 소리다, 이 녀석아.”
하은은 입꼬리를 주욱 늘린 채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수학경시대회가 열리는 곳은 서울에 소재한 한 대학이었다. 캠퍼스의 입구는 수학경시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오는 또래 아이들이 많이 보였는데, 대체로 채윤이 정도로 키가 작거나, 몸이 왜소해서 이들만 보면 절로 선입견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도리어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던 단유였다.
“아니겠지?”
“설마. 고등학생 같은데?”
학부모들마저 큰 키와 덩치에 비해 어려 보이는 외모와 수수한 옷차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등학생 중에도 단유 정도의 덩치를 가진 이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다.
“단유야.”
단유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핸드폰을 손에 든 수학 선생님, 승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손에는 지선이가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지선이까지?”
“오빠 응원하러 왔어.”
굳이 응원까지 할 정도인가, 싶어서 머쓱해 하는 단유에게 승민이 말했다.
“응원도 하고, 지선이랑 모처럼 나들이도 할 겸해서 나왔다.”
“지선이 너 이제 나와도 괜찮아?”
“괜찮아. 이제 몸 튼튼해졌어.”
“다행이네.”
단유는 지선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승민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보니까 긴장은 안 한 거 같네.”
“긴장이랄 거까지야 있나요.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죠.”
“그래, 편하게 해라. 그리고 혹시라도 안 풀리는 문제가 있으면 너무 붙들고 있지 말고.”
그 외에도 선생님은 몇 가지 충고를 하면서 단유를 붙들었다. 사실 단유의 의도와 상관없이 진행된 면도 없잖아 있어, 처음엔 그게 불만이기도 했던 승민이었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단유라는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이를 경시대회라는 명목으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인정받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오빠 이거.”
지선이가 단유에게 조그만 종이가방을 건넸다. 엿과 초콜릿, 음료수가 든 가방을 받아든 단유는 웃음으로 답례했다.
“고마워.”
“드가봐라. 우리도 이제 갈란다.”
“네, 선생님. 끝나고 연락 드릴게요.”
“그래라. 수고하고.”
서로 먼저 들어가라며 아웅다웅하다, 결국 단유가 먼저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대학교 안의 고사장을 찾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