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00화 (400/956)

코스모스의 순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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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었어요?”

“응, 재미있었어. 특히 마지막이 제일 재미나더라.”

너 골 넣었을 때, 라며 나윤이 수줍은 웃음을 지어 보이니, 단유는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냄새 많이 나죠?”

“넌 냄새에 되게 민감한 거 같아. 조금만 땀 흘려도 냄새나냐고 그러고. 혹시 내가 연습실에서 안무 연습하면서 땀 흘렸을 땐, 가까이 오기도 싫었던 거 아냐?”

“조금?”

“야!”

“농담이에요. 아무튼, 오늘 와주셔서 고마워요.”

“잠깐 시간 내서 온 건데 뭘. 어차피 회사에 있어 봐야 골방에 틀어박혀서 노래나 듣고 있었을 텐데. 바람도 쐬고 남자친구도 보니까 기분전환이 된 거 같아 더 좋네.”

“그럼 다시 회사로 돌아갈 거예요?”

“응, 그래야지.”

기약 없는 컴백을 기다리며 다시 골방으로 들어가야겠지.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넌?”

“저요? 전 집에 가서 씻어야죠.”

“바로 집에 가는 거야?”

“가서 씻고, 공부도 해야죠.”

“아, 다음 주에 시험이라고 했지?”

“뭐, 그렇긴 하지만, 딱히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최근에 관심이 가는 주제가 있어서 그걸 공부하고 있어요.”

“뭔데?”

“관성 모멘트라고 회전 운동을 할 때 물체의 질량이···.”

“오케이, 거기까지.”

나윤이 손을 뻗어 단호하게 외쳤다.

“니가 그런 이야기할 때마다 다른 세상 사람같이 느껴져.”

“다른 세상이요?”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왜 미안해요?”

“공부하기 바쁜 애를 꼬셔서 시간만 뺏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또 그 소리.”

단유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나윤의 볼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또 얼굴이 붉어진 나윤은 그래도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점점 단유의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는데, 그 손길을 받을 때마다 나윤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인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공부하다가 지치면 전화해.”

“누나도 연습에 지치면 전화해요.”

“난 전화하기가 미안해.”

“왜요?”

“괜히 집중해서 공부하는데 방해하는 것 같아서.”

단유는 괜히 한숨을 쉬는 척하자, 나윤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런 생각 안 할게.”

“생각날 때마다 전화해요. 누나 전화는 괜찮으니까요.”

“고마워.”

“그런 거로 고맙다니요. 그런 말 말아요.”

대화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역시 아쉬움이 남아서이리라.

감독님에게도 먼저 돌아가겠노라 인사한 후, 단유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상쾌한 기분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노트를 펼치고 펜을 잡자, 조금 전까지의 일들은 모두 잊고 오직 노트에만 집중하는 단유였다.

하지만 한 시간 후, 단유는 펜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자신이 여태 배우고 익힌 지식들을 정리하는 수준이었다면, 이 연구과제는 자신이 모르는 부분, 혹은 막히는 부분을 뚫어나가야만 하는데 노트와 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탓이었다. 책장에 구비 된 책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지라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서관에 가볼까?’

아니면 서점에 가서 책을 사도 될 일이다. 예전처럼 돈이 없어 책을 사지 못할 것도 아니니까.

단유는 생각난 김에 서둘러 서점을 가보기 위해 준비를 하고 현관을 나섰다.

“어? 너 어디가?”

마침 명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서점에 책 사러.”

“설마 서점 데이트?”

“응?”

“누나랑 서점에서 데이트하려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단유의 단호한 대답에 흥미를 잃은 명수는 다녀오라며 간단하게 손짓으로 배웅한 뒤 집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단유는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잠시 ‘서점 데이트’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손때를 덜 탔던 책들을 보면, 책을 별로 안 좋아하던 거처럼 보였기에.

‘모르지. 내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1층에서 내린 단유는 오피스텔 정문 대신 비상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단유를 만나고 회사로 돌아온 나윤은 복도에 비치된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던 종철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나윤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자, 정신이 딴 데 팔려있던 종철이 뒤늦게 나윤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어디 갔다 오나 봐요?”

“아, 네.”

손에 쥔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행색을 살피던 종철이 나직하게 물었다.

“남자친구?”

짓궂다 여기면서도 종철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윤은 대답을 피했다.

“여유롭게 보여서 좋네요.”

비꼬는 걸까? 시선을 돌렸던 나윤이 종철을 바라보니, 이번엔 종철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안무 연습을 하다 나온 것인지 턱 끝에 맺힌 땀방울들이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여유일까?’

문득 나윤은 자신이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단유에게 ‘방해’가 될 것 같다며 미안해했지만, 정작 자신은 ‘방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단유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게 뭐가 문제냐, 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습에 임하는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나윤을 흘깃 바라본 종철은 괜한 말로 나윤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여겨 사과했다. 아니 사과하려 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해보면 딱히 잘못된 말도 아니지 않은가? 누구는 데뷔도 못하고 언제 데뷔할지도 모르게 미래를 회사에 저당 잡힌 채로 땀을 흘려야 하는데, 나윤은 데뷔도 했고 노래도 성공을 거뒀고 그래서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저 먼저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종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어차피 남자친구가 있으니 자기 같은 팬 따위야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그게 뭐 귀에나 들리겠어?’

라는 마음에 종철은 가슴 한편에서 생긴 후회의 감정마저 짓눌러버렸다.

잠시 후, 골방이라고 불렀던 보컬 연습실에 들어온 나윤은 의자에 앉아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고민을 털어냈다가도 다시 고민이 생기고, 의욕이 생겼다가도 다시 꺾이기를 반복하는 이 생활이 지겹다고 느껴졌다.

‘차라리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았다면.’

학교에 있는 친구들은 이런 걱정 하지 않고 살 텐데. 그저 시킨 대로 공부만 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대학에 가고, 적당한 회사에 취직해서 독립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차라리 부럽다.

혹자는 지금 나윤이 걷는 이 길을 성공의 길이라고 불렀고, 다른 이들의 삶을 평범하고 지루한 삶의 길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맞고 틀린 길은 없으니,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가라고 하지만, 어느 길이 자신의 길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자신의 길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는데, 반짝이는 스타에 대한 ‘동경’과 취미로 삼으면 그만일 노래를 업으로 삼은 괜한 ‘오기’ 때문에 이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편해질까?’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귀에 이어폰을 꽂고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지 못한 나윤은 배터리 다 된 MP3기기를 손에 쥔 채로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안무연습실로 돌아온 종철에게 2살 어린 석원이 물었다.

“형?”

“응?”

“···아, 아니에요.”

밝은 핑크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연습생이 머리 색만큼 볼을 붉히며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 종철이 아차했다.

“아, 맞다. 미안. 깜박했어.”

굳이 자신이 바람도 쐴 겸 나가서 물을 떠 오겠다고 나가놓고선, 빈손으로 돌아와 어린 동생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저도 땀 좀 식힐 겸 나갔다 오죠. 물통은요?”

“아, 그거. 아마 정수기 근처에 있을 거야.”

물통도 밖에 두고 나왔다. 정신머리하곤. 자책하는 종철에게 석원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도 가끔 연습 오래하면 깜빡깜빡하는데요. 형도 좀 더 쉬세요. 벌써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했잖아요.”

종철은 석원의 배려에 고맙다고 말하며 연습실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맞은편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니 석원의 말처럼 지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슬쩍 눈을 돌리니 주변의 아이들도 많이 지쳐 보였다. ‘쉬었다 하자’고 권하니 못 이긴 척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이들이었다. 헤헤거리며 웃음을 짓는 여자아이들도, 웃을 기운조차 없어 고개를 떨구는 이들도 오랜 연습에 지치긴 마찬가지이리라. 쉬라는 말에도 설렁설렁 움직이긴 하지만 스텝을 밟으면서 안무 동선과 동작을 숙지하려 하는 연습생도 있었다.

다양한 모습이지만 하나같이, 지금의 연습이 데뷔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그랬듯이.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저렇게 연습한들 데뷔를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 바닥에 있다 보니 이러저러한 모습도 다 보며 지냈다. 어떤 이는 미련하게 연습만 했지만, 어떤 이는 부모님과 함께 대표를 자주 찾아뵙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고, 어떤 이는 방송국에 찾아가 로비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다 성공을 거두지도 못하더라만.

그래도 그런 로비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더 좋았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자신이 여자였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여자 연습생’들은 다 저러겠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설령 한 번도 로비를 해보지 않았던 연습생이라도, 내심으로는 그런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문득 ‘나윤’도 그런 연습생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TV로 보이는 이미지와 실제의 이미지가 다른 경우는 허다했고, 그 경우에 비쳐 보자면 나윤도 보이는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순 없는 법이다.

‘게다가 남자친구도 있지 않은가?’

뮤직비디오에 같이 출연했던 남자와 사귀고 있는 나윤이니, 일적으로 관련되면 쉽게 마음을 허락하는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회사의 대표 이사 중 한 명인 박 이사에게도 마음을 허락했을지도.

마음속의 어둠이 점점 크기를 더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종철이었다.

“똑똑.”

나윤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퍼뜩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무리 노크를 해도 돌아보질 않아요?”

단유가 긴 팔 티셔츠 한 장을 가볍게 입은 채로 문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이요.”

단유는 나윤이 앉은 의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윤을 올려보았다. 키가 큰 단유가 그러고 있으니, 어쩐지 귀엽다고 느껴져서 나윤은 웃음을 픽 하고 터뜨렸다.

“무슨 일로 온 거야?”

단유는 사실대로 서점에 가려 했음을 이야기했고, 문득 생각나 같이 가지 않을 건지 물어보려고 왔다고 대답했다.

“뭐야, 그게. 데이트 신청을 그렇게 멋없이 하니?”

“멋은 잘 모르겠고요. 누나 보니까 아무래도 그냥 혼자 가야 할 거 같아요.”

단유는 자세가 불편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윤이 단유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주저앉혔다. 왜, 라는 단유의 눈빛에 나윤이 말했다.

“맨날 올려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은데?”

“그럼 계속 이러고 있을까요? 누나랑 있을 때마다?”

“오늘이면 충분해. 그리고 왜 혼자 가겠다는 거야?”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사람한테 시간 내달라고 말하기가 미안해지더라고요. 누나가 평소에 왜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아냐, 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

다급하게 변명하는 나윤에게 손을 뻗은 단유는 나윤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고민이 많아요?”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윤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요?”

“아니, 그냥 그러네. 아이참. 부끄럽게.”

“무슨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하고 싶으면 이야기해요. 잘 들어드릴게요.”

“···고마워.”

나윤은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내고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계속 골방에 있었더니 괜히 우울해진 거 같아. 나가자. 서점이든 어디든 나가서 바람이라도 쐐야겠어.”

“이러다 나가버릇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모르겠다. 이러다 진짜 나가게 될지도. 하지만 일단은 그런 생각도 다 뒤로 미뤄야겠다. 단유에게까지 자신의 걱정과 우울함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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